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묘비명에 뭐라고 쓸 것인지 생각해 봤나”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낯선 상황과의 만남이
한 인간을 붓다로 만들었다

잘 가신 분이란 뜻 ‘선서’도
붓다의 명호 가운데 하나

자신의 묘비명을 지어본다면
지금의 삶을 훨씬 의미 있고
풍요롭게 가꿀 수 있지 않을까?

낯선, 혹은 불편한 만남

몇 해 전 필자가 몸담고 있는 불교대학에서 <죽음 명상>이라는 과목을 개설한 적이 있다. 죽음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 성찰해보자는 의도에서 기획된 강좌였다. 당시 이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한 전문가를 모시고 진행했는데, 기대한 것처럼 처음에는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런데 수업이 진행되면서 뜻하지 않은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다. 수업에 참여한 일부 학인들이 죽음이라는 상황을 불편하고 힘들어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중간에 그만둔 학인도 생겼다. 그때 느꼈다. 우리는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죽음이 나의 현실로 다가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죽음은 낯선, 혹은 불편한 만남이었던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의하면 생각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과 만날 때 일어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익숙한 상황이 아니라 낯선 상황과의 만남에서 생각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평소 긴 머리만 고집하던 여성이 어느 날 짧게 자른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해보자. 늘 긴 생머리가 익숙했는데, 짧은 머리라는 낯선 상황과 만나서 우리는 ‘저 여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몇 년 만에 벗을 만났는데 승복 차림을 하고 나타났을 때도, 술이라고는 전혀 입에 대지 않던 사람이 매일같이 술을 마실 때도 우리는 저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하고 생각을 한다. 이처럼 낯선 상황은 우리를 생각의 세계로 이끄는 조건이 된다.

죽음이라는 현실과 만나는 것 또한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지만, 그런 생각이 오래 가지는 않는다. 여전히 죽음은 관념 속에만 머물고 있는 나와 상관없는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어떤 계기를 통해 죽음이 나의 문제로 다가오면, 너무 낯설고 불편하다. 때로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자꾸만 그 상황을 외면하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낯선 상황과 만났을 때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직시해서 우리들 삶(生)이 깨어나는(覺)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 <죽음 명상> 수업 과정에서 느낀 문제의식이었다.
 

청화스님 열반송. 이 세상 저 세상 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은혜를 갚은 것은 산골 물 같음을 아쉬워한다는 내용이다.
청화스님 열반송. 이 세상 저 세상 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은혜를 갚은 것은 산골 물 같음을 아쉬워한다는 내용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대한 종교가나 철학자들은 죽음이라는 상황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인물들이다. 예컨대 붓다가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왕궁이라는 익숙한 환경에서 늘 좋은 집과 좋은 음식을 즐기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문 밖으로 나간 그는 늙고 병들어 죽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흔히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알려진 이 충격적이고 낯선 상황과의 만남에서 젊은 싯다르타의 삶(生)은 깨어나기(覺) 시작한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삶에서 생각대로 살게 되는 일대 방향 전환을 한 것이다. 그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엄연한 실존 앞에 머뭇거리지 않고 이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였다. 그는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해답을 찾아 출가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낯선 상황과의 만남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 인간을 위대한 성자로 만든 것이다. 우리가 붓다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흔히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평소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들 일상이 익숙한 상황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업(業)의 관성에 따라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낯선 상황과의 만남은 우리를 사유(思惟)와 성찰의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죽음이라는 낯선, 혹은 불편한 만남을 통해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설계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들 삶을 일깨우는 비밀이 바로 생각(生覺)에 있었던 것이다. 

죽음 철학하기

철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철학은 박제된 채로 박물관에 진열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철학이 아니라 ‘철학하기’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좋다. 동사로서 철학은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낯설게 만들고 ‘왜’ 라는 질문을 던져 우리를 사유의 세계로 이끄는 힘이 있다. 예를 들어 ‘1+1=2’라는 명제는 누구나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아이가 귤 하나와 수박 하나의 크기가 다른 것을 보고서 ‘어떻게 1+1=2가 옳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다. 예전에 이런 질문을 하면 선생님이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고 혼이 났지만, 이는 매우 철학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앞의 ‘1’과 뒤의 ‘1’이 완벽하게 동일한 조건일 때만 ‘1+1=2’라는 명제가 참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앞과 뒤의 조건이 다르면 이 명제는 거짓이 되기 때문에 아이는 매우 훌륭하고 칭찬 받을만한 질문을 한 셈이다. 

이러한 철학적 질문이 일상에서 많이 작동하게 되면 삶의 질적 전환을 이끌 수 있다. 수안스님이 부른 <참 다행이다>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우리는 상대가 내 마음과 같지 않아서, 혹은 내 마음을 알지 못해서 속상해하는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참 다행이라고 노래한다. 상대가 내 마음과 같다면, 내가 어디를 가든 어떤 생각을 하든 혼자 있는 시간은 없을 것이고 그래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식들이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면 속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때 ‘내 마음과 같지 않다고 해서 왜 속상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한 상황이 낯설게 느껴지고 ‘맞아. 속상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다행이지’라는 사고의 전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자식들이 내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상처 받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오히려 잠자고 있던 삶(生)이 깨어나(覺) 새로운 삶, 자유로운 삶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을 철학하는 시간>은 죽음이라는 낯선 상황과 만나 우리의 사유를 일깨우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당장 내일의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만큼 삶은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처럼 자명한 사실 앞에 죽음을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가 죽음을 철학하는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를 통해 현재를 잘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50년을 살았다는 것은 자신의 전체 삶에서 50년이 죽었다는 의미가 된다. 삶은 곧 죽음과 같은 것이다.
 

미국 작가 찰스 부코스키의 묘비명. “애쓰지 마세요(Don’t try)”라고 쓰인 부분이 인상적이다.
미국 작가 찰스 부코스키의 묘비명. “애쓰지 마세요(Don’t try)”라고 쓰인 부분이 인상적이다.

죽음을 철학하기 위해 동ㆍ서양의 위대한 종교가나 철학자가 삶의 마지막 순간 남긴 말이나 묘비명, 혹은 선사들의 열반게(涅槃偈) 등을 살펴보고 인문학의 근본 물음인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오늘의 시선에서 성찰해보고자 한다. 한 인물의 마지막 모습에는 그의 삶 전체가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죽었다는 얘기는 잘 살았다는 의미가 된다. 불교에서 흔히 ‘갈 때 보자’고 하는데, 바로 이를 의미한다. ‘잘 가신 분’이란 뜻의 선서(善逝)가 붓다의 명호 가운데 하나인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우리는 잘 가기 위해 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붓다와 공자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 칸트, 니체 등의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이 남긴 묘비명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담겨있다. 진지한 내용들도 있지만, 위트 넘치는 글들도 많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애쓰지 마세요(Don’t try)”라고 쓰인 미국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Henry Charles Bukowski, 1920~1994)의 묘비명이다. 짧은 이 한 마디는 뭔가를 꼭 이루어야 된다는 강박증에 빠져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사는 현대인들에게 작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선사들이 이승과 작별하면서 남긴 열반송에는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다. 그것들을 음미하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묘비명과 관련된 글을 쓴다고 하니까 어느 분이 나의 묘비명에 뭐라고 쓸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의미 있는 숙제가 될 것 같다. 독자들 역시 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묘비명을 지어본다면, 지금의 삶을 훨씬 의미 있고 풍요롭게 가꿀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 필자 이일야 전북불교대학장은…

전북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보조사상연구원 연구위원 등을 지냈다. 지난 2014년 본지에 ‘에세이 구산선문’을 연재했으며, 이 글을 엮은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 단행본은 2016년 ‘올해의 불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불교란 무엇인가>, <동화가 있는 철학 서재-동화에 빠져든 철학자가 전하는 30가지 인생 성찰> 저서가 있다. 

[불교신문3644호/2021년1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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