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지금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정진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남긴 철학적 메시지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명제”
- 미국 사회학자 다니엘 벨

‘언젠가 다음에 밥 한 번 먹자’
사랑하는 사람에겐 삼갈 멘트
사랑은 내일,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실천할 일이다

2600여 년 전 인도의 룸비니 동산에서 인류의 역사를 바꾼 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마야 부인과 정반왕 사이에서 태어난 싯다르타다. 후에 석가모니 붓다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 아이는 일곱 발자국을 걸으며 그 유명한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天上天下 唯我獨尊)”라는 사자후를 외친다. 인간은 신분이나 성별,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두가 존엄한 존재라는 위대한 선언이다. 이 사자의 외침은 인류가 지속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진리로 남을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의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가꾸고 정진하라는 것이 붓다가 우리에게 남긴 철학적 메시지다. 모든 것은 헛되기 때문에 삶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는 허무주의와는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른 얘기다. 사진은 인도 쿠시나가라 열반당에 모셔진 부처님 열반상.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의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가꾸고 정진하라는 것이 붓다가 우리에게 남긴 철학적 메시지다. 모든 것은 헛되기 때문에 삶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는 허무주의와는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른 얘기다. 사진은 인도 쿠시나가라 열반당에 모셔진 부처님 열반상.

➲ 진리에서 왔다가(如來) 진리로 돌아가다(如去)

싯다르타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야 부인은 세상을 떠나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에 의해 아이는 키워지게 된다. 주위의 온갖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서 자란 아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임금이 될 것 같았다. 적어도 그가 성문 밖을 나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젊은 청년은 몰래 성 밖을 빠져나가 늙고 병들어 죽은 사람을 차례대로 만난다.

이 낯선 상황과의 만남에서 그는 충격을 받고 ‘아!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라고 생각(生覺)한다. 마침내 궁궐이라는 익숙한 상황에서 잠자고 있던 그의 삶(生)이 깨어나게(覺) 된다. 화려한 왕자에서 고단한 출가사문의 삶으로 일대 전환을 이룬 것이다. 마침 아들인 라훌라도 태어났다. 집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29세에 집을 나온 구도자 싯다르타는 생사를 넘나드는 혹독한 수행을 이어간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선정과 고행을 6년 동안 수행하지만 남은 것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버린 몸뚱이와 괴로운 마음뿐이었다. 그는 몸을 괴롭힌다고 해서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까지 해왔던 고행을 과감히 버린다. 수레가 가지 않으면 말에게 채찍질을 해야 하는데, 그동안 수레바퀴에 채찍질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진리를 깨치기 전에는 결코 일어서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보리수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의 빛이 다가와 그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중생 싯다르타가 진리를 깨치고 붓다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다. 그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이후 그는 자신이 깨친 진리를 대중들에게 모두 개방한다. 이는 당시 정신문화를 독점함으로써 부와 권력을 유지했던 바라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붓다의 입장은 단호했다. 불교는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제 돈이나 권력이 없어도, 심지어 문자를 몰라도 진리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친절한 가르침으로 진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렇게 45년 동안을 전법에 힘쓰다가 그는 쿠시나가라에서 80이라는 나이로 세상과 이별을 하게 된다. 

붓다를 가리키는 명호 중에 여래(如來)란 말이 있다. 이는 본래 여래여거(如來如去)의 준말로 진리(如)에서 왔다가 진리로 가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는 보리수 아래에서 위대한 진리를 깨치고 그 세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다시 중생들이 사는 곳으로 오신 분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곳의 소식을 대중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진리의 소식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바로 붓다의 핵심 가르침인 연기(緣起),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등이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 소식을 유훈으로 남기고 진리의 세계로 다시 돌아갔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신을 등불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위대한 성자는 그렇게 세상과 이별했다.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고 미묘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는 참으로 잘 가셨지만(善逝) 남겨진 이들의 슬픔까지 가져가진 못했다. 제자들은 물론 사슴이나 토끼, 지렁이 등도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그가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유훈 속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을까?
 

중국 돈황 막고굴 제438굴의 열반도.
중국 돈황 막고굴 제438굴의 열반도.

➲ 그 언제가가 바로 지금(One day…Someday is here)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내장산 단풍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내장산에 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봄과 여름, 겨울에는 수 없이 가봤다. 특히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의 내장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하지만 정작 가을에만 가보지 못한 것이다. 단풍철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조금 양보하자는 생각이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쉬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아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물론 언제든 내장산의 단풍을 볼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때와 지금의 단풍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법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명제뿐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 1919~2011)의 말이다.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참으로 간명하게 표현한 명언이다. 우리는 평소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부모님이나 형제, 벗들과 식사 한 번 하는 일도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다음이라는 시간이 언제나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는 무상의 위력을 간과한 것이다. 다음은 관념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언젠가 다음에 밥 한 번 먹자라는 예의상 멘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날리는 법이 아니다. 사랑은 내일이나 그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천해야 할 일이다.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다.”

영화 ‘If only’ 속에 등장하는 대사다. 영화 속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바쁘다는 핑계로 늘 다음으로 미룬다. 이에 상처 받은 여인은 남자를 떠나 택시를 타고 가다 불행히도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기적적으로 같은 시간이 한 번 더 주어진다. 주인공은 그 소중한 지금이라는 시간을 언제가로 미루지 않고 당장 실행에 옮긴다.

물론 결과도 달라지고 여인 또한 죽지 않는다. 영화처럼 현실에서도 같은 시간이 주어지면 좋겠지만, 그것은 그저 바람일 뿐이다. 그러니 무상의 위력을 간과하지 말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인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으로 산다면 자신의 인생에 후회라는 단어가 머물 공간은 별로 없을 것이다.

붓다의 마지막 유훈은 우리에게 인문학의 근본 물음인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주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이란 본래 우주의 주인공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 진리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다.

붓다가 마지막까지 전하려 했던 진리 또한 무상이라는 존재의 실상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의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가꾸고 정진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남긴 철학적 메시지였다. 모든 것은 헛되기 때문에 삶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는 허무주의와는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른 얘기다. 삶을 염세적으로 바라보는 허무와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라는 무상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필자가 아직까지 내장산 단풍을 보지 못한 것은 그 ‘언젠가’라는 시간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는 그런 시간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영화 속 대사처럼 그 언제가가 바로 지금이다. <장자>에서도 수연낙명(隨緣樂命), 그러니까 인연 따라 주어진 삶을 즐기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금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주어진 인연을 지혜롭게 가꾸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곧 한번뿐인 나의 삶에 대한 예의다. 올 가을 내장산 단풍을 보러 가는지 꼭 지켜봐야겠다.

[불교신문3646호/2021년1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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