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조선 팬데믹 돌파할 ‘이상세계’ 꿈꿨나

오층석탑 일괄 사리장엄구는
조선전기 금산사 생생한 역사
해제수리과정 알 수 있는 자료
작품성 뛰어난 많은 불상 눈길

진표율사 미륵전 조성하면서
미륵신앙 중심도량으로 주목

여러 이적 보인 중창불사 참여
많은 대중이 희망했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 인생 고단함보다
즐거움 많아지길 간절히 염원

코로나 팬데믹이 몸과 마음을 가둔 요즈음, 불자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를 그려본다. 그 세상은 깨끗한 물이 흐르며, 아름다운 꽃이 핀다. 유리와 같이 평평하고 꽃과 향으로 뒤덮여 있는 땅, 그 곳에 사는 인간은 키는 16장에, 수명은 8만4000세나 된다. 그들은 복덕이 많고 지혜를 갖추어 근심과 걱정이 없다. 바로 미륵부처님이 강림한 용화세계의 모습이다.

현재는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므로 미래의 부처님이라고 한다.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세 번에 걸쳐 법회를 연다. 그에 따라 첫 번째는 96억인이, 두 번째 94억인이, 세 번째에 96억인이 각기 아라한과를 얻는다. 이것이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이다. 이 미륵부처님에 대한 신앙은 삼국의 불교 전래와 더불어 널리 신봉되었다. 

금산사 방등계단 앞 오층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중 일부. 청동오층탑.
금산사 방등계단 앞 오층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중 일부. 청동오층탑.

미륵부처님을 모실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곳은 어디일까.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예로부터 신성시되던 모악산 서쪽 자락에 금산사가 위치해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진표율사의 주석 이후이다. 금산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미륵도량이다. 진표율사는 미륵전과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였으며 해마다 방등계단(戒壇)에서 수계를 주어 불교교단을 발전시켰다. 고려시대에도 혜덕왕사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미륵신앙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후 미륵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이 불타고 폐허가 된다. 임진왜란 때 처영(處英)대사와 영규(靈圭)대사가 금산사를 중심으로 의승군 전투에 참여하여 큰 승리를 이끌었다. 이에 대한 왜군의 보복 때문이었다.

조선 전기 금산사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유물이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바로 금산사 방등계단 앞에 위치한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이다. 1971년 이 탑의 보수를 위해 해체하는 작업에서 탑 안에 봉안되어 있던 각종 유물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일괄 사리장엄구에는 조선 전기 금산사의 역사적 상황, 해제수리하는 불사의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 다량의 불상, 더구나 규모와 작품성이 뛰어난 많은 불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리장엄구와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동제사리합.
동제사리합.
작은 합 두 점.
작은 합 두 점.
청동 원통형 사리함.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母岳山金山寺五層石塔重創記)>와 불상 8구, 동자상 1구, 역사상 1구, 그리고 청동오층탑과 엽전 7점, 동제사리합과 작은 합 두 점이다.

‘오층석탑중창기’(길이 195.5cm)는 1492년(성종23년) 탑을 중창할 때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금산사의 과거와 중창 당시 불사의 과정, 탑의 조성시기와 시주자 등 중요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금산사는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이다”라고 시작하여 진표율사가 삼층미륵전과 장육삼존을 조성한 사실을 적고 있다.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퇴폐해진 설법전과 여러 전각, 요사 10여 채를 세조왕의 뜻에 따라 경진(庚辰, 1460)년에서 신사(辛巳, 1461)년 사이에 보수하여 단청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492년(성종23년) 9월15일에 시작해서 9월25일까지 즉 약 10일간 해체공사 당시 상황을 잘 담고 있다. 탑을 해체하자 이상한 향기가 솟구쳤으며, 미륵전 장육상이 땀을 흘렸고, 상서로운 기운이 공중에 차 있었다고 한다. 또한 탑 안에는 옛날에 봉안한 석가여래사리 5매와 정광여래사리 2매가 있었는데, 정광여래 사리가 분신하여 모두 3매가 되는 분신사리 이적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기적을 일으킨 사리를 친견하기 위해서 만인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탑에 봉안할 사리장엄구를 탑의 해체 이후 약 50일간 준비하여, 11월15일, 탑에 매납하였다. 이 때 료명, 학유스님이 원불(願佛)을 조성하여 함께 탑 안에 넣었다고 중창기는 전하고 있다. 

중창기의 끝부분에는 탑이 979년(고려 경종4)부터 982년(성종 원년)까지에 걸쳐 조성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주자에 대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세조의 서자인 덕원군을 비롯하여 직책과 이름을 함께 적은 8명과 조성에 참여한 인물들 21명이 등장한다. 말미에는 사찰의 대중 200여 명이 함께 참여하였다고 하니, 금산사 오층석탑의 중창불사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세조를 극진히 모셨던 덕원군은 1472년 회암사에 불공을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사대부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던 인물이다. 성종이 비호하여 화를 면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전하고 있다. 그는 회암사와 원각사 등 여러 사찰의 법회에 참여하였으며, 직접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勸善文)을 쓰는 등 여러 불사에 재정적 지원을 한 독실한 불자였다. 

성종대는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체계가 확립된 시기이다. 그러나 조선 왕실은 불교억압책과 함께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도 일부 견지하였다. 성종대에 대규모로 금산사 중창불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왕실의 지원도 있었지만, 사찰에서 신행조직을 결성하여 중창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노력이 어우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리.
사리.
불상.
불상.

➲ 왜 탑에 불상을 봉안했을까

그러면 왜 탑 안에 불상을 봉안하였을까. 우리나라 석탑 안에 불상을 봉안한 전통은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예처럼 통일신라시대부터이며,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불상들은 전각에 모시는 불상과 마찬가지로 불복장을 모두 갖추어 탑 안에 봉안되었다. 탑을 법신인 부처님이 상주하는 공간으로 인식한 것이다. 

발견된 상은 불상 8구, 동자상 1구, 역사상 1구이다. 이 상들의 규모는 작게는 5cm에서 크게는 30cm에 이르는데, 30cm 크기의 불상이 탑 안에서 발견된 사례는 드물다. 조성시기도 통일신라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 불상은 탑의 조성시기인 고려시대, 이후 중창시기인 조선 전기, 혹은 그 이후에 납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탑의 사리장엄구 봉안은 불상의 불복장과 마찬가지로 사리를 봉안하는 것이다. 예경하는 부처님을 조성하여 탑에 봉안하면서, 이러한 공덕으로 극락정토의 왕생과 현세의 안녕을 염원하였던 것이다. 

전소되기 이전의 금산사의 모습을 시로 표현한 것이 남아 있다. 바로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지은 시이다. 그는 생육신 중 한 사람으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이후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스님이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다양한 종류의 글을 남겼다.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금산사 방등계단 앞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금산사 방등계단 앞 오층석탑.
195.5cm 길이 ‘금산사 오층석탑중창기’.
195.5cm 길이 ‘금산사 오층석탑중창기’.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안(洞府)이 널직한데/ 엉킨 수풀 깔린 돌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金刹)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 우레 석단(石壇)을 도는구나// 낡은 짐 대(幢)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람 스치니 저녁추위 생기누나// 초제(招提, 여러 곳에서 모여 오는 스님네가 쉬어가게 마련한 집)에서 홀연히 하룻밤 자고나니, 연기 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구나. 

이 시는 마치 미륵부처님이 당시 절망에 빠진 중생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주듯이, 별들이 금산사를 밝히는 모습을 표현했다.

미륵부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했던 금산사! 여러 이적을 보였던 금산사 오층석탑의 중창불사에 참여했던 많은 대중들이 희망했던 것처럼 우리 인생이 고단함보다 즐거움이 많아지기를 염원해본다. 희망의 신앙이었던 미륵부처님의 도량, 금산사에서 이러한 마음은 더 간절하다. 

[불교신문3646호/2021년1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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