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 표창 수상자 이문희 사회복지재단 자원봉사자

평범한 40대 주부였던 시절
작은 인연으로 시작된 봉사

반찬 조리, 독거 노인 돕기 등
서울 강북구 지역 복지관부터
전국 재해 현장 '전천후' 활동

처음 본 사람도 어제 만난 친구처럼 격의 없이 두 손을 꼭 붙드는 손길이 정답다. 겉치레 없이 자기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는 모습으로 잔뜩 굳어 있던 사람들 마음도 단숨에 무장해제시키는 이 사람. 따뜻한 어머니 모습으로 때로는 여장부처럼 불교계 복지 현장 곳곳에서 전천후활약을 펼치고 있는 이문희(70) 씨다1993년 시작한 자원봉사가 벌써 28년째, 2001년부터 VMS사회복지자원봉사인증관리 시스템에 기록된 봉사시간만 19444시간이다.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소속 자원봉사단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활동해 지금은 봉사단 화목회 팀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그가 지난해 또 한 번 의미있는 결과를 냈다. 대한민국 자원봉사대상 국무총리 표창수상자로 선정된 것.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손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간다는 이문희 씨를 18일 그의 자택 인근에서 만났다.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소속 자원봉사단 화목회 팀장 이문희 씨가 2020년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이문희 팀장이 행정안전부로부터 받은 표창장과 기념 시계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소속 자원봉사단 화목회 팀장 이문희 씨가 2020년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이문희 팀장이 행정안전부로부터 받은 표창장과 기념 시계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30여 년 전만해도 중학생과 고등학생 아이들을 둔 평범한 40대 주부였다. 여느 때처럼 등산을 하기 위해 도봉산에 오르다 그날따라 등산로를 찾지 못해 산을 헤매던 길,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이 내린 산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를 구한 건, 만월암 스님과 신도들이었다. “하룻밤만 재워주실 수 있나요?” 덜덜 떠는 목소리의 낯선 이문희 씨를 선오스님과 신도들은 흔쾌히 맞았다. 긴 밤 오랜 이야기 끝에 스님이 서울 미아리 포교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고마움으로, 그 다음엔 왠지 마음이 자꾸 갔다. 그 후로 여러 번 포교원을 찾았다. 주부들도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있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어느 날 성지순례를 갔다 오는 데 스님이 혹시 재보시 하실 분 있습니까?’하고 묻더라구요. 재보시가 뭐냐고 하니까 보시금 내는 거라고 하대요. 그래서 다른 사람 다 손 드는데 저는 고개만 푹 숙이고 있어요. 그 땐 정말 먹고 살기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스님이 또 그러더라구요. ‘혹시 노력봉사하실 분 있습니까? 장기적으로 도움을 주실 분이 필요합니다라고. 그래서 번쩍 손을 들었죠. 돈은 없어도 손은 있었으니까. 그게 지금까지 온 거에요.”

길음종합사회복지관에서 어르신들 식사 준비를 돕는 것부터 시작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복지관을 찾아 반찬을 만들어 나르고 설거지를 했다. 그때만 해도 사찰까지 길이 거의 닦이지 않았던 시절, 산꼭대기 원통사며 도선사며 자비나눔 물품을 준다고 할 때마다 이고 지고 나르기 바빴다. 산 높은 줄도 모르고 혼자 힘으로 40kg 짜리 쌀 한 포대를 가지고 내려오다 힘에 부쳐 우이동 파출소에 내려놨을 때는 고생한 것에 비해 어르신들에게 나눠줄 물품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어 설움이 밀려올 때도 있었다.

생전 처음 남에게 낯부끄러운 부탁도 해봤다. 원통사를 다닐 적, 주지 황산스님에게 냉장고 하나만 사달라손을 내민 것. 봉사활동을 하며 결연을 맺은 할머니를 위해서였다. “할머니가 2평도 채 안 되는 단칸방에 혼자 살았거든요. 3년이 지나도록 부탁 하나 안하던 분이 어느 날 처음으로 고추장 하나만 더 갖다 달라하더라구요. 자존심 때문에 아쉬운 소리 일절 하지 않던 분이었는데 마음의 문을 연 거라 생각해요. ‘이 기회에 냉장고 하나 마련해드리자싶었죠. 냉장고가 없어 매번 반찬을 가져다 드릴 때마다 빨리 쉬고 상했으니까. 저도 자존심이 강해 남한테 아쉬운 소리 잘 못하거든요. 그래도 그 때는 말할 용기가 났던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은 스님이 돈을 모아줬다. 165000. 신도들과 며칠 동안 마련한 돈이었다. 소중한 돈이었지만 이 씨는 고스란히 그 돈을 돌려줬다. 후에 모금 이야기를 전해들은 보문동 한 이름 모를 보살이 그 냉장고 내가 사주고 싶다며 나선 덕이다. 그러나 스님과 신도들은 돈을 받지 않았다. “이 돈은 어차피 이문희 보살 돈이다라며 봉사 활동에 쓰라 다시 돌려줬다. 봉사에 쏟아 부은 노력들이 때로는 힘에 부치는 서러움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더 큰 보람으로 다가왔던 순간들이었다.

부처님께 매일 700원만 생기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그 때 당시 버스 토큰이 그 값이었거든요. 그냥 뭐가 뭔지도 모르고 봉사활동을 하는 그 순간들이 마냥 좋았던 것 같아요. 버스비만 있으면 불러주는 곳 어디든 가니까 나중에 몇몇 사람들은 미쳤냐고고 하더라구요. 그럴 정도로 봉사에 반쯤 미쳐 살았어요.”

부처님을 원망하던 순간도 있었다. 1997523, 죽음의 기로에 섰던 순간을 이 씨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시장에서 꽃을 사고 다시 절로 들어가던 길이었거든요. 봉국사 앞에서 버스를 탔는데 토큰을 넣는 순간 정신을 잃었어요. 졸음 운전을 하던 유조차가 버스를 덮친 거죠. 버스 뒷바퀴에 몸이 끌려들어갔는데 다행이 배낭 덕에 하반신만 바퀴에 깔렸더라구요. 그래도 그 때 부처님 원망 많이 했어요.”

18개월을 입원했지만 제대로 걷지 못했다. “이렇게 일을 시켜놓고 시련을 주나” “몸을 쓰지 못하게 할거면 정신도 멀쩡하지 못하게 해달라” “다시 살려내라병실에 있는 내내 부처님께 원망 섞인 말들을 쏟아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 발로 걸어 만월암을 가는 게 소원이 됐다. 어렵게 병원으로부터 외출 허락을 받고 나선 길, 40분이면 두 다리로 멀쩡히 걸어가던 거리를 5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갔다. 그 다음엔 2시간50분이 걸렸다. 차츰 차도가 보이면서 제 발로 걸을 수 있었고 그 날로 다시 봉사도 시작했다.

이제 막 요리한 장조림이 얼마나 뜨거운 줄 알아요? 한여름에 그걸 몇 통씩 옮긴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뜨거워 죽는다니까. 그래도 그 뜨거운 찬들을 나르며 물리치료다생각했어요. 병원에 너무 가기 싫어하니까 우리 부처님께서 이렇게 물리치료를 시키시는구나 하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건 나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다녔죠. 어찌됐든 죽기 직전까지 갔다 덤으로 얻은 삶 아닙니까. 죽을 때까지 좋은 일에 써야죠.”

이문희 씨가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지속하고 있는 봉사활동만 6곳이 넘는다. 길음종합사회복지관, 경희의료원, 백련장학회,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웃을돕는사람들, 자비의집 등이다. 무료 급식 및 김장 나눔, 무연고자를 위한 염불자원봉사, 수지침을 비롯해 난치병어린이지원모금행사 등 그야말로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수십년 쉬지 않고 지속된 봉사활동으로 서울 성북구 지역 복지관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각 복지관에서 받은 공로상부터 서울시장상 등 수상 이력도 셀 수 없다.

뜨거운 여름이나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이면 집 밖에 나가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문희 씨가 지치지 않고 봉사를 이어갈 수 있는 건 여전히 봉사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의 초심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멋모르고 봉사활동을 시작할 때 누가 그러더군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개의 손만 가지고 있지만 1000명이 모이면 1000개의 손이 된다고. 어르신들이 반찬 1개로 식사하실 수 있지만 봉사자들 노력 덕에 여러 가지를 드실 수 있잖아요. 제 손 하나 더 보태서 누군가 조금이나마 기쁘면 그걸로 됐어요. 튼튼한 두 다리가 있고 어디 다닐 차비만 있으면 됩니다. 죽는 날까지 봉사하며 살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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