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젊은 시절 미처 알지 못했던 ‘어른의 진면목’

지금은 행자기간이 정해져 있지만 과거엔 절마다, 스님마다 달랐다. 사찰과 은사 스님의 재량이었다. 입산 한달도 지나지 않아 사미계를 받기도 했고 3년을 살고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행자기간을 속세의 습과 물을 빼는 기간이라고 표현하는 옛 어른들도 있었다. 편안한 삶을 버리고 새로운 출가수행의 길을 걸을 힘을 키우는 때라고도 하고, 평생의 공부를 하는 기간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소중한 시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험난한 행자의 관문을 지나서야 들어설 수 있는 길이 출가수행의 삶이다.

행자 도반인 태관스님(왼쪽)과 종삼스님은 고된 행자생활 뒤 사미계를 받지 못한채 각자의 길을 떠났다. 태관스님은 금산사에서, 종삼스님은 화엄사에서 사미계를 수지한 뒤 한껏 멋을 부리고 만났다. 사진 속엔 없는 행자시절 도반 종홍스님(여수 용문사 한주)이 가져온 사진이다.
행자 도반인 태관스님(왼쪽)과 종삼스님은 고된 행자생활 뒤 사미계를 받지 못한채 각자의 길을 떠났다. 태관스님은 금산사에서, 종삼스님은 화엄사에서 사미계를 수지한 뒤 한껏 멋을 부리고 만났다. 사진 속엔 없는 행자시절 도반 종홍스님(여수 용문사 한주)이 가져온 사진이다.

 

#1
추억은 아름답다고 하는데 태관스님은 행자시절이 아름답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힘든 기억이 깊이 남아있는 탓이다.

1970, 고창 선운사로 들어갔다. 11살 때의 일이다. 수명이 짧아 절에서 살아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부모님은 선운사로 보냈다. 부안 개암사 인근에 살던 태관스님은 동네 친구들과 개암사에 자주 놀러 갔기에 선운사가 낯설지 않았다. 그렇게 행자생활이 시작됐다.

새벽부터 잠을 자기 전까지 일이 너무 많았다. 법당을 비롯해 도량을 청소하는 것부터 사찰의 모든 허드렛일이 행자들의 몫이었다. 넓디넓은 도량은 풀을 뽑으면 금새 자랐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는 일도 어린 행자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틈틈이 <초발심자경문>과 <사미율의> 등을 공부했다.

유난히 농지가 많았던 선운사는 당시 대부분의 사찰이 그렇듯 직접 농사를 지었다. 사중의 모든 대중이 함께 농사를 지었지만, 가장 힘든 일은 행자 차지였다. 어린 나이라고 용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랫마을 학교 가는 시간은 일로부터의 유일한 해방의 시간이었다. 밥을 굶지는 않았지만 마음껏 먹어본 적도 없다. 지금 생각하면 배고프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는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2
당시의 기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도반이 있다. 전 화엄사 주지 종삼스님이다. 종삼스님은 태관스님 보다 1년 먼저 행자로 들어왔다. 당시 선운사 주지 남곡스님은 나이가 어린 행자들에게 바로 계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3년 동안 행자생활을 했다.

태관스님과 종삼스님은 절 생활이 너무 힘들어 선운사를 떠났다. 굳은 신심이 있던 때가 아니었기에 이 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전주, 대전을 거쳐 다시 정읍 내장사에 짐을 풀었다. 또다시 행자생활의 시작이었다.

내장사는 그때까지도 사찰을 놓고 벌어진 비구와 대처간 갈등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안정된 생활이 힘들었다. 하지만 태관스님에게 내장사 생활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은사 법타스님(현 조계종 원로의원)을 만난 것이다. 동국대 대학원을 마치고 내장사에 와있던 법타스님은 배울 점이 많았다.

수계도 하지 않은 어린 행자들에게 내장사는 오래 머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태관스님은 남원 선원사로 거처를 옮겼다. 나중에 안 소식이지만 종삼스님은 구례 화엄사로 갔다. 태관스님은 대처승과 남원 선원사에서 대치하며 살았다. 내장사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김제 금산사로 가서 계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종단의 수계체계가 잡혀있지 않았던 시기였으나, 본사급 사찰에서 수계해야 한다는 원칙이 살아있었다.

#3
은사 법타스님을 따라 광주 원효사로 옮겼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 젊은 시절의 치기였을까. 꼿꼿하기만 한 은사 스님을 떠나 미국 LA 관음사로 갔다. 1988년 입국해 뒤늦게 중앙승가대를 다니면서도 은사 스님에게 단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방학 때면 학교 도반의 은사 스님 절에서 부전을 살며 학비를 마련했다. 주머니에 2만원 이상 담긴 적이 없었고, 교재를 살 돈도 없었다. 참 어려운 시절이었다.

서울 조계사 인근 인사동 거리에서 은사 스님을 우연히 마주쳤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원효사에서 보았던 은사 스님과는 너무도 달라져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편안함이 느껴졌다. 함께 만둣국을 먹었다. 은사 스님에게 가졌던 반발심이 한순간 다 사라져버렸다. 그때서야 은사 스님의 진면목이 보였다. 공부가 참으로 부족했음을 알았다.

이곳저곳을 떠돌다보니 옛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 행자시절 도반인 종홍스님(여수 용문사 한주)이 사진을 가져왔다. 정작 사진 속엔 종홍스님은 없고 각자 사미계를 수지한 뒤 만난 태관스님과 종삼스님만이 있다. 소중한 기억을 함께할 도반이 더없이 소중한 것은 승속을 가릴 수 없는 모양이다.

영천=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불교신문3637호/2020년12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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