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 40주년, 불교시민사회운동史] ⑫ 에필로그 <끝>

법난 아픔 중생구제로 승화시켜
인권·복지·통일·평화운동에 결실
‘깨달음의 사회화’…불교위상 高
앞으로 40년, 불교역할 고민해야

1980년 10월27일. 신군부 독재정권이 ‘불교정화’를 명분으로 군인과 경찰 등 공권력을 강제적으로 동원해 전국 사찰을 수색하고 스님들을 무단으로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계종총본산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 5700여 개 부처님 도량이 공권력에 짓밟혔으며, 1700여 명의 스님들이 고문과 가혹행위 등을 당했다. 이른바 ‘10·27법난’이라 불리는 이 전대미문의 종교탄압 사건은 불교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불교의 전통과 교리를 현실에 맞게 개혁해 불교계의 새바람을 일으키겠습니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이상불교를 실천하는데 온힘을 쏟겠습니다.(1980년4월27일자 조선일보)” 40년 전 종도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제17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태공 월주 대종사(현 원로의원)의 이같은 바람 또한 신군부 독재세력이 일으킨 법난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불교계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한국불교는 전대미문의 종교탄압인 10·27법난을 겪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중심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사진은 그간 한국불교가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활약한 모습.
한국불교는 전대미문의 종교탄압인 10·27법난을 겪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중심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사진은 그간 한국불교가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활약한 모습.

1994년 종단개혁 후 첫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하며 다시 종단을 이끌게 된 월주스님은 1995년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이를 시작으로 불교계는 그간 미처 신경쓰지 못한 다양한 사회운동 분야로 시야를 넓혔다. 법난 이후 강산이 4번 바뀌는 동안 NGO, 인권, 남북교류, 사회복지, 국제개발협력 등 다양한 영역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펼치며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다. 

법난 이후 가장 먼저 손을 뻗친 분야는 불교 NGO(비정부기구 또는 비정부단체) 운동이다. 1980년대 초기부터 당시 사회 흐름인 민주화운동과 맥을 같이했다. 그간 볼 수 없었던 민중불교운동연합, 민족자주통일불교운동협의회, 전국불교운동연합 등의 단체들이 민주화 기치 속에 성장해나갔다. 대승불교 이념에 기반을 두고 조직화된 이들은 노동, 인권, 환경 등의 분야로 영역을 넓혀나가며 불교의 가르침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1980년대 불교계의 NGO운동 분야 참여는 곧 1990년대 불교계 내부 변혁의 힘을 끌어모으는 원동력으로 작동했다.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불교계 인사들은 불교의 사회참여를 확대함과 동시에 내부 개혁에도 적극 나섰다. 그 결과 범국민적인 지지를 받은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이 이뤄지기도 했다.

종단개혁 이후엔 불교계 NGO 활동은 다양화됐다. 2000년대 들어선 사패산터널 반대, 지리산댐 건설 반대, 천성산 살리기 운동 등 환경운동과 생명평화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조계종단의 지원을 통해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띄었다. 

10·27법난은 곧 인권탄압 사건이었다. 공권력에 상처를 입은 수많은 스님들과 재가 불자들은 이를 계기로 각성하게 된다. 그리고 인권 분야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며 구체적인 실천에 나섰다. 불교계는 1990년 11월 ‘불교인권위원회 창립법회’를 봉행하며 사회적으로 인권활동의 첫발을 내딛었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월주스님과 한상범 동국대 교수, 용태영 변호사를 공동위원장으로 선임하면서 공개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불교인권위원회의 출범은 교계 안팎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동아일보와 한겨레 등 일간지를 중심으로 관련 기사를 주요하게 보도할 정도로 불교인권운동에 거는 기대가 컸다. 

불교인권위원회는 1991년 불교법조인회, 한국교사불자연합회 등과 ‘공명선거추진불교도시민운동연합’ 결성식을 갖고 활동 반경을 확장시켰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지원 활동도 시작했다. 1992년 6월 할머니들의 공동주거공간 마련을 위한 모금을 전개하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며 오갈 곳 없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돕기 위해 불교계가 나선 것이다.

당시 정부나 시민단체에서 크게 관심을 나타내지 않던 시기, 불교계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지원에 먼저 나섰다는 점은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밖에도 불교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 인권운동은 경제정의실현, 북한주민돕기, 재외동포지원, IMF실업자돕기 등으로 영역을 점차 확장하며 국가사회 발전의 초석(礎石)을 놓았다.
 

사진은 그간 한국불교가 통일 분야에서 활약한 모습.
사진은 그간 한국불교가 통일 분야에서 활약한 모습.

통일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 후반부터 통일 논의를 공개적으로 펼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 속에 종단 안팎의 다양한 단체들이 남북교류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조계종 중앙종회 산하 ‘남북불교교류추진특별위원회’가 주목할 만하다. 이 특위는 종단 사상 최초로 결성된 통일 기구로, 남북불교교류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중앙종회의원으로 특위 구성을 발의한 월주스님이 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10월 LA 관음사에서 ‘남북불교지도자회담’이 열리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해방 이후 46년 만에 남북불교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회담이다. 남북불교교류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1994년 월주스님이 제28대 총무원장에 당선되면서부터다.

월주스님은 총무원장 재임 기간에 북측 조불련과 지속적인 교류를 추진했다. 1997년에는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남북 공동발원문 낭독’이라는 성과를 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2007년에는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가 회향하며 실질적인 남북불교교류 결실이 맺어지기도 했다. 
 

한국불교가 그동안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약한 모습.
한국불교가 그동안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약한 모습.

불교시민사회운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회복지’ 분야는 사실 출발을 특정하기 어렵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한국전쟁 등 격동의 시기에서도 스님 또는 재가불자나 사찰, 신행단체 등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자비행을 실천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1990년대 남북 교류가 확대되는 상황에서는 수해와 가뭄 등의 재해로 고통에 빠진 북한주민들을 돕는 인도적 지원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종단 차원의 사회복지 참여가 본격화된 시점은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출범을 꼽을 수 있다. 1995년 2월25일 당시 총무원장이던 월주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 사회복지 실천’을 모토를 내세우며 종단에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사회복지에 대한 인식과 참여가 이웃종교에 비해 부족했던 불교계의 본격적인 사회복지분야 참여를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다. 

특히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은 지역 단위에서 사찰이나 불교단체 중심으로 진행되던 사회복지 활동을 하나로 통합하고 조정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다. 또한 국내외 긴급재난 상황이 발생 시 재해복구 및 봉사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면서 불교계 자비행을 널리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자연스럽게 자비와 나눔 정신을 바탕으로 대사회적 역할과 사회적 공헌에 기여함으로써 한국불교의 대내외적 위상도 높였다. 25년이 지난 현재 190여 사회복지시설과 260여 부속시설을 운영하고 있고, 5000여명의 사회복지 활동가와 300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0·27 법난의 아픔을 승화시킨 한국불교의 중생구제 원력은 국내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2000년대에 들어선 세계 곳곳에 자비의 꽃을 피우게 된다. 무엇보다 2003년 월주스님이 창립한 국제개발협력 NGO 지구촌공생회는 교계 안팎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 국내를 넘어 지구촌 이웃까지 확대되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구촌공생회는 불교계 인사들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든 국제개발협력단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현재 활발히 활동을 펼치고 있는 불교계 국제개발 분야에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창립 20주년을 앞둔 지금, 지구촌공생회는 현재 캄보디아 네팔 등 총 6개의 탄탄한 해외 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배움의 희망을 전달해주는 교육지원사업, 생명의 물을 선물해주는 식수지원사업, 지뢰 제거 및 푸른 마을 조성 등 지역 개발 사업 등을 핵심 사업으로 삼고 세계 곳곳에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월주스님의 ‘천지여아동근 만물여야일체(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의 가르침이 중심이 됐다. 

지구촌공생회의 활발한 활동은 종단 원로 및 중진 스님들의 국경 없는 자비행을 촉발하는 마중물이 됐다. 성관스님의 로터스월드(2004년 창립), 웅산스님의 더프라미스(2008년 창립), 월서스님의 천호월서희망재단(2012년 창립) 등 새로운 불교계 국제개발협력 단체들이 연이어 태동하며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한국불교는 10·27법난의 아픔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불교 발전의 기회로 바꿨다. 이 바탕에는 월주스님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 있다. 스님과 불자 등 모든 사부대중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적극 나섰고,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하며 국민과 함께하는 불교로 거듭났다. 덩달아 불교의 위상도 높아졌다. 다시 지금,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10·27법난 40주년을 맞은 한국불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40년간 묵묵히 걸어왔던 발걸음에 그 해법이 담겨있다.
 

그간 한국불교가 환경 분야에서 활약한 모습.
그간 한국불교가 환경 분야에서 활약한 모습.

[불교신문3639호/2020년12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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