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단편소설] 김대갑 ‘키르티무카’
[2021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단편소설] 김대갑 ‘키르티무카’
  • 김대갑
  • 승인 2020.12.31 23:03
  • 호수 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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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티무카

김대갑


그토록 날카롭고, 깊고, 빠르게 뼛속까지 스며든 것은 없었다. 나치 수용소인 베르겐-벨젠의 사진을 보고 수전 손택이 한 말이었다. 현수 역시 티베트 노승을 찍은 사진에서 허파와 췌장을 파고드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었다. 

그가 국립미술관으로 가던 날에는 유독 노란 낙엽들이 범나비 떼처럼 너울거렸다. 현수는 티베트 데뿡 사원 특별전이 열리는 전시실로 들어섰다. 격배산의 사면을 따라 층층이 배치된 희읍스레한 건물들. 작은 전각들이 오종종하게 앉아 있는 사원 안의 풍경과 조용히 걸어가는 스님들의 모습이 소박한 유화처럼 보였다. 현수는 사원의 이모저모를 눈으로 좇다가 그 사진 앞에서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편편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일그러진 등신불의 얼굴. 그의 피부는 황토 빛을 띤 채 메말라 있었다. 구부슴한 목에는 붉은 염주를 걸었고 황금빛 가사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흘러내렸다. 결가부좌를 튼 채 정물인 양 앉아 있는 노승의 모습에서 현수는 무언가 무너지는 감정을 느꼈다. 
 

삽화=용정운
삽화=용정운

가만히 닫은 스님의 입술에는 오련한 균열이 있었고 정결한 자태에선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환희심이 느껴졌다. 그건 현수가 일찍이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불사제의 모습이었다. 그 사진을 본 이후, 그는 티베트로 가서 흑백 망점 기법으로 노승을 촬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현수가 사진 동아리 선배였던 민우의 전화를 받은 것은 문래동에 갔을 때였다. 그때 그는 서울의 숨은 명소를 기획하는 출판사의 의뢰로 철강거리를 찍고 있었다. 예술인들의 작업공간과 작은 철강 공장들이 기묘한 공존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리저리 철강거리를 촬영하다가 조붓한 골목으로 접어든 그는 소담스럽게 앉아 있는 카페를 발견했다. 소음과 먼지에도 아랑곳없이 그곳에선 잔잔한 아리아가 흘러나왔다. 문득, 그가 한번 들어봄직한 음악이었다. 카페로 들어서니 입구에 낡은 거울이 하나 있었다. 양 볼이 살짝 들어간 얼굴에 적당한 중키를 가진, 후줄근한 회색 잠바와 청바지를 걸친 삼십 대 남자가 보였다. 그가 까칠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키위 주스를 주문할 즈음, 아리아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핸드폰이 울렸다. 

절 사진 좀 찍어주라. 책 내려고요? 그래, 사찰 기행문이다. 빨리 해다오. 개런티는 넉넉히 준다. 좋습니다. 민우는 친구와 함께 포토 앤 북스라는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현수의 실력은 프로 사진가와 견줘도 차이가 나지 않았기에 급히 그에게 전화한 것이었다. 

그는 밤새 남도 땅으로 차를 몰아 새벽녘에 승보 종찰인 송광사에 도착했다. 기한은 보름이었다. 그동안 현수는 총 열 군데의 사찰을 촬영할 계획이었다. 좋은 기회였다.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여행 경비가 마련되기에 그는 가고 싶었던 티베트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침도 잊은 채 그는 도량석 목탁을 치는 스님을 따라다니며 송광사 촬영을 시작했다. 달빛이 은조각처럼 산머리에서 내려와 절 마당에 넘쳐흘렀다. 교교한 그 빛 아래 스님들이 예불을 올리기 위해 대웅보전으로 정연하게 걸어갔다. 종고루에서 들려오는 청량한 운판 소리가 허공에 너울거렸다. 송광사의 새벽 공기는 차갑다 못해 투명했다. 

현수는 광각렌즈와 릴리즈를 꺼내 카메라에 부착한 다음, 달빛과 별빛에 의존해서 느린 셔터 속도로 불일 계곡과 침계루의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여명이 밝아오자 현수는 대웅보전을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 푸른 이끼로 뒤덮인 퇴락한 기왓골 사이로 새벽이슬이 맑게 흘러내렸다. 스님 한 분이 그 이슬을 손으로 받을 듯 처마 아래에서 합장하고 있었다. 현수는 침착하게 스님의 손끝에 매달린 빛과 이슬을 담았다. 속된 티가 없이 맑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침계루 아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현수는 대웅보전 앞으로 다가갔다. 전면 문살 아래 궁창에 그려진 키르티무카가 왜 왔느냐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이방인으로부터 법당을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가 담긴 얼굴이었다. 풍경소리가 없고, 탑이 없고, 전각에 주련이 없다는 송광사의 아침이었다. 붉은 태양은 키르티무카의 얼굴에 장려한 빛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송광사 근처에서 하루를 묵은 후 아침 일찍 법보 종찰인 해인사로 향했다. 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홍류동 계곡은 만산홍엽으로 가득했다. 계곡물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풍경소리 청아한 해인사에는 유요(柳腰)의 품새를 지닌 낙엽송들이 여유롭게 서 있었다. 농염한 태양이 지상에 사선의 빛을 내릴 즈음, 현수는 수다라전으로 향했다. 스님 한 분이 장경각 안으로 들어갔고 그는 그 뒷모습을 조심스레 촬영했다. 사선으로 비친 빛은 불사제의 몸을 휘감으며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점심 무렵에 해인사를 나온 그는 내비게이션을 작동시켜 59번 국도를 달렸다. 불 보찰인 통도사를 목적지로, 중간 경유지로는 기장군 내리 마을을 선택했다. 사진동아리 선배인 영재가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서울의 광고업계에서 알아주던 실력파 사진작가였다. 남편이 사업 실패로 자살하자 충격을 받아 외가로 낙향했던 것이다. 근 세 시간을 달린 그는 청자 빛 산허리로 둘러싸인 깊숙한 마을로 들어갔다. 영재는 불행한 과거를 잊은 듯 편안한 표정으로 현수를 맞이했다.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현수는 마을 위쪽 장우산 언저리에 있다는 안휴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오백 년 된 은행나무와 단풍이 일품이라고 영재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안락하게 쉴 수 있다는 사찰 이름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현수는 무지개 우산이 쓰여 있는 듯 화려한 산길을 타고 올라가 안휴사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미령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대웅전 주변으로 노란 은행잎이 난분분하게 날리던 날이었다. 단아하면서도 어딘가 허허로운 기운이 느껴지던 그녀는 사진과 그림에 대해 현수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안휴사에서 미령과 헤어진 후 통도사 근처에 도착한 때는 늦은 밤이었다. 정문 왼쪽 거리에 식당과 술집, 기념품 가게들이 늙은 병사처럼 도열해 있었다. 그때 그는 상가 너머 파란빛과 붉은빛을 동시에 번쩍거리는 모텔을 보았다. 현수는 하얀 털에 두 색깔의 눈, 일명 오드아이를 가진 터키쉬 앙고라 고양이를 상상했다. 

아침 일찍 카메라와 렌즈를 챙긴 그는 통도사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그는 극락보전으로 향했다. 그 유명한 반야용선도를 찍기 위함이었다. 현수는 태양빛이 비스듬히 극락보전의 북측 외벽을 비추는 때를 기다렸다.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시킨 스틸 컷 자세로 그는 오랫동안 서 있었다. 서서히 햇빛이 벽화에 스며들 때쯤, 현수는 컬러 모드로 반야용선도를 찍기 시작했다. 대각선 방향으로 벽화가 밝음과 어두움으로 확연히 나뉘자 그는 흑백모드로 전환해서 촬영했다. 빛은 이제 극락전을 지나 마당으로 스며들었다. 

현수는 그 빛을 따라 극락전 앞에 다가섰다. 본존불인 아미타불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장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망원렌즈를 이용하여 불상 뒤에 있는 아미타 극락 회상도를 세밀히 촬영했다. 붉은색과 황금색이 어두운 색깔과 대비되는 불화를 보며 그는 늘 신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밤늦게 모텔에 돌아온 현수는 힙 플라스크에 담긴 보드카를 마시며 태혁을 생각했다. 가방에서 필름 카메라를 꺼낸 현수는 그걸 한참 내려다보았다. 노트북에 메모리 리더기를 꽂은 현수는 통도사 사진들을 검색했다. 수 백 장의 컷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 열 장을 골라냈다. 포토샵으로 콘트라스트와 명암을 조절한 현수는 각 사진들에 작은 낙인을 찍기 시작했다. 필름 카메라를 한쪽 눈에 갖다 대고 촬영 자세를 잡은 태혁의 모습을 작게 만들어 왼쪽 아래에 집어넣는 식이었다. 사진을 확대하면 모를까 보통의 눈으로 보면 결코 보이지 않을 크기였다. 이런 낙인을 찍는 것은 태혁을 기억하는 그만의 특별한 코드였다.

잠시 후, 그는 송광사 사진들을 모니터에 띄웠다. 대웅보전과 불화들을 확대해보면서 현수는 섬세한 무늬를 감상했다. 불화들 속에는 다양한 패턴과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숨어 있었다. 몇 시간의 작업 끝에 편집 작업을 끝낸 현수는 작은 암자를 찍은 사진들을 불러냈다. 지나가는 길에 들른 암자들의 풍경이 좋아 짬짬이 찍었던 것들이었다. 그는 연화암과 계족암, 청수암에서 찍은 불화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그렇게 불화들을 확대하던 현수는 연화암의 불화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부처님의 가사 밑단에 아주 작게 사람이 하나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윤곽선이 흐릿할 정도로 그림을 크게 확대해보았다. 예쁘장한 여자 아이가 금박 옷을 입고 합장한 채 부처님을 쳐다보는 형상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족암과 청수암의 불화도 확대해보았다. 역시 그 불화들에도 여자의 모습이 있었는데 차츰 나이가 들어간 형태였다. 그런데 그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미령의 얼굴을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방을 뒤적거려 안휴사와 해인사의 풍경이 담겨있는 메모리카드를 찾기 시작했다. 미령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참을 뒤적거리던 현수는 차츰 얼굴이 굳어졌다. 가방 속 물건을 모두 꺼내 봤지만 카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낭패였다. 그 카드에는 안휴사 뿐만 아니라 합천 해인사의 사진도 담겨 있었다. 그게 없으면 다시 해인사로 가야 했다. 초조한 마음에 카드의 행방을 부지런히 떠올려 보았지만 뇌세포 속에 흙탕물이 잔뜩 뿌려진 것처럼 희미했다. 허재비처럼 침대에 풀썩 누운 현수는 민우와 약속한 기일을 떠올렸다. 하루라도 빨리 티베트로 가고 싶었는데 일정이 늦어진다는 생각이 들자 허탈감이 몰려왔다. 

현수는 눈을 감은 채 안휴사 대웅전 앞의 돌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필름 카메라를 잡고 있었다. 아늑한 풍경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그 풍경소리에 섞여 자늑자늑한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어둠의 방을 갖고 있군요. 그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태양을 등진 어떤 여인이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농홍한 입술과 갸름한 얼굴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었다. 현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상한 현실에 빠져든 느낌이 들었다. 

아니죠, 카메라는 밝은 방이죠. 롤랑 바르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언뜻 정신을 차린 그는 여인을 올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아닌 카메라 루시다를 말하는군요. 아, 전문용어를 잘 아시네요. 그녀는 설핏 웃으며 돌 벤치에 다소곳이 앉았다. 라벤더 향인지 솔 향인지 알 수 없는 가향이 여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석양이 그녀의 어깨 위에 스며들었고 노을이 물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진을 찍으셨던 모양이군요. 예, 저도 한때는. 지금은 그림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진을 포기하신 건가요? 포기라기보다는 회의가 들었죠. 어떤? 사진은 무척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고,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배제한다는 것이죠. 흠, 사진은 선택적인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걸로 들리는군요. 그래요. 반면에 그림은 배제하지 않죠.

처음 만난 사람이었지만 사진을 찍는다는 연대감에서 자연스레 나온 대화였다. 두 사람은 잠시 절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늦가을의 태양 빛이 맑은 공기를 튕기면서 마당을 돌아다녔다. 안온하고 편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카메라는 무척 오래된 것이군요. 예, 늘 들고 다닙니다. 어떤 사연이 있는 카메라인 것 같군요. 뭐, 그럴 수도…

사실 현수는 한 시간 전에 이미 그 여인을 본 적이 있었다. 안휴사의 백팔 계단을 지나 은행나무를 찍은 그는 절 마당 오른편에 자리한 요사채로 가게 되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어떤 여인이 너른 방에서 불화에 채색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몰래 그녀를 촬영하기 시작했는데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방문이 열렸다. 매우 잘 생기고 젊은 스님이 나타났다. 절 주차장에서 현수와 마주쳤던 혜안이라는 스님이었다. 그는 여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가벼운 인기척을 내며 말을 걸었다. 

미령 보살. 이제 아미타 극락도는 상호 개안만 남았군요. 예, 연꽃 속 중생의 모습은 제가 마무리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았지요. 채륜 처사는 아직 연락이 없나요? 언제 온다는 기별이 없군요. 혜안 스님, 저는 이제 자신이 없어요. 남아 있는 석채도 별로 없는 터에 채륜 사형이 온다는 보장도 없고. 이제 그만 인공 물감을 써야 할 것 같아요. 그건 안 됩니다! 주지 스님은 흥교 처사의 방식대로 해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스님,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해야 해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글쎄, 그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현수는 조용히 뒤돌아서서 절 마당으로 향했다. 그는 삼층 석탑 뒤에 있는 돌계단으로 다가갔다. 그 계단 위에 대웅전이 작게 보였다. 그는 앉은 자세로 돌계단과 대웅전을 로우키로 촬영했다. 계단은 무척 크면서도 위엄 있게 보이고 대웅전은 천상의 높은 곳에 위치한 듯한 모습이었다. 

현수가 대웅전 앞에 다가가니 키르티무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를 맞이했다. 연꽃잎을 입에 물고 화려한 무늬를 자랑하는 귀면은 볼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대웅전을 돌며 섬세히 촬영했던 현수는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한 시간 전에 피사체로 봤던 여인이 갑자기 나타나자 자못 기이했던 것이다. 

사연? 그렇죠. 모든 사물과 인간은 저마다 사연이 있죠. 근데 여긴 어떻게 오셨나요? 사찰 기행문에 들어갈 사진을 찍는 중입니다. 아, 그렇군요. 여인은 별 말이 없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다음은 어디로? 통도사로 갈 예정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몸을 돌려 대웅전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 귀면은 키르티무카예요, 산스크리트어인 키르티와 무카의 합성어죠. 일명, 영광의 얼굴이라고 하죠. 그런 뜻이었군요. 늘 궁금했는데. 시바신의 무서운 측면을 표현한 형상이라고 하던데. 맞아요. 악령으로부터 법당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죠. 겉보기엔 무섭지만 저에겐 무척 친근한 얼굴이에요. 

한동안 말하던 여인은 조용히 일어섰다. 절 사진 많이 찍으라는 말을 남긴 그녀는 대웅전 뒤쪽으로 총총히 발길을 돌렸다. 재미있는 여인이군. 처음 본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다가 홀연히 가버리다니.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이는데. 순간, 현수는 노을에 물들어가는 그녀의 옆모습을 찍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는 재빨리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촬영했지만 셔터가 작동하지 않았다. 메모리 카드가 꽉 찬 것이었다. 그는 허리 가방에서 다른 카드를 꺼내 카메라에 장착했다. 빼낸 카드는 바지 주머니에 급히 집어넣었다. 

여인의 모습을 망원렌즈로 포착한 현수는 연속으로 촬영했다. 그녀의 주변은 밝았지만 그녀의 몸은 희미한 실루엣으로 남게 되었다. 날씬한 여인의 몸매는 어딘가 에로틱한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좋은 사진을 건졌다고 생각한 그는 흡족한 마음으로 일어섰다. 

그렇군! 현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문을 쳐다보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깨었다 잠들었기를 반복했고 그 와중에 안휴사에서 메모리 카드를 교체한 기억이 났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모텔을 나왔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멀리 통도사를 둘러싼 영축산에 푸른빛이 맴돌았다. 

안휴사에 도착한 현수는 대웅전 앞의 돌 벤치로 달려갔다. 그러나 카드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자신이 돌아다닌 동선을 추적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는 힘없는 걸음걸이로 대웅전 앞으로 돌아갔다. 부주의한 자신을 책망하며 다시 해인사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어쩐 일이세요? 통도사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흠칫 놀라 고개를 든 현수는 여인을 알아보고는 다급하게 물어보았다. 혹시 메모리카드를 못 보셨나요?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혹시 이것인가요? 어, 그게 어찌? 어떤 보살님이 주웠다며 저에게 주시더군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은근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들 사이로 지나갔다. 

가을의 늦은 빛이 깊숙이 들어오는 창가에 둘은 마주 앉았다.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연붉은빛을 바다에 흘렸다. 그 빛은 그녀의 모습을 은밀히 엿보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미령이라고 밝힌 그녀였지만 현수는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등에 푸른 혈맥이 가느다랗게 퍼져 있었다. 포도주색 스커트에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은 미령은 검은 카디건을 걸쳤다. 다양한 색깔이, 그녀의 몸에 머물러 있었다. 안휴사와 가까운 해수욕장에는 송죽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맞은편에 있는 민속음식점에 앉아 있었다. 

그거 아세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유명한 그림. 원래 제목은 ‘이미지의 배반’이죠.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인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건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지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는 거죠. 우리는 실재(實在)를 본다고 착각할 뿐, 모든 것은 이미지일 뿐이에요. 마그리트는 그런 사람들의 착각을 비판한 거죠. 

그런 것인가. 현수는 지금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도 실재가 아닐 거라는 착각이 들었다. 빛과 시각 세포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미지일 뿐. 

저의 아버지는 평생 부처님의 이미지를 그리셨죠. 참 우습죠. 왜 사람들은 불화를 보며 그게 부처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할까요? 불화에 비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는 건 아닐까요? 글쎄 과연 그럴까요? 그냥 그림일 뿐인데. 

현수는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는 미령을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는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 아닌가? 누구보다도 경배해야 할 그녀가 회의적이라니.

제 아버진 대단한 분이셨어요. 마치 불화를 위해 태어나신 분처럼 열정적으로 그리셨죠. 그건 아버지의 제자인 채륜 사형도 마찬가지였지만. 두 분은 연화암 같은 깊은 산중의 암자에도 가곤 했어요. 하나의 불화를 완성할 때마다 그분들의 얼굴에 스민 환희심을 저는 잊지 못해요. 

잠깐만요, 아버님이 연화암 불화를 그리셨다고요? 예. 송광사 옆에 있는 작은 암자예요. 아, 그런 우연이. 제가 촬영한 사진 중에 그 절의 불화가 있거든요. 그래요? 미령은 무척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계족암과 청수암 불화도 그리시지 않았나요? 어머, 그건 어찌? 연화암을 먼저 그리셨고 청수암은 나중에 하셨어요. 현수는 내심 감탄했다. 자신이 발견한 불화 속 여자의 모습이 미령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신기한 인연입니다. 어떻게 제가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겠지만 다음에 제가 상세한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흠,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너무 궁금하군요. 좋아요. 다음의 만남을 위해 여백으로 남겨놓을게요. 예, 여백으로…

두 사람은 건배하며 맑은 술을 마셨다. 그녀가 술잔을 내려놓자 현수는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혜안스님과는 왜 그리 언쟁을 하셨죠. 그것 또한 사연이 많아요. 주지 스님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지만 저로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요. 채륜 사형이라도 오신다면 좋으련만. 그녀는 잠시 허공을 쳐다보았다. 현수는 한 줄기 그리움이 스치는 미령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열일곱에 처음 불화를 그렸다고 했다. 단청장이를 따라다니며 절을 유랑하던 중에 불화장이었던 어느 스님의 문하로 들어가서 흥교라는 이름을 받고 불화를 배웠다. 나이 사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만의 기법을 터득한 그였다. 영산회상도와 괘불, 지장보살도와 같은 그림을 그리면서 흥교는 차츰 명성을 쌓게 되었다. 

오 년 전, 안휴사 주지 스님은 흥교에게 아미타극락도를 그려달라고 했다. 극락의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써 다른 불화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그림이었다.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수많은 중생들과 상징물들을 그려 넣어야 했다. 

미령은 아버지의 조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수제자인 채륜은 절에서 자란 고아 출신으로 나이는 그녀보다 열 상 정도 많았다. 그림 솜씨가 흥교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미타극락도를 그리기 위해서는 최소 육 개월 정도의 기간이 걸렸다. 배접 작업과 밑그림이 끝나면 채색작업에 들어갔다. 흥교는 고분 기법과 달음달이 기법, 생채 석법 등을 능란하게 사용했고 금박기법에 탁월한 사람이었다. 

인공 재료가 아닌 천연 재료만을 이용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던 흥교. 접착제도 소의 힘줄을 녹인 아교를 사용했고 물감도 돌을 갈아서 만든 석채만을 사용했다. 주지스님은 흥교의 그런 전통적 방법을 존중했기에 그에게 불화를 맡겼던 것이다. 흥교가 특히 심혈을 기울인 것은 상호 개안, 즉 부처님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었다. 다른 채색작업은 채륜과 미령을 시켰지만 그것만은 자신이 직접 그렸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했던 미령은 틈틈이 별화를 그렸다. 불교 전설에 나오는 동화적인 소재를 전각의 천정이나 대들보, 기둥에 그려 넣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불화는 그 무게감이 너무 큰 것이었다. 흥교는 그런 미령을 격려하고 지도해주었다. 자신은 평생 사찰을 돌아다녔고 아내는 오래전에 죽고 말았다. 늘 애틋한 마음이 담긴 시선으로 미령을 바라보던 아버지였다. 

차츰 아미타극락도가 제 모습을 갖추면서 이제 가장 중요한 작업만이 남게 되었다. 금박기법으로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의 옷을 도드라지게 했던 흥교였다. 상호 개안을 앞두고 그는 법당에서 늘 기도를 올렸다.

흥교는 부처님 상호를 그리기 전에, 고려 불화인 관경변상도를 보러 일본에 갈 결심을 했다. 극락으로 가는 열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한 관무량수경을 그림으로 해설한 불화였다. 흥교는 그 불화를 이미 여러 번 보았으나 상호 개안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 분통이 터지는구나. 우리 조상이 그린 불화가 왜 일본에 남아있는지. 오래전 미령과 함께 간 교토의 지은원에서 흥교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불화를 내놓으라고 고함치곤 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흥교는 먼저 부처님 얼굴 전체에 석채로 살색을 발랐다. 사흘 후, 살색이 완전 착색되면 청색으로 눈썹을 그리면서 개안 작업을 할 예정이었다. 흥교는 극락에서 환생하는 중생의 형상을 그리는 일은 미령과 채륜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떠났다. 아미타극락도 제일 밑부분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그 위에는 흰 연꽃들이 떠 있었다. 전생의 업에 따라 중생들은 상품, 중풍, 하품으로 나뉘어 연꽃 속에서 환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아버님은 지금 어디 계신지. 스산한 바람이 엷게 불어왔다. 미령은 눈을 감으며 다시 침묵을 지켰다. 현수는 심상치 않은 그녀의 태도에 더 이상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람이 테이블 위로 지나갔고 잔에 담긴 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밤은 고양이처럼 살며시 다가왔고 창문 밖으로 청회색 하늘이 보였다. 

음식점을 나온 두 사람은 모래사장을 오랫동안 거닐며 별화와 불화, 사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바닷가 끝에 홀로 앉아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연한 나트륨 조명이 새어 나오는 곳이었다. 

현수 씨, 그 필름 카메라에 얽힌 사연은 뭔가요? 잠시 망설이던 현수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서로의 허리를 끈으로 묶은 채 떠오른. 저와 태혁 선배는 남도의 항구에 가서 그 아이들을 보았어요. 우리들은 경찰청과 계약을 맺은 프리랜서였어요. 물에서 건져낸 유체들을 찍는 일을 했습니다. 아, 그런 일을 하셨군요. 외롭고 힘든 작업이었겠어요. 힘들다기보다는 너무 처절했습니다. 그 선배는 더 이상 사진을 못 찍겠다며 도망치듯 사라졌고 몇 달 후 유체로 발견되었어요. 이 카메라는 그 사람의 유품이에요. 깊은 사연이군요. 우듬지 사이를 흘러가는 는개처럼. 미령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아버지의 다음 이야기도 여백으로 남겨놓을게요. 다시 만나게 되면… 

조용히 아리아가 들려왔다. 현수가 문래동 카페에서 들었던 아리아였다. 미령씨, 혹시 저 아리아의 제목이 뭔지 아세요? 미령은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카페를 나온 두 사람은 송정 역으로 걸어갔다. 검은 바다와 나란히 누워있는 철길을 밟으며 현수는 가만히 미령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빛이 사라진 유적한 공간에서 두 사람은 양수 속 태아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현수에게 손을 내 맡긴 채 미령은 아리아의 한 소절을 나직하게 불렀다. 알프레도 카탈리니의 오페라, ‘La Wally’에 나오는 아리아라고 말했다. 

현수야. 사진이 참 좋긴 한데 몇 개 사진은 좀 다른 걸로 하자. 왜 마음에 안 들어요? 나름대로 좋은 시도이긴 한데 독자들에게 어필하기엔 좀 어렵다. 

석남사 일주문을 나서던 현수는 민우의 전화를 받으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샘플로 보낸 사진 중에서 흑백 망점 사진을 보고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감광도를 최대로 높여 굵은 점들이 보이게 해서 마치 점묘화처럼 보이는 사진들이었다. 프랑스 사진작가 브뤼노 레끼야르에 대한 오마주로 현수가 자주 사용하던 기법이었다. 

현수는 민우에게 생각해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대중들을 위한 사찰 기행문이지만 예술 사진을 삽입하는 것도 그리 나쁜 시도는 아니었다. 예술 사진이든 풍경 사진이든 대중들이 그걸 보고 감상하면 그만인 것이다. 

차에 시동을 건 현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담배를 피웠다. 석남사를 끝으로 이제야 모든 촬영이 끝난 것이다. 근 천 컷에 달하는 사진들을 분류하고 보정하는 작업만 남았다. 그는 서울로 가기 전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미령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녀와 안휴사에서 헤어진 것이 벌써 사흘 전이었다. 현수는 사찰 촬영을 마치면 다시 오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했다. 시간이 된다면 자신의 차로 서울로 같이 가자는 말도 했다. 미령도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휴사에 도착하니 여신도들이 요사채 공양 칸에서 정연한 자세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대웅전 앞에서 카메라를 꺼내 하이키로 그녀들의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삼층 석탑을 도는 그녀들의 모습은 부처님의 자비를 원하는 가련한 존재들이었다. 그는 뷰파인더 속에서 미령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사각 프레임 속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혜안이었다. 

또 어쩐 일이세요? 아, 예.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잠시 쉬러 왔습니다. 이제 서울로 바로 갈 생각입니다. 미령 보살을 만나러 오셨죠? 마음을 들킨 현수는 당황하며 고개를 숙이다가 이내 얼굴을 들었다. 미령이 가버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흥교 처사는 실종되었다고 들었어요.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요. 일본에 간 후로 소식이 끊겼으니. 요사채 안의 다탁에 현수가 앉자 혜안이 보이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예? 어떤 일로? 교토의 지은원에서 나라에 있는 고찰로 간다는 연락을 끝으로 행방불명되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수는 허파가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필름 카메라에 얽힌 사연을 담담히 듣던 미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쩜 그리 침착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

그녀와 채륜이 미완성 불화를 안휴사에 가지고 오던 날, 주지 스님은 채륜에게 상호 개안을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한사코 고사했다. 그 언젠가는 스승이 돌아와 해야 한다면서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주지 스님은 아미타극락도를 완성시키고 싶었어요. 그동안 공들인 노력도 아까웠고 흥교 처사의 작품이 훼절되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거죠. 그래서 이제는 상처를 잊었거니 생각하며 두 사람을 불렀는데. 채륜 처사는 아직도 스승이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아요. 미령 보살은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고. 제 느낌으론 흥교 처사는 두 분을 애틋하게 생각한 것 같더군요. 안타까운 사연이군요. 이제는 어쩔 수가 없죠. 그 언젠가 미령 보살과 채륜 처사가 다시 올 날을 기다려야겠죠. 

두 사람은 한동안 보이차만 입으로 가져갔다. 현수는 착잡한 심정으로 차를 마시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님, 그럼 그 불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현수의 말에 혜안은 고개를 돌려 작은 방문을 가리켰다. 저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불화를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왜요?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현수의 말에 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스님께서 보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허허. 글쎄 그건 제 소관사항이 아니에요. 현수가 애원하며 말했지만 혜안은 완고했다. 한참 동안 매달리던 현수는 불현듯 노트북을 꺼냈다. 

스님, 이걸 한번 보시지요. 현수가 노트북의 화면을 가리키자 혜안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현수 옆으로 다가갔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현수가 찍은 불화를 이리저리 지켜보았다. 현수는 여자의 모습이 그려진 연화암과 계족암, 청수암의 불화를 확대해서 차례로 보여주었다. 차츰 혜안도 자못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미령인 것 같다는 말을 했다. 현수는 미완성 불화에도 그녀의 모습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넌지시 했다. 잠시 고민하던 혜안은 요사채 문을 잠그고 불화를 너른 방에 펼쳤다. 

현수의 눈에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극락세계가 펼쳐졌다.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빠졌다. 여태껏 그가 봤던 불화와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머릿속에서만 생각하던 연화장의 세계가 장엄하게 나타났다. 그는 티베트 등신불에서 만났던 푼크툼을 느끼며 한동안 멍한 자세로 서 있었다. 빨리 촬영을 서두르세요. 조금 있으면 대중 집회가 열립니다. 혜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현수는 급히 카메라를 꺼내 세밀히 촬영했다. 촬영을 끝낸 그는 아미타극락도 사진을 확대해서 이곳저곳을 지켜보았다. 

이상하군요. 이 불화에는 미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현수는 다시 세밀히 이곳저곳을 확대해서 관찰했지만 그녀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는 극락의 새라는 긴나라의 얼굴에 커서를 갖다 댔다. 남녀 두 사람의 머리에 하나의 몸통,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상상의 새였다. 여성의 얼굴을 확대해 본 현수는 차츰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미령이었다. 그걸 본 혜안도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남성 쪽도 확대해보라고 말했다. 현수가 그걸 확대하자 영민하게 보이는 두 눈에 온화한 표정의 남자 얼굴이 보였다. 혜안은 채륜 처사라고 말하며 탄복했다. 현수는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다시 현수는 아미타극락도의 아랫부분을 확대해보았다. 수많은 연꽃 속에 중생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미령이 채륜을 기다리면서 그렸다는 부분이었다. 마우스를 만지며 연꽃들을 하나씩 확대하던 중에 혜안이 갑자기 현수의 손을 잡았다. 이 부분을 더 확대해보세요. 현수가 마우스 휠을 돌리자 흰 연꽃 속에 들어있는 중년 남성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고 붓을 잡은 채 합장하는 모습이었다. 

아, 미령 보살의 간절한 마음이 이렇게 숨어 있었군요. 혜안은 두 손을 모으며 오랫동안 합장 자세를 취했다. 현수 역시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늘 여여하십시오. 요사채 앞에서 혜안은 이 말로 현수에게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삼층 석탑을 지나 대웅전으로 올라간 현수는 망연자실 절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풍경소리가 들려왔고 마당 가녘에는 배롱나무 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미령이 연꽃 속에 숨겨놓은 아버지와 흥교가 긴나라에 그려 넣은 미령과 채륜. 아버지는 두 사람을, 딸은 그런 아버지를 아무도 몰래 집어넣었다. 그들은 영원히 서로의 행위를 모를 것이다. 

현수는 등신불을 찍어서 그 모습을 소유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현수 씨, 우리가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리죠.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만져질 수 없는 현실에 집착하고 그걸 소유하려고 할까요? 

눈을 감은 그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프랑스 영화, 디바에 나오는 성악가가 아리아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인 신시아 호킨스는 자신의 노래를 결코 녹음하지 말라고, 흘러가는 노래를 붙잡지 말라고 했다. 현수는 차츰 그 아리아의 제목이 기억났다. 그건 ‘그래요, 이제 난 떠나겠어요’였다. 

현수는 사각의 프레임 속에 피사체를 붙잡아두려고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현실의 이미지를 포착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가 된다. 두 부녀는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한 장의 그림 속에 오롯이 담아냈다. 현수가 태혁의 모습을 자신의 사진 안에 집어넣는 행위는 허위와 가식이었다. 합성이라는 인위적인 수단에 의해 또 다른 허위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저와 제 아버지가 그린 불화는 불화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미령의 말이 다시 귓가에 쟁명하게 울려왔다. 현수는 프레임 속에 갇혀 있던 자신의 영혼이 서서히 분해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태껏 모든 사람과 사물을 피사체로만,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가. 미령은 그림 속 사물들과 이야기한다고 했다. 거북과 용, 토끼, 그리고 키르티무카에게도. 나는 그냥 찍었을 뿐이다. 그 어떤 소통이나 정감도 없이. 결국 내가 찍은 사진들은 생명이 없는 하찮은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현수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는 카메라와 노트북을 꺼내 여태껏 촬영한 모든 사진들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안휴사에 짙은 어둠이 몰려왔다. 그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키르티무카 만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 단편소설 당선소감 / 김대갑

“다시 시작하라는 채찍 장엄하게 받았다” 

김대갑
김대갑

기쁘다. 오랜 그리움 하나를 해소한 것이 너무 기쁘다. 학창시절에 시를 썼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면서 시와 소설을 접했다. 늘 글을 썼고 언젠가는 내가 창조해 낸 작품들이 제대로 빛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눈 속에 피어난 설중매처럼, 청자 빛 산허리를 돌고 돌아 고요히 내려앉은 천상의 새 긴나라처럼, 나의 그리움은 내 작은 서재로 이제야 스며들었다. 늘 미안했다. 내 소설 속에서 죽어 간 수많은 인물들에게. 과연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 건지, 그들의 죽음을 탄생시킨 그 역설의 행위를 해도 되는 건지. 

생업에 쫓겨 한참동안 글을 놓았던 적이 있었다. 언뜻, 옥색 구름 사이로 봄의 햇살이 우련하게 비출 때, 가을의 끝자락에서 는개가 서서히 내릴 때, 혹은 겨울의 초입에서 우듬지 사이로 낙엽이 하느작거릴 때, 글은 다시 내 가슴 속으로 은밀하게 숨어들었다.

모든 것은 그저 인연의 끈이리라. 한때는 글이라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살 길만 찾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라고 탄식하며 낙담과 실망의 늪을 헤매지 말자고 결심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글로부터 도망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문향(文香)의 바다를 벗어날 수 없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제 다시 시작하라는 채찍 하나를 장엄하게 받은 기분이다.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더 좋은 작품, 더 좋은 글로 정진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 소설 심사평 / 한승원 소설가

“냉철한 머리, 따뜻한 가슴 가진 소설”  

한승원
한승원

소설은 이야기를 통해 삶의 참모습을 형상화하는 예술이다. 단편소설은 긴박감이 있고 재미있어야 하고, 읽고 난 독자가 뜨거운 감동을 하게 해야 한다. 소설은 독자에게, 이거야 말로 슬프면서도 참된 삶(실존) 아닌가요, 하고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음모된 모든 작품을 읽은 결과 ‘승무’, ‘빛의 그림자’, ‘선과 원’, ‘본래 그 자리’, ‘天網(천망)’, ‘키르티무카’ 여섯 편을 본선에 올리고 다시 깊이 읽었다. 

이번 응모작들은 여느 해보다 문장력이 좋은 작품들인 듯싶었지만, “나는 왜 지금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하는 당위성이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소설의 궁극의 목표는 인간의 구원에 있다. ‘천망’, ‘키르티무카’를 제외한 네 편의 작품은 문장과 짜임새와 주제를 도출하는 기법에서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하다. ‘천망’은 잔잔한 독거노인의 삶을 다룬 허무 냄새 나는 것인데, 한 소년과의 교환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키르티무카’는 문장이 세련돼 있고, 이야기에 삶의 무게가 실려 있고, 현상 저 너머의 본질을 응시하는 시각과 형상화 하는 실력이 믿을 만하다. 좋은 소설을 쓰려면 냉철한 머리의 감각도 있어야 하지만 따뜻한 가슴의 감각도 있어야 한다. 내공도 있어 보이고, 두 감각을 다 가지고 있다 싶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당선자에게 축하하고 건필을 빈다.

[불교신문3642호/2021년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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