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 올린 마지 생명에 베푸니 공덕 ‘무량’

송광사 조왕단에 마지를 올리는 행자.
송광사 조왕단에 마지를 올리는 행자.

마지로 오르는 세시음식 

마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일상의 마지는 쌀밥이지만, 명절이면 부처님께도 다채로운 절식(節食)을 마지로 올린다. 설날의 떡국마지에서부터 대보름의 오곡밥마지, 동지의 팥죽마지가 있고, 추석에는 쌀밥마지와 함께 송편이 오르게 마련이다. 섣달그믐에 묵은 제사를 지내는 절에서는 이날 떡만둣국 마지를 올리기도 한다. 특별한 음식을 만들면 집안 어른께 먼저 드리듯이, 세시(歲時)에 맞는 음식을 부처님께 올리면서 제자들이 함께 공양하는 의미가 자연스레 실천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짓날 팥죽마지 설화도 생겨나 여러 사찰에서 전승되고 있다. 어느 절의 스님이 동짓날 새벽에 팥죽을 쑤려고 나가보니, 아궁이에 불씨가 한 점도 남아있지 않았다.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 하는데 눈앞이 캄캄해졌고, 부랴부랴 아랫마을 김씨 댁에 불씨를 얻으러 갔다. 그런데 그 댁 노인이 말하기를 “새벽에 동자승이 절에 불씨가 꺼져 부처님께 팥죽공양을 올리지 못하게 됐다고 왔기에, 추워 보여 팥죽 한 그릇을 퍼줬더니 얼른 먹고 불씨를 챙겨 돌아갔다”고 했다. 

어리둥절해진 스님이 급히 돌아와 보니 아궁이에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영문을 따질 겨를도 없이 얼른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올린 다음, 다시 한 그릇을 받쳐 들고 나한전으로 올라가니 나한성중 가운데 한 분의 입가에 팥죽이 묻어 있는 게 아닌가. 나한의 가피로 팥죽마지를 무사히 올리게 되었음을 알고, 스님은 수없이 절을 올리며 불씨 단속을 철저히 하게 되었다. 동지마지로 반드시 올랐던 팥죽의 보편성과 함께, 나한의 자재하고 유쾌한 행보가 결합된 설화라 하겠다. 

1960년대 말, 청담스님이 주석하던 서울 도선사에서는 사시마지로 국수를 올려 ‘불전에는 쌀밥마지를 올린다’는 틀을 깼다. 쌀이 절대 부족하던 당시, 혼식ㆍ분식을 하지 않으면 많은 국민이 끼니를 거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청담스님은 밥 대신 국수를 올리도록 함으로써 부처님께서 참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꿰뚫었다. 실제 극심한 식량난으로 쌀이 귀했던 1950~60년대에는 쌀이건 보리건 있는 대로 마지를 지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놋쇠그릇에 담긴 국수는 불전에 쌀밥을 올리고 싶은 제자들의 마음과, 중생의 고난을 보듬는 부처님의 마음이 합쳐진 변주곡이었다.
 

통도사 산령각에 마지를 올리는 학인 스님.
통도사 산령각에 마지를 올리는 학인 스님.

각단 마지와 마지시간

불단만이 아니라 각단에도 마지가 오른다. 1960년대 말에 출가한 어느 스님은 행자시절, 아침마다 대웅전에서부터 산신각까지 마지와 불공을 올리고 오면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사시마지를 올릴 때 칠정례를 하지 않고 대예참을 했기에 시간이 더 소요되었던 셈이다. 

오늘날에도 일상의 마지를 올리는 대상이 불보살에 국한되지 않고 산신ㆍ칠성신ㆍ조왕신 등에 이르기까지 열려 있다. 신도들은 산신각에 마지 올려주기를 원하고 절에서는 부처님 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않아 갈등을 빚은 때도 있었지만, 단을 세워 모신 존격(尊格)이라면 모두 마지를 올릴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사찰마다 마지공양의 대상 범주가 서로 다른 것은 각자 여건에 따른 선택일 따름이다. 

사시마지를 올리는 전각의 수가 각각 17개ㆍ12개인 영축총림 통도사와 조계총림 송광사의 하단신격을 비교해보면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다. 통도사에서는 가람신을 모신 가람각과 산신을 모신 산령각에 사시마지를 올리고, 조왕단에는 마지를 올리지 않는다. 이에 비해 송광사의 경우 산신각에는 마지를 올리지 않지만, 조왕은 마지공양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한 칸짜리의 작은 가람각과 산령각에 학인스님이 마지를 올리고, 조왕단의 마지뚜껑을 연 행자가 죽비를 세 번 치자 주방의 모든 이들이 합장저두하는 두 사찰의 모습은, 경건하고 정성스러움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일상마지를 올릴 때도 존격에 따라 시간을 구분하는 사찰이 많았다. 하단의 경우 사시에 함께 올리지 않고 늦은 오후에 따로 올렸던 것이다. 이를테면 금산 태고사에서는 신중단과 산신각 마지는 매일 네댓 시에 올렸고, 1970년대 말 예산 견성암에서도 선방 방선시간인 4시에 부전 스님이 칠성신ㆍ산신ㆍ조왕신에게 돌아가며 마지를 올리고 염불을 했다. 당시 견성암에서 행자생활을 한 원 스님은, 후임행자가 들어오지 않을 때 새 부지깽이를 깎아 조왕단에 올리며 “행자 좀 보내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신기하게 영험이 있었다니, 매일 마지를 올릴 만하다.

여러 의식집에 “사성(四聖)은 오전에 모시고, 육범(六凡)은 해질녘에 부른다”고 했다. 사성은 불ㆍ보살ㆍ성문ㆍ연각이고, 육범은 천상ㆍ인간ㆍ아수라ㆍ축생ㆍ아귀ㆍ지옥의 윤회하는 중생이니, 존격에 따라 일상마지 시간을 구분했던 옛 스님들의 여법한 정성이 놀랍다. 
 

불단에 올린 마지(통도사 금강계단).
불단에 올린 마지(통도사 금강계단).

생미마지의 내력 

1980년대까지 정초가 되면 사찰마다 진풍경이 벌어졌다. 각자 가지고온 쌀로 마지를 지어 불공을 올리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쌀자루를 인 신도들이 마당에 긴 줄을 서곤 했다. 합동불공 개념이 없었던 시절, 집집마다 스님과 함께 부처님부터 각단을 돌며 독불공(獨佛供)을 올렸던 것이다. 보름까지 이어진 소모적인 불공으로 스님과 후원소임자들의 고생은 말할 수 없었고, 각단마다 올린 마지 밥도 엄청난 양이 쌓였다.

쌍계총림 쌍계사 방장 고산스님은 “학인시절 울산 문수암에 백일기도를 하러 갔다가 정초를 만나서, 독불공을 수백 자리씩 하며 혓바늘이 돋고 입안이 부르터 밥도 먹지 못했다”며 그 시절을 회상하였다. 이에 당시 뜻있는 큰스님들이 독불공에 마지 대신 생미(生米)를 올리도록 권장했고, 1970년대부터 ‘생미 독불공’이 전국에 퍼져나갔다. 

서울 진관사 진관스님은 생전에 전각마다 올리는 밥의 양이 승가대중의 공양인원보다 많을 때면 생미로 마지를 올리도록 했다. 마지는 퇴공해서 제자들이 남김없이 공양하는 것이었고, 신도들이 삼보에 헌공한 식량을 귀하게 다루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미마지는 밥을 남기지 않기 위해 부처님을 위시한 성현ㆍ성중과 승가대중의 공양을 가늠해 올리는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독성(獨聖)은 생식을 한다’고 보아 나한전에는 아예 생미를 올리는 사찰도 있었다. 양주 오봉산 석굴암에는 이와 관련된 영험담이 전한다. 1950년대 중반 초안스님이 석굴암에 움막을 짓고 중창발원기도를 하던 중, 노보살 셋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찾아왔다. 석굴이 비좁았기에 스님은 석굴 밖으로 나와서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불공을 올리던 노보살들이 불기에 생미가 담긴 걸 보고, “나한님 마지를 생쌀로 올리는 걸 보니 게으른 절이군” 하며 험담을 했다. 

불공이 끝날 무렵 고개를 든 노보살들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독성의 입과 가슴ㆍ무릎 여기저기에 쌀알이 붙어 있고 불기의 쌀은 움푹 파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석굴암 나한님이 생쌀을 드신다’는 소문이 퍼져, 공양미를 들고 몰려든 신도들 덕에 중창불사도 원만히 회향되었다는 사연이다. ‘팥죽마지 설화’와 함께, 어떤 단(壇)에 오르는 어떤 마지에도 저마다의 내력과 공력이 있음을 새겨보게 한다. 
 

동짓날에 올리는 팥죽마지. ⓒ진관사
동짓날에 올리는 팥죽마지. ⓒ진관사

확산되는 마지공덕 

“부처님 마지만 내려도 열 명이 먹을 수 있었지요.” 스님들의 기억에 따르면, 옛날 마지불기는 아주 커서 10인분의 밥이 들어가는 것도 많았다. 12개 전각에 마지를 올리는 송광사의 경우 마지 내린 밥을 모으면 40인 분량이 넘는다니, 근래의 불기에도 4인분 정도의 밥이 담기는 셈이다. 송광사는 오전에 따로 지어올린 마지를 모아 저녁공양을 하고 있어, 전각 대비 스님 수를 계산하면 대부분의 절에서 그날 내린 마지로 한 끼가 해결될 듯하다. 

청도 운문사에서도 저녁공양은 따로 짓지 않고, 아침공양 때 남긴 밥과 마지 밥을 함께 쪄서 먹고 있다. 규율이 엄해 ‘운문 사관학교’라 불렸지만 운문사 스님들의 학인시절 추억담엔 장난이 가득하다. 먹을 게 부족했던 때라 보름 주기로 삭발할 때 나오는 찰밥이 귀한 별식이었고, 그날은 마지도 찰밥으로 올렸다. 대웅전 마지는 퇴공하지만 삼성각 등은 부전스님의 소임이라, 찰밥마지를 내가지 않고 탁자 밑에 숨겨두곤 했다. 그리고 “어느 전각에 찰밥마지 안 내렸다”는 속삭임과 함께 몇몇 도반이 몰래 가서 찰밥을 나눠먹었다는 것이다.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절엔 절 살림도 다를 바 없었다. 저녁은 묽은 시래기죽으로 때우고 아침은 보리밥으로 발우를 펴다가, 그나마 점심에야 마지 섞인 공양으로 쌀밥구경을 할 수 있었다. 또 보리밥을 뜸 들일 때 마지 밥을 가운데 얹어, 어른스님들께는 쌀밥을 많이 섞어 드리고, 다음 순서대로 조금씩 쌀밥을 섞어서 내고나면 공양주 소임인 자신의 밥엔 쌀알조차 찾을 수 없었다는 스님의 이야기도 들었다. 

마지 밥을 먹는 존재 또한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시불공을 마치면 헌식(獻食) 소임의 스님이 밥 한 술을 덜어 헌식대에 올려두는데, 이는 굶주린 이류중생(異類衆生)을 위한 보시이다. 점심에 법공양으로 발우를 펴는 사찰에서는 공양 전에 각자 떠낸 밥알을 십시일반 모은 생반(生飯)으로 헌식을 하게 된다. ‘헌식공덕은 더없이 크다’고 했듯이, 예전에는 법랍 있는 스님이 헌식 소임을 맡을 수 있었다. 

부처님께 올렸던 마지에 얼마나 큰 가피가 깃들었을 것이며, 그 마지가 제자들에게 이어지고 굶주린 생명에까지 베풀어지니, 널리 퍼져가는 마지공덕이 무량하기만 하다. 

[불교신문3647호/2021년1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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