“중도는 곧 바른 삼매를 정점으로 한 팔정도”

중도 단순한 중간지점 아니라
재가의 삶과 고행 두 극단 떠나
정각으로 이끄는 사선정 가리켜

사성제 12가지 측면 여실지견한
붓다의 정각과 교진여 법안성취
초전법륜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

석가모니 붓다의 초전법륜이 설해진 장소는 갠지스 강변에 위치한 카시국의 주요 도시인 바라나시(Bārāṇāsī) 근처 이쉬바사나(Ŗs.ivasana) 녹야원(鹿野苑)이다. 이 첫 설법을 기점으로 붓다는 최초로 비구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삼보가 형성되며, 이후 삼보를 근간으로 불교 교단사가 전개된다. 이 역사적 사건을 율장과 경장에서 모두 기록하고 있는데, 이번 호에서는 경장의 서술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기본적으로 초전법륜을 서술하고 있는 경전은 율장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거나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그 때문에 앞 호에서 요약한 율장의 전체 줄거리를 기준으로 내용별로 다음과 같이 두 유형으로 나누어 논의한다.

유형1. 율장에서 ③, ④만 편집: Saṃyuktāgama, “Dharmacakrapravartana-dharmaparyāya” (ed. JIN-IL CHUNG, 2006) ; Das Catuṣpariṣatsūtra II (ed. Ernst Waldschmidt, 1957) ; The Tibetan Tripitaka, “chos khy ’khor li’i mdo” ; 구나발다라(Guṇabhadra)역, <잡아함경> no.379 ; 의정 역, <삼전법륜경(三轉法輪經)> 

유형2. 율장에서 ②, ③, ④만 편집: Saṃyuttanikāya V, Dhammacakkapavattana-vaggo, “tathāgatena vutta 1” (ed. M. Leon Feer, 1976) ; 안세고 역, <전법륜경(轉法輪經)> ; 승가제바(Saṃghadeva)역, <증일아함경> ‘권청품(勸請品)’ 19.2.

위에서 보듯이 초전법륜의 내용이 서술된 현존하는 경전들은 산스크리트와 팔리어 전승부터 그에 대응하는 티베트와 한문 번역까지 모두 합쳐 여덟 종류이다. 재차 이것들을 율장 내용과 비교할 경우, 유형1은 ③, ④만, 유형2는 ②, ③, ④만을 서술하고 있다. ②는 붓다가 중도, 팔정도, 사성제의 의미를 설한 것이고, ③은 회고적 어투로 자신이 어떻게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을 통해 정각을 체험했는지, 어떻게 그 체험이 최고로 올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임을 확인했는지를 술회한 것이다.

그리고 ④는 다섯 비구들 중 교진여에게 법안이 열리고, 그 순간 신들이 축하 메시지를 서로 전달하면서 이 사건을 초전법륜이라 명명한다고 묘사한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위의 경전들만 비교 대상으로 할 때 그 차이가 보이는 부분은 ②이고, 공통된 부분은 ③, ④이지만  범위를 넓혀 율장의 모든 판본들까지 대조하면 초전법륜을 기록한 현존하는 모든 텍스트에서 ③과 ④의 내용이 공통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성제를 12가지 측면으로 여실지견한 붓다의 정각 체험(③)과 그것을 들은 교진여의 법안 성취(④)가 초전법륜에서 결코 다른 것과 대체할 수 없는 가장 핵심적 내용이라는 것이다. 

또한 산스크리트어로 전승된 아가마와 그 대응 번역들은 ③과 ④만 편집한 반면, 팔리어로 전승된 니까야와 그 대응 한역들은 ③과 ④의 앞에 ②까지 편집하고 있다. 만약 율장과 경장의 내용을 모두 참고할 수 없어서, 유형1의 경전만 혹은 유형2만 접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면 전승된 텍스트에 따라 첫 설법에 대한 중심 테마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유형1만 배운 수행자라면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을 중시하여 반야 수습에 매진할 여지가 있지만 유형2만 배운 자라면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 이전에 선결 과제로 팔정도와 삼매 수습에 더 주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먼저 경장 서술에서 차이가 나타나는 ②의 내용을 살펴본 다음, ③과 ④라는 공통된 부분을 다룰 것이다. 

<쌍윳따니까야> 56.11(SN V)에 따르면 붓다가 다섯 비구들에게 설명한 중도는 다음과 같다.

출가 유행자들은 이 두 가지 극단을 행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감각적 욕망의 대상(kāma)들에서 감각적 욕망의 대상들에 대한 즐거움(sukha)에 탐닉하는 것으로서, 하열하고 통속적이고 일반적이고 성스럽지 않고 이롭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에 전념하는 것으로 고통스럽고 성스럽지 않고 이롭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두 극단에 다가가지 않는 중도, 즉 여래가 완전한 깨달음으로부터 눈을 일으키고 지혜(ñāṇa)를 일으킨 것은 적정, 뛰어난 지혜, 정각,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중도는 감각적 욕망의 대상들에 대해 즐거움을 탐닉한다는 극단과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에 전념한다는 극단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우선 주의해야 할 부분은 이 문장의 주어가 출가 유행자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중도를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왜 출가자가 두 극단에 다가가면 안 되는가? 이 문맥에서처럼 출가자의 목표가 적정, 뛰어난 지혜, 정각, 열반이라면 두 극단 모두 성스럽지 않고 해탈에 이롭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코 적정 등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오비구에게 법을 설한 초전법륜을 표현했다.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부처님께서 오비구에게 법을 설한 초전법륜을 표현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또한 ‘여래가 완전한 깨달음으로부터 눈을 일으키고 지혜를 일으킨 중도’라는 구절에서 붓다 스스로가 지칭하는 일인칭으로 ‘여래’를 파악할 경우, 중도는 붓다가 깨달을 때 정각으로 이끌었던 어떤 체험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은 <증일아함경> ‘권청품’에서도 나타난다. 거기에서 붓다는 1인칭 주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스스로 정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중도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감각적 욕망의 대상들에 대해 즐거움을 탐닉하는 첫 번째 극단은 하열하고 통속적이고 일반적인 ‘재가에서의 삶’을 가리킬 것이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에 전념하는 두 번째 극단은 고행림에서 닦았던 ‘고행 정진’을 지칭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도의 발견은 음식물까지 단절한 극단적 고행을 포기한 후, 붓다에게 깨달음의 전환이 일어났던 유년 시절의 초선 체험에 대한 기억과 맞물려 있어야 한다. 

<마하쌋짜까 경(Mahāsaccakasutta MN36)>에 따르면 붓다는 최고의 극단적 고행을 수습했음에도 해탈의 필수 요소인 성인에게 적합한 탁월한 지견을 얻지 못한다. 이에 고행을 포기하고서 깨달음으로 가는 다른 길을 찾게 되는데, 그때 곧바로 떠오른 것이 석가족 밭고랑 행사에서 체험했던 초선의 기억이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붓다는 ‘나는 감각적 욕망의 대상들과 다른, 불선법(不善法)들과 다른 그 즐거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MN I, 247),

즉 초선에서 감수한 즐거움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얻는다. 그 확신에 따라 두려움 없이 비감각적인 즐거움을 감수하기로 한 붓다는 유미죽을 먹고 기운을 차린 다음, 보리수 아래로 자리를 옮겨 그 즐거움을 감수하면서 순서대로 초선, 제2선, 제3선, 제4선이라는 사선정을 성취한다. 그리고 제4선에서 사성제에 대한 여실지견을 응용한 루진지(漏盡智)를 통해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된다. 

다시 말하면 붓다의 정각 체험의 맥락에서 중도의 발견은 유년 시절 초선 체험에 대한 기억과 맞물려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사선정을 포괄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제4선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중도는 단순히 중간지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가에서의 삶과 고행정진이라는 두 극단에 다가가지 않는 중도이고, 정각으로 이끌어 주는 제3의 가능성으로서 사선정인 것이다. 한편 초전법륜에서 사선정을 가리키는 중도와 십이연기에서 설명된 연기=중도는 그 내용이 다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초전법륜의 서술에서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바로 팔정도로서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바른 견해, 바른 결심,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계수단, 바른 정진, 바른 사띠, 바른 삼매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 항목만 열거할 뿐 팔정도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다.

반면 곧바로 이어진 사성제는 그 의미가 상세하게 해설되어 있다. 붓다가 설한 사성제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이전에, 그 사성제 중의 하나인 도성제를 팔정도로 설명한 부분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중도, 팔정도, 사성제로 설해진 전반적 서술 구조에서 팔정도를 중심으로 ‘중도=팔정도<사성제’라는 도식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개된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두 극단에 다가가지 않는 중도는 적정 등으로 이끄는 것이고, 그 중도가 다름 아닌 바른 삼매를 정점으로 한 팔정도이며, 팔정도는 붓다가 여실지견한 진리인 사성제 가운데 도성제이다. 그럼에도 붓다는 내용 설명 없이 팔정도의 항목들만 나열하고 있다.

말하자면 팔정도의 내용만큼은 다른 텍스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맥이 붓다의 첫 설법임을 감안하면 대부분 독자들은 이 지점에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은 다음 호에서 논의하겠다. 

[불교신문3647호/2021년1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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