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그대 자신을 그대가 얼마나 격하게 사랑하는지…

불교상담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이야기다. 임인구의 ‘어엿한 그대’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마음이, 또 그 마음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온전한지를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어엿하게 서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연기법에 근간하여 역설과 상호관계성의 원리로 안내한다.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그리고 마음 자체를 친구처럼 또는 연인처럼 대하는 직접화법으로 구성된다.

임인구
임인구

그대는 미디어를 통해 누군가가 무시받고, 홀대되고, 업신여겨진 소식을 접하며 분노한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분노한다. 그대 자신이 무시받고, 홀대되고, 업신여겨진 것만 같다. 나아가 그대에게는 모든 곳에서 유독 그러한 모습만 자주 눈에 띈다. 비단 미디어의 뉴스만이 아니다. 그대 주변에서는 특히나 그러한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다.

그대의 옆으로 자전거를 타고 웃으며 지나간 고등학생들도 마치 그대를 무시하고, 홀대하고, 업신여기는 것만 같다. 그대에게 길을 좀 비켜달라며 경적을 울리는 세단의 운전자도 그대를 무시하고, 홀대하고, 업신여기는 것만 같고, 그대에게 실수로 500원을 100원으로 잘못 거슬러준 분식집의 사장님도 그대를 무시하고, 홀대하고, 업신여기는 것만 같다.

더러운 세상이다. 사람을 이렇게 우습게 보는 사악한 세상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언제라도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두려운 세상이다. 그래서 그대는 강해져야 한다. 홀로 모든 것을 제패할 수 있는 힘을 갖추어야 한다. 힘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라면 무엇이든지 동원해야 한다.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누구도 그대를 무시하고, 홀대하고, 업신여길 수 없도록, 강한 그대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대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실천한다. 피해의식은 그렇게 세습되고, 그렇게 재생산된다. 그대여, 이것은 피해의식이다. 그리고 피해의식은 피해를 끌어들인다. 자기충족적인 예언과 같다. 그래서 결국 그대는 스스로 피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그대가 결코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게 또한 피해를 입히게 된다. 피해의식은 자타구분 없이 오직 피해만을 계속 전염시키는 까닭이다.

이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이다. 피해의식이 피해를 낳고, 그렇게 피해를 입은 그대의 피해의식은 더 강화된다. 그리하여 더 큰 피해를 고통의 결과로 확정짓는다. 그대여, 그대가 이 피해의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피해의식이 어디에서부터 세습되어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역사는 대단히 길다. 그대는 다만, 지금 그대의 순번에서 그 피해의식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대여, 놀라운 사실 하나를 전할 수 있다. 그대가 미디어를 통해 누군가가 무시받고, 홀대되고, 업신여겨진 소식을 접하며 분노할 때, 그대는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가해자가 아니다. 그대는 실제로는 피해자에게 분노하고 있다. 물론 가해자에 대해서도 분노한다고 해도, 피해자에 대한 분노는 더욱 압도적이다. 왜냐하면, 그 피해자가 바로 그대 자신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무시받고, 홀대되고, 업신여겨진 것 같은 현실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무력하게 당하기만 한 것 같은 그 피해자의 모습이, 그대가 가장 거부하고 싶은 그대 자신의 모습으로 보여 너무나 꼴보기 싫은 까닭이다. 바로 그처럼 바보같고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형편없는 그대 자신의 모습에, 그대는 그토록 격하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삽화=손정은
삽화=손정은

그대는 밉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너무나 밉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자유가 없다. 그대 자신을 미워할 자유가 없다. 그 자유를 행사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대가 그대 자신을 미워할 자유를 행사하지 못할 때, 다른 이들이 그대를 무시하고, 홀대하고, 업신여긴다는, 즉 다른 이들이 그대를 미워한다는 피해의식이 생겨난다. 피해의식은 당위적인 것이다. 이쪽에서의 자유가 상실되었으니 그 대신에 저쪽에서의 당위가 생겨난 것이다.

때문에 그대가 피해의식을 끊기 위해서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대 자신을 미워할 자유다. 피해의식 속에서 다른 이를 미워하기보다, 정확한 형태 그대로 그대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 그 자유를 행사해야 한다.

그대 혼자 있는 방에서 차라리 베개 하나를 그대 앞에 두어보라. 그것이 그대가 너무나도 미워하는 그대 자신이다. 죽이고 싶을만큼 미운 그대 자신이다. 그대여, 망설일 필요가 없다. 그대 자신을 죽여라. 목을 조르고, 숨통을 조이고, 척추를 비틀고, 발길질을 하고, 몸통을 꺾으며, 그대의 모든 힘을 다해 그렇게 미운 그대 자신을 우주의 먼지처럼 만들어라. 꼴도 보기 싫은 것을, 꼴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압축하고 압축해서 사라지게 만들어라.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대가 지금껏 축적해온 그 강한 힘을 전부 발휘해서 그대 자신을 없어지게 만들어라.

그러면 그대는 발견하게 된다. 베개를 가득 끌어안고 있는 그대의 모습을. 그렇게 그대 자신을 가득 끌어안고 있는 그대의 모습을. 그리고 그대는 정말로 이해하게 된다. 가장 미운 그대 자신을 그대가 얼마나 격하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그대여, 그대가 지금껏 왜 그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는지를 아는가? 그대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있어야 자기를 사랑할텐데, 그 자기가 없으니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 자신을 미워할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비로소 그대 자신은 발견되었다. 그래서 미워할 수 있는 자기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할 수 있는 자기였던 셈이다.

그대여, 그대는 이처럼 미움으로도 사랑할 수 있다. 그대 자신을 향해 자유롭게 행사되는 모든 마음은 사랑으로 가는 통로다. 때문에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작은 용기다. 그것은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미워할 용기다. 그러나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오직 그대 자신을 미워할 용기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미워할 자유를 행사할 때, 누구도 그대를 무시하고, 홀대하고, 업신여길 수 없다. 즉, 그대를 미워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거름통의 논리다. 그대가 미움이라고 하는 거름을 다 그대의 밭에 대고 있다면, 누구도 그 거름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게 그대는 미움이라고 하는 그 거름을 통해 그대의 밭에 싹을 틔운다. 꽃을 피운다. 열매를 맺는다. 사랑이 가득 키워낸, 사랑스러운 그대 자신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피해의식이 피해를 끌어들이듯, 사랑스러운 그대 자신은 이제 그대가 사랑하는 것들을 끌어들인다. 그로 인해, 그대 자신은 더욱 사랑스러워진다. 사랑의 선순환은 세습되며, 또 재생산된다.

그때 그대는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필요했던 것은 정말로 단 하나의 작은 용기였다는 것을.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그대 자신을 사랑할, 곧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그대 자신을 미워할 용기였다는 것을. 모든 곳에서,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그대만이 눈에 선하다.

[불교신문3644호/2021년1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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