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스님] 서울 화계사 주지 수암스님
[우리스님] 서울 화계사 주지 수암스님
  • 이경민 기자
  • 승인 2021.01.05 12:53
  • 호수 3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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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듯 자연스레,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산다는 것”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접한 불교
수업 보다 법회가 더 즐거웠던 시절
집안 반대에도 고민 없이 출가 선택

선원 들어가고 싶었지만 포교 인연 닿아
불교대학, 신도회 체계적 시스템 갖추고
지역사회 봉사하며 화계사 입지 높여
공로 인정 받아 2020년 포교 대상 수상도
사진=“특별히 잘하는 것 없으니 신도들이 시키면 뭐든지 한다”는 수암스님은 주지로 임명된 후 지난 10년 동안 화계사를 지역 사회 맹주로 이끌어 왔다. 신재호 기자
“특별히 잘하는 것 없으니 신도들이 시키면 뭐든지 한다”는 수암스님은 주지로 임명된 후 지난 10년 동안 화계사를 지역 사회 맹주로 이끌어 왔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하고 싶은 것 많고 꿈 많던 대학 2학년이었다. 어렵게 공부해 들어간 학교, 입학과 동시에 대기업 입사가 보장된 미래나 다름없었지만 스스로 박차고 나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부모님은 “대학이라도 졸업하고 가라”며 한사코 반대했다. 거센 반대에 “중노릇에 무슨 졸업장이 필요하냐”며 맞섰다. 학교에 간 줄 알았던 아이가 매일 강의실 대신 절에 가 있었다는 건 한참 후에나 알았다. 수암스님은 출가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집안 반대가 있었다. 학업이라도 마치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 크셨던 것 같다. 스스로 학업 중단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퇴로가 있으면 쉽게 물러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길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렀던 것 같다. 쥐고 있는 모든 걸 내려놓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자고 마음먹은 다음엔 더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채식이 좋았고 학교 보다 절 가는 걸 더 좋아했으니까.”

행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생소하거나 낯선 것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출가하기 전까지 하루도 허투루 버린 날이 없었으니까. 남들은 출가 후에야 배운다는 목탁 치는 법도 이미 학생 때 배웠다. 토요일 마다 법당 청소를 하던 청소년 시절, <천수경> <화엄경약찬게> <발심수행장> 등 불교 입문서를 자연스레 익혀 나갔던 대불련 활동, 수업 보다 법문 듣는 시간이 더 즐거웠던 10~20대 시절이었다. 

모든 것이 새로워 그 순간순간이 뇌리에 촘촘이 새겨지는 나이, 금강경 독송, 108배, 3000배가 하나하나 몸과 마음에 들어왔다. 그 세월이 6년이다. <금강경 오가해> 강의를 듣기 위해 겨울 방학 찬바람을 가르며 새벽 5시 집을 나서 첫 차를 타기도 했고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수련대회를 가는 대신에 21일 기도 정진에 참여했던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교 때 수업이 끝나고 범어사에 저녁 예불을 하러 가다 1시간 동안 산길을 마구 달린 기억이 난다. 혹시나 법회에 늦을 까봐 온 몸이 땀범벅이 되는 줄도 모르고 내리 달렸다. 마을 입구에서 버스를 타면 편히 갈 수 있었는데 시간에 못 맞출까 안절부절 했던 것 같다. 어찌나 숨이 차던지.”

마냥 절이 좋아 택한 길이었지만 고생길은 훤했다. 행자 도반 10명, 지금이야 귀한 대접이라도 받지만 그때만 해도 매일 장작 때고 농사 짓기에도 하루가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젊은 혈기, 때 묻지 않은 순수가 있었다. “잘 하는 것 없으니 뭐라도 더 하나 해야 했다”는 생각으로 지낸 날들이었다.

그런 수암스님을 지켜보던 은사 스님은 덕숭산 바위를 떠올린 듯 ‘암’자를 넣어 법명을 지었다. 진득하고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라는 뜻 같았다. 그러나 수암스님은 한자리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강원 졸업 후 은사 스님 시봉이 끝나면 자연스레 만행 길을 떠날 생각이었다. 수암스님은 “그때만 해도 이렇게 포교하며 살 줄 몰랐다”고 했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던 출가 후의 삶이었지만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평생 수행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며 선원에 들어갈 때마다 사찰 주지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때마다 한사코 거절했다. 더이상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소임을 맡았다가 한차례 어려운 시절을 넘기고 나면 다시 도망치듯 나오기 일쑤였다. 계속된 거절에도 요청은 재차 이어졌다. 단념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금생에 수행만 할 수 있는 인연은 아닌가 보다. 세상 탓 하지 말고 내 복 없음을 탓하자.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뭐 따로 있나.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그게 ‘포교’ 일 수 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주지 스님’ 수암스님은 스스로를 그렇게 말한다. 화계사에 온 지 올해로 딱 10년, 서울 강북구 지역 사회 맹주로 자리하기까지 수암스님이 어떻게 도량을 일궜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지로 처음 부임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이미지 메이킹’이다. ‘절집은 결코 우리만의 리그가 되어선 안된다’는 철칙으로 권위부터 내려놓았다. 지역민들과 상생하는 길부터 찾았다. 지하철과 버스마다 화계사 자비 나눔과 행사를 알리는 광고를 내는 것도 모자라 직접 떡과 선물을 들고 골목마다 나눴다. 부처님오신날은 물론 동지 때마다 강북구청 등 관공서에 팥죽도 돌렸다. 강북장애인종합복지관 등 자비 나눔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쌀과 김장김치도 때마다 나누고 있다. 

주지로서 할 수 있는 건 다하자는 게 수암스님 철학이다. 사찰을 찾는 발걸음이 끊어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어린이회, 청소년, 대학생 및 청년회, 거사회, 자모회 등을 구성해 짜임새 있게 재가 모임도 구성했다. 국립재활원 법당 환우와 직원을 위한 법회는 물론 이주민을 위한 치과 진료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화계장학회, 숭산장학회, 강북꿈나무키움 장학금 등 지역에 필요한 일이면 팔부터 걷어 붙였다. 지난 10년의 성과들, 지난해엔 이 공로로 2020년 포교대상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내 장점 중 하나는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다는 거다. 특별히 잘하는 게 없으니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시키면 다한다. 신도들이 절에 온다고만 하면 뭐든지 한다. 날 도구로 생각하고 필요하면 언제든 갖다 쓰라고 한다. ‘스님’하고 부르면 어디든 언제든 간다. 그래서 절에 온다면 뭐가 어떻게 되든 다 괜찮다. 나도 매일, 매주 절에 가서 내 운명을 바꾸었으니까.”

아무 연락 없이 불쑥 화계사를 갈 때마다 주지 수암스님을 종종 뵈었다. 절에 누가 오는지 주차장을 서성이는 모습이 퍽 살가웠다. 그림 그리는 불화반 회원들에게 간식으로 먹으라며 빵 한 봉지 ‘툭’ 던져주고 돌아서는 모습이 참 다정다감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지난 봄에는 꾹꾹 눌러쓴 손 편지로 신도들과 만났다. 투박한 편지지에 정성스레 써나간 2장의 편지, 막막할 때일수록 기도하고 부처님께 의지하라는.

“거창한 원력 같은 거 없다. 그저 매일 절에 오는 신도들만 있으면 된다. 불교대학을 10개 반으로 만든 것도 인문학 강좌를 크게 개설한 것도 모두 큰 고민 없이 시작한 것이다. 그래야 신도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언제 어디서든 절에 올 테니까.”

꾸미지 않고 소탈한 모습, 투박하지만 살가운 목소리.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덕숭산 바위처럼 단단한 모습이었다. 
 

사진=“특별히 잘하는 것 없으니 신도들이 시키면 뭐든지 한다”는 수암스님은 주지로 임명된 후 지난 10년 동안 화계사를 지역 사회 맹주로 이끌어 왔다. 신재호 기자
“특별히 잘하는 것 없으니 신도들이 시키면 뭐든지 한다”는 수암스님은 주지로 임명된 후 지난 10년 동안 화계사를 지역 사회 맹주로 이끌어 왔다. 신재호 기자

 

수암스님은...
수암(秀岩)스님은 1986년 수덕사에서 설정스님을 은사로 출가, 백양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정혜사 등 선원에서 수선 안거했다. 홍성 용봉사 주지, 총무원 총무국장,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 조계종 환경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 화계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으며 2020년 포교대상 공로상 수상자다.

[불교신문3643호/2021년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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