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터 모는 주지 스님…산골짜기 절엔 오늘도 ‘용연촌 사람’ 모인다

천혜의 자연 속 숨긴 듯 자리한 사찰
문화 공연 등 문턱 낮추기 위한 시도

주민들 요구에 단식 운동도 불사하며
경운기 몰며 사천면번영회장 등 맡아

①강릉 용연사는 ‘용연촌 사람들’이라는 이름 아래 스님과 신도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 매월 1회 스님과 산을 오르는 ‘용연계곡 생태탐방’은 정예 회원까지 생길 정도다. ②주지 설암스님과 마을 주민들이 겨울 계곡 탐방 후 김밥을 나눠 먹고 있다.
강릉 용연사는 ‘용연촌 사람들’이라는 이름 아래 스님과 신도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 매월 1회 스님과 산을 오르는 ‘용연계곡 생태탐방’은 정예 회원까지 생길 정도다. 주지 설암스님과 마을 주민들이 겨울 계곡 탐방 후 김밥을 나눠 먹고 있다.

강릉 시내에서 자동차로 20분을 달려 도착한 시골 마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기막 저수지를 지나 구불구불 경사진 산길을 오르고 오른다. 혹시 길을 잘못 든 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이 밀려들 즈음, 청명한 하늘 아래 천혜의 자연이 부러 숨겨놓은 듯 자리한 만월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만월산 자락에 위치한 용연사, 4교구본사 월정사 말사로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돌덩어리 굴러다니던 척박한 땅이었다. 건물이라곤 대웅전과 만월루, 작은 요사채 하나. 산골짜기 외진 곳에 자리해 인적이 드문데다 농사일로 바쁜 마을 사람들은 사찰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찰 본연의 역할은 무엇인가, 종교의 본질은 어디에 있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절 마당에 쏟아지는 달빛을 보며 스님은 다짐했다. 더 낮은 곳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겠노라, 부처님을 대신해 그들과 벗하며 살겠노라고.

절 문턱부터 낮춰야 했다. 당장 산골짜기 오르는 길목부터 닦았다. 진입로에 있던 장애물을 치우고 도로 포장을 했다. 표지판도 말끔히 세웠다. 올라오는 이 섭섭하지 않게 가람도 조금씩 규모를 키워나갔다. 사람을 쓸 시간도, 여유 돈도 없으니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 직접 나를 수 있는 건 맨 몸으로 옮기고 힘에 부치는 건 조금이나마 기계의 도움을 받았다. 경운기, 포크레인, 트랙터 등 닥치는 대로 기술을 배워 남의 손 빌리지 않고 하나하나 직접 땅을 고르고 다져나갔다. 절인지 공사 현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불사에만 매달렸다.

17년이 지났다. 오랜 의망(意望)은 현실로 나타났다. 대웅전과 만월루 외에도 관음전과 명부전, 삼성각과 설선당, 부도전 등을 갖추게 되면서 용연사는 사세부터 어엿이 달라졌다. 2015년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된 후부터는 지역 주민 외에도 용연사를 다녀가는 관광객도 해가 다르게 꾸준히 증가세다. 코로나 여파로 보시가 줄고 관람객이 급감하면서 대부분 사찰이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지만 용연사 만큼은 예외다. 지난 11월에만 60명 넘는 인원이 템플스테이 체험을 하기 위해 사찰을 찾았고 예산 또한 예년에 비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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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사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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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사 오르는 길. 산골짜기 절을 안내하는 듯한 '나무아미타불' 비석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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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탐방을 가기 전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스님과 마을 아이들.
①강릉 용연사는 ‘용연촌 사람들’이라는 이름 아래 스님과 신도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 매월 1회 스님과 산을 오르는 ‘용연계곡 생태탐방’은 정예 회원까지 생길 정도다. ②주지 설암스님과 마을 주민들이 겨울 계곡 탐방 후 김밥을 나눠 먹고 있다.
 ‘용연계곡 생태탐방’을 위해 계곡으로 향하는 설암스님과 마을 사람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던 용연사가 존재감을 갖게 된 데는 설암스님 공이 컸다. 용연사를 포함한 용연계곡 일원이 2012년 국가 명승지 106호로 지정되면서 산골짜기 용연사를 찾는 발걸음도 대폭 늘어난 것. <우리 명승 기행> 작가 김학범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명승 자원의 발굴은 본시 지방자치단체나 중앙정부가 앞장서서 진행해야 하는 사안이다. 명승으로서 가치가 충분한데도 공공단체 모두가 소홀히 한 일을 설암스님이 나서서 몇 곱절의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용연계곡은 명승의 지위를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든 절집 문턱을 낮추기 위한 노력은 스토리텔링 만들기로 이어졌다. 절 아래 용소가 있고 용이 승천했다 하여 이름 지어진 용연사’. 역사적 접근만으로는 사찰이 다소 딱딱하게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여러 번 고민하다 생각해 낸 것이 연화부인 설화를 활용한 사찰 문화 프로그램이다.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된 명주군왕 김주원의 부모인 무월랑연화부인의 사랑이야기를 엮어 사찰에서 체험할 수 있는 전통 문화 프로그램들과 접목시켰다.

전통 설화와 접목한 사찰 역사는 이제 해마다 지역민 발길을 끈다. 계절마다 펼쳐지는 용연사 산사 축제는 그야말로 다채로움 자체다. 용연계곡이 주는 절경 속 명승지 일원에서 펼쳐지는 산사음악회를 비롯해 국악제, 미술대회, 요리 경연, 명상 캠프, 인문학 특강 등은 남녀노소 세대 불문하고 지역주민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주민과 함께하는 프로그램들 덕분인지 용연사는 용연촌 사람들이라는 이름 아래 정기 모임을 갖는데 전에 없이 활발하다. 그 중에서도 매월 1회 스님과 직접 몸을 부딪히며 산을 오르는 용연계곡 생태탐방은 정예 회원까지 생길 정도. 주지 스님을 만나기 위해 용연사를 찾은 지난 12월에도 계곡 탐방을 가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경내는 왁자지껄했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부터 30~40대 주부, 60대 퇴직자까지 연령 불문 성별 불문 20여 명이 모였다.

스님을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들던 9살 예은이는 이날 어른도 오르기 힘든 골짜기 곳곳을 안방처럼 뛰어다녔다. “우리 스님이요? 별로에요라고 하면서도 계곡을 탐방하는 내내 스님 곁을 떠날 줄 몰랐다. 벌써 1년 째 엄마 손을 잡고 산을 오른다는 15살 영탁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반야심경>을 모두 욌다. “스님이 자꾸 잘한다고 하니 저도 모르게 외워졌다.

용연사 신도들이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자발성이다. 경전 읽기, 108, 명상 등 3가지 수행 중 하루 1가지는 반드시 실천하자는 스님 제안에 따라 네이버 밴드를 통해 매일 소통하는 시간을 갖는다. 법회 또한 초하루 외에도 주민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연다는 것이 용연사 방침이다. 최은숙 용연사 신도회장은 “365일 쉬지 않고 농사를 짓고 포크레인까지 직접 운전하며 오직 사찰만 생각하는 스님을 보다보면 꾀가 나다가도 반성하게 된다용연사를 다니며 인생관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뭐든지 직접, 자발적으로 하는 주지 스님 방침에 따라 용연사는 체계적 운영 시스템도 하나씩 갖춰나가는 중이다. 지역사회 지속가능한 발전과 주민들 행복을 위해 사찰이 중심이 돼 법인을 설립, ‘사천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장기적 목표. 사찰 경제의 자립화와 지역 발전을 위한 농업 법인, 산림 보존을 위한 임업 법인, 문화를 지키기 위한 용연계곡 보존회, 생산과 유통 등을 담당할 영리 법인 등을 설립, 주민들이 운영할 수 있도록 하나씩 시스템을 현실화 시켜나가고 있다.

마을 공동체 핵심인 설암스님은 주지로만 불리지 않는다. 특별한 수식어가 유독 많다. 최초의 스님 출신 사천면번영회장, 트랙터 모는 스님, 요리 잘하는 스님, ‘용연촌 사람들을 이끄는 회장 스님 등으로 통한다. 최근엔 사천면 하수관로 사업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위해 천막 단식을 시작하면서 단식하는 스님으로 불리기도. 목탁 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 속에 뛰어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스님 지론에 따른 결과물이다. 첩첩산중 척박한 땅, 거칠고 투박하지만 진심으로 마을을 품어 안는 스님의 노력에 지역민들도 허물없는 사이로 응답하고 있었다.
 

①강릉 용연사는 ‘용연촌 사람들’이라는 이름 아래 스님과 신도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 매월 1회 스님과 산을 오르는 ‘용연계곡 생태탐방’은 정예 회원까지 생길 정도다. ②주지 설암스님과 마을 주민들이 겨울 계곡 탐방 후 김밥을 나눠 먹고 있다.
용연사 주지 설암스님.

나눔도 일종의 오만, 더불어 사는 게 삶이다

스님 평판을 묻는 질문에 누구하나 먼저랄 것 없이 자나 깨나 365일 소처럼 일만 하는 스님 건강이 제일 걱정이라는 말이 돌아온다. 신도들 걱정에 건강엔 문제없으니 자주 자주 보자며 스님이 활짝 웃는다. ‘불교는 자력 신앙이라며 신도들에게 그렇게 자발성을 강조하더니 얼마 전 다친 발목도 알아서 낫겠지 하고 그냥 내버려두니 싹 나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몸이고 마음이고 일단 내버려 두면 자연 치유가 된다. 뭔가를 억지로 해서 잘 되는 일은 드물지 않나. 전법, 포교, 중생 교화도 그렇다. 진심으로 와 닿아야 뭔가 바뀌는 법이다. 처음 사천면에 들어올 때만해도 마을 주민들 거부감이 엄청났지만 스스로 낮추고 자꾸 다가가려 노력하니 조금씩 변화가 보였다.”

2003년 사천면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시골 텃세를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다는 스님은 잘하진 않아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부터 하자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주민들과 똑같이 농사를 짓고 번영회 회의에도 참여했다. 손이 필요한 일이라면 만사 제쳐 두고 달려갔다. 용연사에 들어와 갈아치운 포크레인만 3대 째다. 불사를 위해 땅 고르는 일 뿐 아니라 농민들 밭도 트랙터로 여러 번 갈아줬다. 주민들은 이제 마을에 문제만 생기면 스님부터 찾는다. 그런 설암스님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부처님 가르침이 결코 우리네 삶과 요원하지 않다는 믿음이다.

어떻게 하면 절에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한다. 자기 생각에 갇혀 있다가도 한순간 생각을 달리하면 다른 세상이 보이지 않나. 그걸 깨우치면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삶에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무언가를 나눈다는 생각도 오만이다. 수행자로서 승속을 떠나 권위를 내려놓고 그들 삶에 온전히 녹아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강릉=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불교신문3647호/2021년1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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