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 후원에서 피어나는 가장 아름다운 ‘하얀 꽃’

송광사 대웅전 마지를 퇴공하는 스님과 공양종을 치는 스님. ⓒ송광사
송광사 대웅전 마지를 퇴공하는 스님과 공양종을 치는 스님. ⓒ송광사

하얀 고봉의 마지

사찰 후원(後院)에서 피어나는 가장 아름다운 꽃은 하얀 고봉의 마지(摩旨)이다. 흰색의 성스러움과 봉긋하게 풍요로운 모습은, ‘밥’이 지닌 보편의 가치와 함께 부처님께 올리는 최상의 공양물로 부족함이 없다. 초기불교 당시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리던 재가자들의 지극한 마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아무리 작은 암자에서도 출가ㆍ재가의 제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본사(本師)인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오늘날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올리는 불공은 부처님 재세 시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한 승단(僧團)의 공양법식에서 유래하였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정오가 되기 전 하루 한 끼 공양을 하던 시간에 맞추어 정성껏 지은 밥을 올리며 행하는 예경의식이기에 사시불공ㆍ사시예불이라 하고, 이때 올리는 공양을 사시마지라 부른다. 따라서 사시불공은 조석으로 올리는 아침ㆍ저녁 예불과 함께 삼시예불(三時禮佛)로 자리하고 있다. 

윤창화 선생(민족사 대표)은 남송시대에 편찬된 여러 청규를 참조할 때, 당시 중국 선종사원에서는 대웅전 소임을 맡아보는 지전(知殿)이 사시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에는 사시마지를 행했으리라 짐작된다. 마지관련 기록이 드문 가운데 조선후기인 17ㆍ18세기 의식집들을 보면, 수륙재 당일 사시마지뿐만 아니라 이른 아침에도 마지를 올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계호스님(진관사 주지)은, <선원청규> ‘이시죽반(二時粥飯)’의 영향을 받아 예전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 또한 두 번이었을 것이라 보았다. 아침과 점심의 두 때에 각각 죽과 밥을 먹도록 한 옛 선종사찰 승가공양의 법식을 따라, 공양을 하기 전에 본사 부처님께도 똑같이 마지를 올리는 규범이 통용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에서도 어느 시기까지는 하루 두 번의 마지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아침마지가 일본불교에서 살필 수 있어 주목된다. 일본의 일련종 사찰에서는 아침과 사시 무렵에 하루 두 차례씩, 밥과 함께 그날 만든 음식을 조금씩 담아 작은 상에 차려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예전에는 우리도 발우에 반찬까지 담아 올렸으나 조선후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모습이 사라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가하면 오늘날 중국 선종사원에서는 간장종지만한 그릇에 밥이나 쌀을 담아 올린다고 하니, 동북아 삼국의 마지는 참으로 흥미로운 연구주제이다. 
 

송광사 대웅전에 마지를 올리러 가는 행자.
송광사 대웅전에 마지를 올리러 가는 행자.

택미와 마지솥 

공양미(供養米)는 불공의 상징이었다. 화폐개념으로서 쌀의 의미뿐만 아니라, 공양미가 곧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를 뜻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심사찰의 신도들도 직접 쌀을 이고 불공을 드리러 왔는데, 그 쌀은 실제 불전에 마지로 올려졌다. 합동불공의 개념이 없었던 당시에는 집집마다 가지고 온 쌀로 밥을 지어 부처님께 마지를 올리며 스님과 함께 독불공(獨佛供)을 드렸던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 오롯이 마지로 지어 올릴 쌀이기에, 가장 좋은 상품(上品)의 쌀을 깨끗한 자루에 담아 조심스레 사찰을 찾는 불자들의 정성이 한량없었다. 일타스님의 부친이 공양미를 두 번 이고 간 이야기는 유명하다. 일타스님이 태어나기 전, 공양미로 쓸 논을 따로 두고 정성껏 농사지은 쌀을 짊어진 채 마곡사 대원암까지 80리길을 가던 부친이, 그만 방귀를 뀌고 말아 집으로 돌아와서 새 쌀로 바꾸어 불공을 드리러 갔다는 실화이다. 

사찰에서도 마지 짓는 쌀을 따로 보관하는 것은 물론, 쌀에 섞인 이물질과 깨지거나 금이 간 쌀을 일일이 골라내고 체를 쳐서 작은 티까지 모두 없애는 택미(擇米)가 필수적이었다. 택미는 스님들이 정성을 들이는 것이라 하여 재가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행하는가 하면, 마지를 지을 때 쓰는 조리나 바가지를 따로 구분하기도 했다. 

또한 밥을 짓는 공양간과 반찬을 만드는 채공간을 따로 둔 사찰이 많았는데, 이에 대해 스님들은 마지에 반찬냄새가 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살림살이가 크니 두 공간을 구분한 점도 있었겠지만 그만큼 마지에 온 정성을 기울였음을 말해준다. 사찰의 부엌이 현대식으로 바뀌고 효율성을 우선하면서 이러한 풍습도 대부분 사라졌지만, 지금도 어디에선가 정성스런 예법을 이어가는 사찰이 있을 것이다. 

마지 올릴 전각이 많은 큰절에서는 마지솥을 따로 두고, 밥 짓는 시간도 달리하게 마련이다. 지금도 장작불을 때어 밥을 하는 통도사에는 전통 공양간에 4개의 커다란 가마솥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맨 왼쪽의 것이 마지솥이다. 학인 스님들은 마지솥에 밥을 해서 전각마다 올리는 노공(爐供) 소임을 맡는다. 공양간 외벽에는 17개의 전각명칭을 써놓고 불기(佛器)를 진열한 탁자를 두어 마지를 뜨게 되는데, 빈틈없이 계량해서 짓고 뜨니 마지솥의 밥은 한 톨도 남지 않는다. 

10시가 지나면서부터 학인 스님들이 각 전각에 마지를 나르기 시작하고, 공양간 가마솥에는 대중 스님들의 오공(午供)을 위한 밥을 안친다. 부처님의 사시공양이 끝난 뒤 그 제자들이 오시공양을 하는 의미가 공양을 준비할 때부터 시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는 셈이다. 

부처님의 공양

불기에 마지를 담을 때는 주걱으로 밥을 섞거나 휘젓지 않고 그대로 떠야 한다. 운문사 스님들은 이에 대해 “마지는 뒤집어 뜨지 않고 잘라 세워서 담는다”고 표현하였다. 밥솥의 밥을 케이크 자르듯이 수직의 방사형으로 잘라 불기에 담은 뒤 모양을 다듬는 것이다. 이러한 ‘잘라 담기’는 대부분의 사찰에서 쓰는 방식으로, 마지를 담을 때는 잘라서 뜨는 큰 주걱과 물을 묻혀 봉긋하게 괴는 작은 주걱이 필요하다. 

진관사 공양간에서는 마지를 괼 때 밥주걱을 길게 반으로 잘라 만든 ‘마지칼’을 사용하고 있다. “마지는 주걱으로 봉긋하게, 빈틈없이 매끈하고 수북하게 잘 괴어야 복이 많고 중노릇 잘한다.” 진관사의 공양간 스님들은 복스럽고 매끈하게 마지를 괴기 위해 승가에서 내려오는 전통방식을 되뇌곤 한다. 

10시가 지나면 사찰마다 대웅전을 시작으로 각 전각에 마지를 나르는 발길이 이어진다. 마지를 나를 때는 불기의 밑 부분을 오른손으로 받쳐 어깨 위로 올리고, 왼손은 오른쪽 팔꿈치를 받친 후 조심스레 걷는다. 큰스님을 만나더라도 절을 올리지 않는데, 이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지녔기 때문이다. 각 단에 마지를 올리고나면 뚜껑을 열고 삼배를 한 다음 물러난다. 

이 무렵은 사시불공에 동참하려는 신도들이 절을 찾으면서 활기찬 움직임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사시불공은 대개 10시에 시작되니, 대웅전에서는 큰 법당의 소임을 맡아보는 노전(爐殿) 스님이 법주가 되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동참신도들을 위한 발원과 축원이 이어진다. 이처럼 예불이 진행되는 대웅전에서는 헌좌진언을 올릴 무렵, 법당의 소종을 다섯 망치 울리고나서 마지뚜껑을 열게 된다. 이를 ‘마지쇠ㆍ마지종’이라 하는데, 부처님께 마지를 올린다는 신호이다. 

통도사에서는 소임자가 대웅전 마지를 올리고 나오면서 법당 바깥에 있는 소종으로 다시 마지쇠를 울린다. 법당 안의 마지쇠가 부처님과 동참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라면, 법당 밖의 마지쇠는 각 전각에 알리는 신호이다. 이렇게 바깥종성으로 대웅전 마지를 올렸다는 신호를 보내면, 각 전각에서 마지를 올리는 목탁소리가 울려 퍼지게 된다. 
 

통도사 대웅전(금강계단)에 마지를 올리는 스님.
통도사 대웅전(금강계단)에 마지를 올리는 스님.

마지퇴공과 오시공양 

예불을 마치면 마지퇴공이 이어진다. 대웅전은 물론 삼단(三壇)을 갖춘 법당에서는 상단의 마지를 신중단으로 물려 신중퇴공(神衆退供)을 한 다음, 모든 마지는 공양간의 퇴공 솥에 모아 다음 끼니의 대중공양으로 삼게 된다. 

부처님의 공양이 끝나면 스님들의 공양이 따른다. 부처님의 마지는 사시에 올리고 스님들의 점심은 오시(午時: 11시~오후1시)에 이루어지니, 오시공양을 줄여 ‘오공(午供)’이라 부른다. 그런데 스님들은 이를 ‘사시공양’이라 즐겨 부르니, 실제 시간과는 맞지 않지만 부처님께 마지 올리는 사시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겨 생겨난 말이다. 

송광사에서는 10시 반이 지나면서부터 각 법당의 마지퇴공이 이어진다. 이때 법당 부전 스님이 올렸던 청수도 함께 내어와 기왓장을 세워 만든 퇴수공간에 붓게 된다. 오시공양을 알리는 신호는 11시 무렵 사시불공을 마치고 대웅전의 마지가 퇴공될 때이다. 따라서 마지퇴공과 함께 소종을 다섯 망치 쳐서 공양의 시작을 알리는데, 이 종을 사중에서는 ‘밥종ㆍ공양종’이라 부른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배치도 주목할 만하다. 모든 법당의 마지와 청수가 통과하는 선열문(禪悅門)은 큰방 뒤로 나 있고 근처에 퇴수구가 있다. 문 옆에는 소종을 달아놓아, 대기하고 있던 소임 스님이 대웅전 마지퇴공과 청수 붓기를 확인한 다음 밥종을 치는 것이다. 따라서 밥종은 공양을 알리는 소리이자 부처님 마지를 마쳤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사시마지를 퇴공하는 스님과 오시공양의 종을 치는 스님. 공양종이 울리면 사시불공을 마친 스님들과 선방의 스님들이, 가지런히 열을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안행(雁行)을 이루어 선열문으로 들어선다. 부처님의 공양이 끝난 뒤 그 제자들이 나란히 큰방으로 향하는 모습에서, 부처님의 길을 따르리라는 묵묵한 다짐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불교신문3643호/2021년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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