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흘리는 비석 표충비가 모셔진 표충비각
땀 흘리는 비석 표충비가 모셔진 표충비각

나라에 큰 일이 닥칠 때 마다 땀을 흘린다고 전해지는 밀양 표충비가 1월22일 오후1시부터 많은 땀을 흘려 주목받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1월23일 새벽 5시까지 이어졌으며 아침 7시가 돼서야 완전히 멈췄다. 표충비각을 관리하고 있는 홍제사 주지 범철스님은 “22일 오전까지 관찰되지 않았던 땀 흘리는 현상이 오후 들어 관찰되기 시작했으며 그 양이 어림잡아 2리터 가량이었다”고 전했다.
 

마치 사람척럼 땀을 흘리고 있는 표충비
마치 사람처럼 땀을 흘리고 있는 표충비

정확하게 계량한 것은 아니지만 땀이 흘러내린 시간과 비석아래 흥건히 고여 있던 수분의 양으로 미루어 적은 양이 아니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범철스님은 “겨울철 온도변화에 따른 결로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결로현상의 경우 물방울이 맺히는 정도이지 마치 사람이 땀을 흥건히 흘리는 것처럼 많은 양의 수분이 흘러내려 비석 주위에 고이는 현상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예로부터 표충비는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에 비석 전면에 자연적으로 땀방울이 맺혀서 구슬땀처럼 흘러내린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라고 불리기도 한다.

때로는 비석의 4면에서 이슬처럼 몇 시간씩 계속해서 흐르다가 그치는데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조대에서는 물기가 전혀 비치지 않는다고 전한다.

밀양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존중하고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있다.

표충비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1910년 국권 피탈, 1945년 해방, 1950년 6.25 동난, 1961년 군사정변 등 3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 사건이 발생할 때 마다 땀 흘리는 현상이 관찰됐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호인 표충비는 1742년 10월 사명대사의 5대손인 남붕선사가 경상북도 경산에서 돌을 가져다가 현재의 자리(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세운 것으로 좌대를 포함한 총 높이는 380cm, 비신의 높이 275cm, 너비 98cm, 두께 56cm의 큰 비석이다. 통도사의 말사인 홍제사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석의 정면에는 ‘유명 조선국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영당비명병서(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靈堂碑銘幷序)’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 비명’과 ‘표충사(表忠祠) 사적기’를 음각했다.

또한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승병활동을 한 사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 내용, 선조 임금의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데리고 온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표충비는 비석 3면에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일명 삼비(三碑)라고도 불린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몸통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을 얹은 구조이며, 비의 몸통은 검은 색 대리석을 사용했다.

비문은 영중추부사 이의현이 짓고,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이 글씨를 썼으며, 판중추부사 유척기가 전서했다.

홍제사는 1742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 태허당 남붕선사가 조선시대 승병장인 사명대사(四溟大師)의 표충사당과 표충비각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사당 수호사찰이다.

현재의 터에 표충비와 사당을 세우면서 사당을 지키는 수호사찰 역할을 했으나 사당이 영정사(지금의 표충사)로 옮겨지면서 비각의 보호와 관리를 위해 작은 원당과 삼비문(三碑門)을 세운 것이 그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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