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있는 사찰 기행] 사고수호사(史庫守護寺) ① 조선실록 내장사로 가다
[주제가 있는 사찰 기행] 사고수호사(史庫守護寺) ① 조선실록 내장사로 가다
  • 박부영 기자
  • 승인 2021.01.20 16:15
  • 호수 3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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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묵대사 이끈 내장사 승병, ‘조선의 정신’ 실록을 품다

사찰은 다양한 신앙과 역사를 품고 있다. 신앙에 따라 관음·약사·나한도량 등으로 구별하며 역사에 따라 능찰·비보사찰 등 다양하게 부르기도 한다. 주제가 있는 사찰 기행은 사찰의 신앙과 전해오는 역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기획이다. 그 첫 번째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史庫) 수호사찰을 소개한다. 

임진왜란을 맞아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실록을 보관한 내장산과 내장사 모습. 서울과 도읍에 있던 실록이 이 때부터 산중으로 들어간다.
임진왜란을 맞아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실록을 보관한 내장산과 내장사 모습. 서울과 도읍에 있던 실록이 이 때부터 산중으로 들어간다.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꼼꼼하게 역사를 기록했다. 사관(史官)을 두고 왕의 말 한마디,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사실 그대로 기록했다. 왕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에 대해 쓴 글을 볼 수 없었고 사관은 철저하게 그 역할과 신분을 보장받았다. 왕은 1인 절대자였지만 법을 어기면서 제 멋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후대 평가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조선이 두 번이나 강토가 유린당하면서도 500년간 존속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지 모른다. 

그런데 조선의 과거요 현재며 미래였던 ‘조선실록’을 지키고 보존한 이는 유학자가 천대하고 배척했던 사찰과 스님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고스란히 남아 한글로 번역돼 누구나 볼 수 있으며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세계 문화유산이다. 사찰과 스님이 수백년 간 잘 보관한 덕분이다. 조선은 왜 그토록 정성들여 제작한 조선실록을 가장 천대했던 스님들에게 보관과 보호를 맡긴 것일까? 

‘세계기록유산’ 조선실록

조선실록이 처음부터 사찰에 맡겨진 것은 아니다. 전쟁 이후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서울과 지방 중심지에 보관했다. 편찬을 완료한 실록은 실록 봉안 의식을 치른 후 서울 춘추관과 지방 사고에 1부씩 보관했다. 충주·전주·성주, 삼남을 대표하는 오늘날로 치면 도청 소재지에 사고를 두고 보관했다. 

실록을 제작하고 보관하는 역사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왔다. 고려는 초기인 광종대부터 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서와 전적을 편찬하고 보관하기 위해 개경에 사고를 설치했다. 무신난 등 외우내환에 시달렸던 탓에 궁내의 사관은 불안했다. 그러자 궁 바깥에 외사고를 설치했는데 산중 사찰이 선정됐다. 합천 해인사를 거쳐 선산 득익사(得益寺), 충주 개천사(開天寺)로 옮겨다녔다. 자주 옮긴 것은 왜구 침입 때문이었다. 

고려의 경험은 조선에 그대로 전수됐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 춘추관을 비롯해 충주 전주 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실록을 보관했다. 성주 사고에서 비둘기를 잡다가 화재가 일어난 것 외에는 잘 보관됐다. 그러나 사고 보관을 책임지는 봉안사에게 지나친 접대를 하지 말라고 조정에서 관찰사에게 지시를 내리는 등 해당 지방 관원들에게는 실록 보관 업무가 여간 어려움이 아니었다. 

고려처럼 조선도 외침을 겪으면서 산중으로 이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계기였다. 왜적의 주요 침입로에 있던 서울 춘추관·충주·성주 사고가 모두 병화 피해를 입고 소실됐다. 충주와 성주 사고는 왜군에 의해 불타고 서울 춘추관도 선조가 피난간 뒤 불타면서 모두 사라졌다. 이제 전주 사고본만 남았다. 

왜군은 진주를 거쳐 전주를 칠 계획이었지만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에 막혀 좌절된다. 왜군의 호남 침투가 지체되면서 전주사고와 경기전에 모셔져 있던 태조 어진을 옮길 시간을 벌었다. 처음에는 땅에 묻을 계획이었다. 그러다 경상도 땅에서 생포한 왜적에게서 상주본실록 2점이 발견됐다는 정보와 땅에 묻은 상주본을 왜군이 꺼내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 험준한 산으로 옮기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해서 정읍 내장산 그 중에서도 은적암(隱寂庵)이 채택됐다. 배로 피할 수 있는 부안 변산과 깊은 산중인 내장산을 두고 직접 현장 방문한 끝에 내장산으로 결정됐다. 
 

사고를 보관했던 용굴암.
사고를 보관했던 용굴암.
은적암터.
은적암터.

전주에서 은적암으로 이안하다

1592년 6월 왜군이 충청도와 경계 지점인 금산을 점령하고 무주 진안을 점령하여 곧 전주 함락을 목전에 둘 정도로 상황은 급박했다. 

전라감사 이광은 태인현의 선비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錄)을 선발하여 실록과 어진을 이전 보관하는 업무를 맡겼다. 그 때 안의가 64세, 손홍록이 56세였다. 경기전 참봉 오희길, 유인 등의 관원, 안의와 손홍록 등 지역 선비, 김홍무와 한춘 등 무인과 수복, 그리고 영은사 의승장 희묵대사와 승병들이 책임을 맡았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백성 100여 명이 자원했다. 민관군과 불교가 나선 ‘조선수호대작전’이었다.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임진년 6월 신은 이내 우리 태조의 어용과 제사용 은그릇, 역대 실록, 고려사와 형지안 등 보관된 모든 책들을 50여 태(駄)에 실어 신이 직접 지휘하여 정읍 내장산 정상에 있는 은적암으로 옮기고 지켰습니다. 신은 다른 사람 보다 날래고 용감하며 담력있는 무사 김홍무등 3인과 승려 희묵 등 4~5명 및 인근 고을 산에서 약초를 캐거나 사냥하는 사람들 백여명을 모아서 감사에게 보고하고 이들을 거느리고 지킬 수 있도록 청하였습니다. 적은 끝까지 내장산에 들어오지 못하고 어용과 실록은 아무 일 없이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기록 <임계기사>는 6월22일 내장산 은봉암에 실록을 이안(移安)하고 7월1일 내장산 용굴암에 태조 수용을 이안했다가 9월28일 비래암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용굴암 내부.
용굴암 내부.

희묵대사, 조선실록을 수호하다

내장산 영은사는 오늘날 내장사다.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가 백제인의 신앙적 원찰로 약 50여 동의 전각을 세우고 영은사(靈隱寺)라 했다. 1098년(고려 숙종3년) 행안선사가 전각과 당우를 짓고 중창했다. 내장사를 일으킨 인물은 희묵(希默) 대사다. 영은사 자리에 법당과 당우를 새로 건립하고 중창하여 산 안에 무궁무진한 보물이 숨어 있다 하여 내장사(內藏寺)라 했다. 

보물이란 부처님 가르침을 새긴 경율론 삼장(三藏)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곧 보물인 셈이다. 조선실록과 태조 어진을 이안할 당시 희묵대사는 내장사 주지였다. 전쟁이 나자 스님은 승병을 일으켜 실록을 보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장사로 이안된 실록은 용굴암과 은적암 비래암(飛來庵)으로 자리를 옮기며 내장산에 보관됐다. 1월12일 찾아간 내장산은 눈으로 덮여 은색 세계를 연출했다. 내장사에서 왼쪽으로 난, 신선봉으로 향하는,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정읍시에서 실록길로 명명했다. 내장사에서 신선봉으로 2km가량 걸어가다 보면 수직으로 난 계단이 나온다. 

<난중일기>가 “사다리로 길을 이었다 끊었다 이었다 할 정도로 험준한 형세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은적암 앞에 있는 용굴암(龍窟庵) 역시 위는 바라 볼 수 없고 오직 높고 높은 하늘이 보일 뿐”이라고 적은 그 곳이다. 터를 발굴하여 계단을 놓지 않았다면 접근 불가능할 정도로 가파른 곳이다. 

눈이 쌓여 길이 미끄러웠다. 계단을 오르자 넓은 터가 나온다. 용굴암 터와 실록 보관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있다. 기록에 30~40명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라고 묘사된 굴이 보인다. 사람이 살기에는 협소해 보였다. 

내장사에 사는 스님이 아니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200여 년 뒤 1789년(정조 13년)에 예조에서 용굴암에 대해 조사하고 기록한 자료에 따르면 “영은사는 정읍현의 동남 삼십리에 있고 절의 서쪽 7리 쯤에 용굴암 옛터가 있는데 겨우 20여 척이며 정상부 끝에 있고 길이 돌고 돌아 나뭇꾼들도 왕래하지 않은 지 이미 100여 년이 되었습니다. 곁에 석굴이 있는데 30~40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석굴로 인해 용굴암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전한다. 나무꾼들도 가지 않는 험지에다 꼭꼭 숨은 곳이니 내장산을 일상으로 다니며 수도하는 스님이 아니면 알 수 없다. 
 

실록을 보관한 용굴암과 은적암 주변 모습.
실록을 보관한 용굴암과 은적암 주변 모습.

나뭇꾼들도 가지 않는 험지 

용굴암에서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다 계곡 방향으로 내려간다. 은봉암이라고 불리는 은적암 터다. 용굴암에서 가히 바라볼 수는 있으나 오를 수 없는 험지라는 곳이다.  

계곡을 타고 올라왔을 것이다. 무거운 책을 들고 옮겼다는 것이 놀랍다. 건너편 까치봉에서 바라보니 험준한 지형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내장산은 노령산맥 줄기로 산 능선에서 보면 산이 끝이 없다. 안다고 해도 들어오기 불가능한 험지다. 

왕이 두 번이나 피난 갈 정도로 위태로웠던 전쟁 중에도 산중 사찰에 안긴 실록과 조선을 개국한 태조 어진은 무사했다. 스님들은 탄압 받았지만 원망하지 않고 백성과 나라를 구하고 왕실을 수호하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조선의 왕과 신하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조선실록이 산중 사찰로 들어가 스님들에게 보관을 맡긴 이유다. 

정읍=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 이 글은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 박대길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보존되었나’,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조선왕조실록 내장산 이안 재연 연구용역 최종보고서’를 참조하였습니다. 

[불교신문3646호/2021년1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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