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보다 앞선 ‘법정사 항일운동’ 정신 계승해야

한때는 ‘보천교의 난’으로 역사 왜곡
김봉옥 윤봉택 씨 등 노력 바로잡아
봉려관 스님 법정사 창건 항일 지원

일제강점기 봉려관 스님이 창건한 제주 법정사의 스님과 신도들이 1918년 주도한 항일운동이 한동안 ‘보천교의 난’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김봉옥, 윤봉택 씨를 비롯한 다수의 인사들이 사료를 발굴하고 증언을 청취하여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바로 잡았다.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혜달스님은 봉려관 스님을 비롯한 선대 스님과 제주도민들의 항일운동을 역사적으로 바르게 조명해 계승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기고문을 보내왔다.

혜달스님 /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혜달스님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발굴, 조사, 연구, 성역화 사업 추진 과정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제주도는 이형상(1653~1733)이 제주목사로 부임(1702~1703)하면서 사찰 철폐는 물론 제주도민들의 활동 및 공식적 불교의례까지 말살했다. 그 후 제주불교는 쇠락하였고, 봉려관(1865~1938) 스님이 1909년 봄 한라산에 근대 제주불교 최초의 사찰인 관음사를 창건하여 본격적인 전법 활동을 하기 전까지 200여 년간 암흑의 시대를 보내야 했다.

봉려관 스님은 지역포교, 역사적 가치, 수행 등의 목적에 맞추어 사찰을 창건 또는 중건하였는데, 이러한 취지와 다른 사찰이 항일독립 인사의 은신처로 세워진 법정사이다. 1909년 7월 해남 대흥사 심적암에서 의병들이 참사당한 장면을 목격한 봉려관 스님은 그 자리에서 항일 의지를 다진다.

그리고 1911년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장소를 찾아 제주에 법정사를 창건한다. 1913년(혹은 1914년) 봉려관 스님은 영실 움막에 거주하던 강창규, 김연일, 방동화를 법정사로 이주시켜 의식주는 물론 군자금을 전달한다. 3·1운동 보다 한해 앞선 1918년 법정사에 주석하던 이들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였지만, 일제가 목포에 주둔시켜 놓았던 경찰병력을 투입하여 무력 진압되고 말았다.

그런데 ‘내 나라의 주권을 되찾겠다’는 법정사의 항일독립운동은 제주도민에게는 집안을 망치는 종교로 인식되던 ‘보천교의 난’으로 명명되면서 숭고한 뜻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왔다. 제주도 관내에서 발간된 자료에 ‘보천교의 난’이라 쓰이고, 제주도 사학계는 관련 자료발굴이나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
 

1918년 법정사에 주석하는 스님과 신도들이 일제에 맞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사진은 터만 남은 제주 법정사. 불교신문 자료사진.
1918년 법정사에 주석하는 스님과 신도들이 일제에 맞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사진은 터만 남은 제주 법정사. ⓒ불교신문

1991년 1월 제주향토사학자 김봉옥씨(1923~2002)와 제주보훈지청에 근무하는 이대수씨가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현재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서 ‘정구용 재판기록 판결문’을 확인하면서 ‘보천교의 난’이 아니라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1918년 10월 7일 봉기한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이었음을 확인한다.

이에 근거하여 1994년 3월 4일 제주보훈지청은 서귀포시청에 법정 사항일운동 관련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수형인명부’, ‘형사사건 기록부’등을 업무에 참고하라는 문서를 배송한다. 이 문서는 보훈업무를 담당하는 부서 소관이지만, 당시 윤봉택 씨가 한학에 밝다는 이유로 법정사 항일 운동 건에 한해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는 때부터 법정사의 발굴, 연구, 조사, 성역화를 추진하게 된다.

윤봉택씨는 1993년 가을 김봉옥씨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입수한 법정사 사건 관련 ‘수형인 명부’ 사본을 건네 받았다. 이때 김봉옥씨는 “이 사건은 항일운동이니만큼 운동에 참가했던 관련자의 신원을 파악하여 달라”고 비공식적으로 요청한 상황이었고, 윤봉택씨는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1994년 10월 4일 가칭 ‘법정사 항일운동 사업추진회(위원장 이영민)’가 이 사건이 ‘보천교의 난’이 아니라 당시 김연일 스님과 방동화 스님 등 불교지도자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전개한 항일운동임을 천명하였다. 그동안 왜곡 폄하된 사건의 진실을 올바르게 직시하고 영령들을 위한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 달라는 청원서를 서귀포시청에 접수한다.

윤봉택씨는 이 문서와 청원서를 접수한 시점부터 2014년 퇴임할 때까지 행정적 차원에서 사실에 접근하였고, 그 과정에서 ‘보천교의 난’이 아니라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제주의 시민, 민간단체, 유족, 지역 주민이 중심이 되어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행정력을 뒷받침해 주었고, 많은 학자들이 이 항일운동에 관심을 갖게되어 ‘법정사 성역화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다.

1995년 8월 15일 서귀포 중문청년회의소 창립 2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열린 ‘무오년 법정사 항일운동 학술토론회’에서는 △제주도 법정사 스님들의 항일투쟁(임혜봉 스님) △무오년 제주 법정사 항일무장봉기 연구(안후상) 등의 발표가 진행됐다. 또한 이때부터 ‘무오 법정사 항일항쟁’ 만세대행진 및 추모재가 시작됐다.

2002년 11월 21일 서귀포시 주최로 열린 제1회 ‘무오 법정사 항일항쟁 세미나’에서는 △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성격(박찬식) △일제시대 종교상황과 법정사 항일운동(조성윤) △법정사 항일운동 가담자와 운동의 성격(김창민) △법정사 항일운동의 민족운동사적 위상(김정인) 등의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그리고 2004년 2월 28일 서귀포시 주최로 열린 ‘무오년 법정사 항일운동의 항일운동사적 위상’이라는 주제의 제2회 학술심포지엄에서는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법적 고찰(정긍식)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지역주민의 인식(조성윤) △법정사 항일운동과 지역주민의 참여(김창민)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김광식) 등의 발표가 있었다.

그동안 진행된 법정사 항일운동 발굴, 조사, 성역화사업 추진 과정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91년 1월 20일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에서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자료를 김봉옥, 이대수씨가 발견한 후, 1994년 10월 14일 법정사 항일운동 재조명을 청원하고, 1994년 11월 자료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1996년 9월 24일 법정사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 1차 회의가 서귀포시청 회의실에서 개최되어 정관 마련, 임원 선출 등의 안건을 다뤘다. 이날 회의에서는 자연휴양림을 연계한 성역화 1단계에서는 위령탑 건립, 2단계에서는 영각(위패 사당)건립, 3단계에서는 정신교육장 및 법정사 복원을 추진하기로 사업 내용을 결정했다.

1996년 10월 15일 법정사 성역화사업 추진 계획안이 마련되고, 1996년 11월 30일 법정사 성역화사업 기본설계 용역이 체결되었다. 1997년 4월 18일 법정사 성역화사업 기본시설 용역 결과 보고회가 열리고, 1997년 5월 30일 법정사 사업지 현지 답사가 이루어졌다. 1997년 11월 20일 법정사 지역이 휴양림지구에서 해제되는데, 해제 면적은 95만 제곱미터(28만7375평)였다.
 

근대 제주 불교의 부흥을 위해 헌신한 봉려관 스님. 제주 법정사를 창건해 항일운동의 초석을 놓았다.
근대 제주 불교의 부흥을 위해 헌신한 봉려관 스님. 제주 법정사를 창건해 항일운동의 초석을 놓았다.

1999년 11월 법정사 항일항쟁 다큐멘터리 제작에 서귀포시 예산(850만원) 지원이 이루어지고, 2000년 9월 20일 법정사 진입로 시도구역 결정고시가 있었다. 법정사 진입로 공사(1.84km, 폭 9m)는 2000년 12월부터 2002년 8월까지 진행됐다. 또한 항일항쟁 선열 66명 가운데 24명이 정부 포상을 받았다.

2003년 2월 24일 제주도에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의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여, 그해 11월 12일 제주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3년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 성역화 공사(의열사, 관리사, 상징탑 건립)가 발주되어 2005년 위패봉안소, 관리실, 경비실가 신축된다. 2004년 10월 2일 ‘무오 법정사 항일유족회’가 창립되고, 2006년 위패 봉안소 진입로를 정비했으며, 2007년 주차장과 중앙광장 진입로 272m, 자연휴양림 연계 산책로 323m가 조성되었다. 2009년에는 상징탑이 조성되었다.

1918년부터 1994년까지 제주도내외에서 발간된 각종 자료에서 ‘보천교의 난’으로 서술되던 것이 1991년 8월 ‘정구용 재판기록 판결문’을 김봉옥 씨 등이 발굴함으로써 비로소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김봉옥씨가 윤봉택 씨에게 법정사 항일운동관련 자료를 넘겨주고, 윤봉택씨는 이 자료를 갖고 항일인사 후손을 찾아 구술 채록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 의열사 터를 잡는 것부터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한 성역화 사업까지 진행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였다. 기념탑에는 불교가 운동을 주도했다는 상징성을 표현하기 위해 세 개의 기둥 위에 목탁을 새겨 넣었다. 이처럼 윤봉택씨는 법정사 항일운동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상징성을 지닌 건축물 설계부터 완공까지 책임을 완수했고, 지금도 법정사 유적지를 찾는 이들에게 알림이를 자처 하고 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과 관련하여 근거자료, 구술, 기념사업 등에 대해 윤봉택씨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분은 없을 것이다.

윤봉택씨는 제3자와 자료 공유도 흔쾌히 하여 법정사 항일운동을 널리 알려왔다. 그런데 자료가 제3자에게 제공되면서 ‘법정사 항일운동’의 왜곡이 시작되었다. 어느 연구자는 법정사 창건자를 비롯해 법정사 항일운동과 전혀 무관한 분을 관계자로 설정하기도 하였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법정사 항일인사 만들기’를 하는가 하면, 법정사 항일 인사의 전후 생애를 무리하게 설계하여 법정사 항일운동의 순수성을 훼손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반면 보천교 항일운동 연구자들은 비교적 치밀한 자료 수집과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1918년 제주항일독립운동을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즉 불교계 항일운동으로 세상에 알린 가장 큰 공로는 김봉옥 씨와 임혜봉 스님, 그리고 윤봉택씨와 서귀포시청에 있다. 불교계는 이들의 공로를 중시하고 치하하여야 한다.

앞으로 ‘무오 법정사 항일항쟁 운동’으로 계속 명명되기 위해서는 불교계 연구자들이 객관적 시각에 입각한 치밀한 자료 분석과 근거자료 보충이 요구된다.

[불교신문3636호/2020년12월9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