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23> 고려불상② 고려 초기 철불 조성과 지방 호족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23> 고려불상② 고려 초기 철불 조성과 지방 호족
  • 배재호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 승인 2021.01.13 14:30
  • 호수 36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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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사원들 호족 후원 받아 철불 조성해 봉안

하남 하사창동 출토 철불좌상
압도적인 크기 수준높은 조형
태조 장인 왕규와 연관성 추정

서산 보원사지 출토 철불좌상
법인국사 탄문스님이 조성해
친근한 세속적 이미지 보여줘

원주 고려 초기 철불조성 중심
경기 여주 양평 충주까지 영향
남한강 수로 통해 교류 이뤄져

통일신라시대 9세기 중엽부터 출현한 철불은 고려 초에도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지방 사원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황해도 개경(開京, 송악, 개성)의 왕륜사(王輪寺) 비로자나장육금상(毘盧遮那丈六金像, 988~997년)과 같이 왕실 발원 철불이 고려 왕경(王京, 개경)에서도 조성되었지만, 대다수의 철불은 지방 사원에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고려시대 철불은 통일신라시대 철불의 전통을 계승하였지만, 불신(佛身, 몸)에 직접 주조되던 명문이 없어지고 선호하는 수인도 지권인과 설법인이 아니라 항마촉지인으로 바뀌었으며, 황해도 황주의 정방산(正方山) 성불사(成佛寺) 철조보살좌상과 같은 보살상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즉 통일신라시대 도피안사 철불(865년)과 삼화사(9세기 중엽) 철불의 불신 뒷면과 보림사 철불(857-858년)의 팔뚝에 주조된 명문은 이제 몸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불상의 수인도 지권인(보림사와 도피안사 철불)과 설법인(실상사와 삼화사 철불)보다 촉지인이 많아진 것을 볼 수 있다. 
 

경기도 광주 하사창동 철조불좌상, 고려시대 10세기 중엽, 높이 2.28m,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광주 하사창동 철조불좌상, 고려시대 10세기 중엽, 높이 2.28m,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초기인 11세기 전반까지 조성된 대부분의 불상은 왕실 발원 불상이 집중되었던 개경과 충청남도 논산(論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방에서 석불사(석굴암) 석조불좌상 등 통일신라시대 경주 불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경향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지방의 호족들과 관련될 것으로 추정되는 철불에서도 나타난다. 

고려시대 10세기 중엽에 조성된 경기도 광주(廣州, 현 하남 지역) 하사창동(下司倉洞) 출토의 철조불좌상과 충청남도 서산(瑞山)의 보원사지(普願寺址) 출토 철조불좌상이 대표적인 예로, 불상들은 석불사 석조불좌상과 같이 편단우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촉지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다. 이들 철불이 석불사 불상을 답습한 것은 불상 조성 당시에 모델로 삼을 만한 고려 왕실 발원의 불상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거나 통일신라가 망했지만 경주 불상의 영향이 고려 초기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충청남도 논산의 개태사(開泰寺) 석조불삼존입상(936~940년)은 고려 초기 왕실 발원 불상의 조형적인 수준이 아직 높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한편 하사창동과 보원사지 철불의 착의법과 수인은 석불사 불상과 같지만, 긴 눈꼬리, 좁은 콧날, 작은 입을 가진 얼굴 등 세부적인 표현에서는 고려 초기 불상의 조형적인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원래 석조팔각연화대좌(石造八角蓮華臺座)를 갖추고 있었던 하사창동 철불은 신체 비례가 적절하고 안정된 자세를 하고 있다. 불상은 크고 둥근 육계(肉髻)와 중앙 계주(髻珠)를 가지고 있으며, 살짝 올라간 눈썹과 눈꼬리, 콧방울에 비해 작은 입, 짧은 인중을 갖춘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다. 상체의 법의는 몸의 굴곡을 따라 입체적으로, 하체의 법의는 평면적으로, 양다리 사이의 부채꼴 주름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었다. 

하사창동 철불은 조성 배경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불상이 지닌 압도적인 크기와 수준 높은 조형은 당시 경기도 광주의 유력한 호족이자 고려 태조(太祖, 왕건, 918~943년 재위)의 장인이던 왕규(王規, ?~945)와의 관련 가능성을 추측하게 한다. 왕규는 원래 함규(咸規)였는데,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왕씨성(王氏姓)을 받아 왕규가 되었다.

그는 두 명의 딸을 태조에게, 한 명의 딸을 혜종(惠宗, 943~945년 재위)에게 출가시킨 태조와 혜종의 장인으로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지방 호족이었으나 역모 사건으로 인하여 945년에 죽임을 당한다. 철불 조성의 후원자가 왕규였다면, 조성 시기는 그가 죽은 945년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충청남도 서산 보원사지 철조불좌상, 고려시대 10세기 중엽, 높이 2.57m, 국립중앙박물관.
충청남도 서산 보원사지 철조불좌상, 고려시대 10세기 중엽, 높이 2.57m, 국립중앙박물관.

서산 보원사지 철조불좌상은 광종(光宗, 949~975년 재위)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하여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 900~975)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불상은 949년에 광종의 즉위에 맞춰 국왕의 장수(長壽)와 함께 선정(善政)과 덕화(德化)를 펼치길 기원하면서 탄문이 조성했던 장육석가삼존상(丈六釋迦三尊像)의 주존 불상으로 비정된다.

불상의 압도적인 크기는 968년에 교종(화엄종)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고려 국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광종의 불교 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탄문스님과 연관될 가능성을 높여 준다. 한편 철불의 얼굴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충청남도 논산 개태사 석조불삼존입상과 닮아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의 장육석가삼존상의 주존 불상(949년)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 준다.

비록 탄문스님의 행장(行狀, 일대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탑비의 기록에서는 불상의 후원자에 대한 내용이 없으나, 불상의 크기와 불상재(佛像材)가 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철광산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충청도 지방의 호족이 탄문의 불상 조성에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철불은 편단우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가부좌하고 있다. 양손은 결실되었으나 그 위치로 보아 촉지인(觸地印, 혹은 항마촉지인)을 결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몸에 비해 큰 머리, 이마 쪽이 약간 넓은 장방형의 납작한 얼굴, 굵은 목, 적당한 높이의 넓은 무릎을 가지고 있다. 또한 마치 가발을 쓴 듯한 머리카락, 눈동자가 없는 가늘고 긴 눈, 짧은 코와 좁은 콧날, 가늘고 긴 입과 잔뜩 힘이 들어간 아랫입술을 가지고 있다.

층단을 이루고 있는 법의 주름은 몸의 굴곡과 상관없이 그 크기가 균일하며, 칼로 깎아낸 듯 얇고 매끈하게 처리되었다. 왼팔 팔꿈치 앞에는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경주 불상에 보이는 올가미 모양의 법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철불의 착의법과 수인은 석불사 석조불좌상을 답습하였지만, 얼굴 표정, 신체 비례, 다리 중앙의 부채꼴 법의 주름 등에서는 조형적인 차이를 보인다.

경기도 광주 하사창동 철불과 서산 보원사지 철불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지만, 두 불상 사이에도 분명한 조형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하사창동 철불이 통일신라불상의 이상적인 사실성을 계승하였다면, 보원사지 철불은 이전의 불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속적인 사실성을 추구하고 있다.

즉 두 불상 모두 사실성을 갖추고 있지만, 하사창동 철불은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원사지 철불은 현실 속에서도 만날 수 있는 친근한 세속적인 이미지를 보여 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원사지 철불이 하사창동 철불보다 고려 초기의 미의식을 훨씬 많이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주 학성동 철조불좌상, 고려시대 10세기 중엽, 높이 94cm, 국립춘천박물관.
원주 학성동 철조불좌상, 고려시대 10세기 중엽, 높이 94cm, 국립춘천박물관.

한편 보원사지 철불 조성에 관여한 장인(匠人)이나 공방(工房)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철불들이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발견되었다. 원주시 학성동(鶴城洞)에서 수습된 3존의 철불은 훨씬 작지만, 보원사지 철불과 같이 편단우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촉지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으며, 얼굴 모습과 신체 비례 등 조형적으로도 많이 닮았다. 철불들은 크기가 1미터도 되지 않지만, 당당하고 숙연한 모습에서는 종교적인 엄숙한 분위기를, 당시의 원주 사람을 모델로 한 듯한 얼굴에서는 세속적인 사실성을 느낄 수 있다.

불상들은 광대뼈, 넓은 하악골(下顎骨), 짧은 턱을 갖춘 납작한 얼굴과 옆으로 뻗은 가늘고 긴 눈과 눈썹, 좁은 콧날, 살짝 힘이 들어간 얇고 작은 입을 가지고 있다. 얇고 평면적인 법의 주름은 도식적으로 처리되었으며, 왼팔 팔꿈치 앞에는 9세기 경주 불상과 보원사지 철불에서도 확인되는 올가미 모양의 법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경주 불상에 보이는 조형적인 특징이 이들 철불에 나타난 배경에는 원주가 통일신라의 북원소경(北原小京)으로서 왕경 경주의 문화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철불들은 분할 주조되었으나 분할선(分割線)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매끈하게 표면이 처리되었다. 비록 원주 학성동 철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불상들은 고려 건국에 도움을 준 공로로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된 원주 호족 원극유(元克猷)와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 

원주 학성동 철불들과 보원사지 철불의 선후 관계에 대해서는 크기만 다를 뿐 조형적으로 매우 닮아서 특정하기가 어렵다. 큰 불상이 작은 불상의 모델이 되는 일반적인 현상을 기준으로 보면, 보원사지 철불이 원주 철불보다 먼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보원사지가 있는 충청남도 서산과 달리 원주는 고려 초기 철불 조성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오히려 원주 철불이 보원사지 철불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두 지역 간의 문화 교류는 남한강의 수로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고려 초기에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강원도 원주, 경기도 여주‧양평‧광주, 충청북도 충주에서 철불이 조성되는 것도 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원주 학성동 철조불좌상, 고려시대 10세기 중엽, 높이 92cm, 국립춘천박물관.
원주 학성동 철조불좌상, 고려시대 10세기 중엽, 높이 92cm, 국립춘천박물관.

[불교신문3644호/2021년1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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