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천 내원궁 미륵불이 지키고 약사여래 보호하는 名山
도솔천 내원궁 미륵불이 지키고 약사여래 보호하는 名山
  • 박부영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20.12.05 10:50
  • 호수 3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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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伽藍과 뫼] ⑬ 수락산과 암자들
용굴암 미륵부처님이 노원벌과 멀리 서울을 바라보며 서있다. 산 아래는 아파트 촌이 들어섰다.
용굴암 미륵부처님이 노원벌과 멀리 서울을 바라보며 서있다. 산 아래는 아파트 촌이 들어섰다.

석림사를 벗어나면 정상으로 향하는 계곡이다. 
가파른 길이 2km넘게 이어진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그대로 
수락산 능선은 더 할 나위 없는 환희심을 준다. 
앞에는 장엄한 도봉산이 뒤로는 
노원벌에 가득 들어선 아파트 촌이, 
그 멀리 남산 청계산 관악산, 지척의 불암산이 손짓한다. 
북으로 아파트촌을 끼고 
끝없이 이어지는 산이 어우러져 감탄사가 절로 난다. 

수락산 안내도.
수락산 안내도.

 

◇ 동봉 김시습 서계 박세당, 그리고 석림사

‘명산(名山) 명찰(名刹)’ 법칙에 하나 더 추가 한다면, ‘사람 있는 곳에 절 있다’ 정도가 아닐까. 수락산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사람 두 명 중 한 명이 사는 수도권을 대표하는 산이 수락산이다. ‘물이 떨어진다’는 이름처럼 곳곳에 폭포와 계곡을 자랑한다. 수락산 계곡을 비롯 벽운동, 금류, 동막골, 청학동 등 아름다운 계곡에다 금류동 은선동 옥류동, 은선동 천문 등 수많은 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계곡과 능선을 따라 곳곳에 전통과 풍광을 자랑하는 가람이 자리 잡고 있다. 신라 시대 고찰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사연을 지닌 절이 수락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불자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지난 11월24일 25일 이틀간 수락산을 찾았다. 먼저 들른 곳은 서울 도시철도 7호선 종점 장암역에서 수락계곡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수락산 서편이다. 평소 답지 않게 물이 많이 흘러내려 시원하다. 추워진 날씨에 진눈깨비라도 내릴 듯 잔뜩 흐려 있다. 

식당가를 지나 산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맞는 것은 석림사(石林寺)다. 한글로 쓴 ‘수락산석림사’ 일주문이 어서 오라는 듯 손짓 한다. 일주문 앞에는 조선후기 정치인이자 학자였던 서계 (西溪)박세당(1629∼1703)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석림사는 서계와 연관 있다. 

박세당은 조선 성리학 태두 송시열의 서인계열이면서도 주자를 비판했다. 그로인해 그는 성리학계가 이단으로 삼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환멸을 느끼고 수락산으로 들어온 이유다. 박세당은 뛰어난 재능에다 학문적으로 열려있던 김시습을 흠모했다. 석림암도 김시습을 추모하며 지었다. 김시습은 10년간 수락산 동편에 칩거했다. 내원암 근처로 추정한다. 지금 수락산에는 매월당 정자로 남아있다. 수락산에 들어온 김시습은 동봉(東峯)이라고 호를 지었다. 동봉을 흠모한 박세당은 수락산 서쪽에 칩거하며 서계(西溪)라 했다. 
 

장암에서 올라가다 만나는 석림사 전경.
장암에서 올라가다 만나는 석림사 전경.

석림사의 원래 이름은 석림암이다. 반남박씨 재궁절이어서 석림사 보다 ‘박씨네 재궁절’이라는 말이 더 통용되었다고 한다. 서계 선생 문집 ‘서계집’ 등에 의하면 1671(조선 현종12년)년 서계의 시주금으로 석현(錫賢), 치흠(致欽) 두 스님이 창건했다. 서계가 ‘석림암’이라 이름 짓고 ‘석림암기’와 ‘석림암상량문’을 지었다. 

석림사는 이후 1745년 을축년 7월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익명의 스님이 복원한 뒤 현재 이름을 지었다. 6·25 전쟁 때 전소당한 것을 비구니 상인스님이 1958년 상좌 보각스님과 함께 이 절터에 들렀다가 반남 박씨 문중과 인연으로 석림사 중창 원력을 세워 1960년부터 불사에 착수했다. 5년여 만에 낡은 인법당을 헐고 극락전 칠성 산신각 독성각 요사채 창고 등을 신축했다. 1973년 상인스님이 입적한 후 제2대 주지 보각스님이 교량공사와 진입로 포장을 하고 옛 건물을 증개축하였으며 1991년 지장보살 입상을 세웠다. 봉연유치원 수자타합창단 등 지역 문화 포교에 매진했다. 2대에 걸쳐 대대적인 불사를 마치고 2013년부터 제3대 주지 능인스님이 취임하여 수락산을 찾는 서울 경기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지역에 부처님 가르침을 전달하는 가람으로 자리했다.
 

수락산 정상.
수락산 정상.

◇ 흥국사 옛 이름에서 나온 수락산 

수락산 정상 부근은 크고 가파른 암벽 천지다. 바위 마다 사람들이 생김새에 따라 이름을 지었다. 기차바위, 치마바위, 코끼리 바위, 철모바위, 탱크바위….

이 땅 명산이 그러하듯 수락산도 불국토다. 수락산이라는 이름은 흥국사 옛 이름 수락사(水落寺)에서 유래했고, 곳곳에 절이다. 그 압권은 동막골이다. 아예 마을 전체가 절이다. 봉우리에는 불교 지명이 붙었다. 가장 높은 봉우리 수락산 정상, 동북방향 4개의 능선이 만나고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곳에 자리한 도솔봉, 정상 아래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청학계곡의 향로봉, 미륵봉, 불국정토가 수락에 펼쳐졌다. 

수락이 펼치는 불국토는 미륵세상이다. 도솔봉 아래는 용화세상을 여는 용굴암이 있고, 정상 아래는 도솔천 내원궁이, 절 곳곳에 미륵불이 정토를 발원한다. 색계 무색계 욕계 삼계(三界) 중 네 번 째 하늘, 도솔천(兜率天)에는 미륵불이 계시니 이 땅의 중생들은 수락산에 그 염원을 새겼다.

도솔천에는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어 내원은 미륵보살이 머무는 정토며, 외원은 수많은 천인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미륵은 도솔천에서 천인(天人)을 제도하며 인간세에 하생(下生)하여 성불할 날을 기다린다. 그러나 미륵은 구세주가 아니다. 미륵은 더러운 세상을 구제하러 이 땅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참회하고 계를 지키고 십선(十善)을 행하여 인간 스스로 맑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면 등장하여 증명할 뿐이다. 
 

내원암 석불.
내원암 석불.

◇ 조선왕실 보호 받은 내원암

수락산 정상 아래 향로봉을 바라보는 양지 바른 곳에 내원을 그렸다. 정상에서 내원암으로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고 미끄럽다. 벌써 얼음이 얼고 찬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내원암은 아늑하다. 청학계곡 옆 작은 평지에 살포시 앉았다. 겨울 채비가 한창이다. 법당 바깥에 비닐을 씌우는 인부들 손길이 분주하다. 비구니 스님 두 분이 산을 내려간다. 합장 인사하자 “안녕히 다녀오시라” 축원하셨다.

영산각 앞 미륵불이 이 곳이 미륵불이 계시는 도솔천 내원임을 말하는 듯 하다. 내원암 미륵불은 수락산 바위를 깎아 조선시대 조성했다. 6·25 때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할 때 땅속에 묻혀 있던 불상을 발견해 다시 세웠다. ‘경도의 갓바위’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수많은 영험담이 전해오는 기도도량이기도 하다. 

내원암에는 왕가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용파스님이 내원암에 주석했는데, 조선 정조가 대를 이을 세자가 없음을 걱정하는 것을 알고 삼각산 금선암의 농산스님과 상의해 농산스님이 법력으로 열반에 들어 왕세손(순조)으로 환생했다는 이야기다. 그 공덕 덕분에 왕실의 도움으로 사세를 확장했으며 절 이름을 ‘승절’이라 불렀다. 

용파선사와 농산스님의 인연담은 팔공산 파계사와 성전암에도 전해온다. 조선의 왕이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다 도력 높은 용파선사에게 청했더니 북한산 금선암의 농산스님이 가부좌 한 채로 열반에 들어 왕자로 환생했다는 이 이야기는 등장하는 왕만 다를 뿐 줄거리는 같다. 사실 여부를 떠나 조선 후기 왕실과 사찰의 돈독한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다. 임진 병자 두 번에 걸쳐 오랑캐에 유린당한 조선은 더 이상 왕조의 나라가 아니었다.

권력은 성리학 관료들에게 넘어갔다. 그 시작이 숙종대였으니 그 때부터 전쟁으로 소실된 많은 사찰이 복원됐다. 권력을 장악한 성리학자들은 사찰을 모조리 없애려 혈안이었고 왕실은 이를 지켰다. 선종 수사찰 봉은사, 교종 본찰 봉선사, 성남 봉국사 등 숱한 명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 위기를 고승의 법력과 왕실의 보살핌으로 극복했다. 수락산과 팔공산을 비롯한 많은 산과 가람에 전해오는 전설 같은 영험담은 그 흔적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조선이 일제에 넘어가고 이 땅의 많은 귀족 양반이 매국의 대가로 호의호식했다. 그 중에는 조선왕실이면서 친일에 앞장선 이들도 있었다. 그 중 한 일가가 내원암 인근 토지 소유주라며 내원암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오랫동안 송사에 휘말렸다. 결국 사찰의 승소로 막을 내렸지만 씁쓸하다. 

내원암을 나와 다시 정상에 올랐다. 태극기 휘날리는 정상을 내려와 도솔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애써 가파른 암벽을 타고 정상에 올라야 도솔봉 표지석을 대한다. 도솔봉 꼭대기는 가파르고 내려서면 길이 사방으로 열렸다. 왼쪽으로 가면 불암산과 흥국사, 아래로 가면 용굴암 학림사를 거쳐 당고개 역이다. 오른쪽으로 향하면 수락산역.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솔천에 머무시다 마하부인을 빌어 이 땅에 나투셨다고 전한다. 
 

용굴암 모습.
용굴암 모습.

◇ 자연동굴에 조성한 용굴암

용굴암(龍窟庵)으로 간다. 도솔봉 아래 용화세상을 그리고자 했는지 미륵불이 반긴다. 부처님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니 롯데 타워가 보인다. 해질녘 용굴암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아름답다. 하늘에는 금색 띠가 선명하고 안개인 듯 구름인 듯 가린 아래로 아파트가 숲을 이뤘다. 도솔봉 아래 허공에다 축대를 쌓고 기둥을 받쳐서 전각을 세웠다. 

용굴암은 1878년 천연 자연동굴에 부처님을 봉안하고 정진하는 자연동굴에서 출발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여주로 피신 가던 중 잠시 몸을 의탁하여 기도했는데 무사히 환궁 한 뒤 그 인연공덕으로 절을 후원해 사세가 커졌다고 전한다. 매년 음력 중양절 명성황후를 위한 다례재를 지낸다.

한국전쟁으로 폐사 위기에 처한 것을 혜암스님이 법당을 중수하고 범종각을 지었으며 1983년 재정스님이 대웅전과 나한전을 중수하고 석조석가모니불 좌상과 16나한상을 봉안했다. 1991년 미륵불상을 모셨다. 각범스님이 주석하며 대웅전과 육화당을 복원 중수하는 등 도량을 일신했다. 지금은 중앙종회의원 일감스님이 주석한다. 

용굴암의 기원이 되는 나한전 자연석굴에 참배하고 하산길을 잡았다. 학림사 까지 내려가는 길이 잘 정비돼 있었다. 용굴암 1.6km 아래 자리한 학림사(鶴林寺)는 수락산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저녁 공양을 짓는 지 굴뚝에서 연기가 나온다. 계곡을 따라 위로 일직선으로 배치한 학림사는 정갈했다. 수락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규모도 크고 역사도 깊다.
 

학림사.
학림사.

◇ 정갈하고 웅장한 천년고찰 학림사 

신라 문무왕 11년(671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학림사는 고려말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했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됐다가 인조 2년(1624년) 무공화상이 사찰을 중수하여 규모를 갖춘 후 1918년까지 5차례에 걸쳐 보수와 중수가 이루어졌다. 조선조 때 오백나한기도도량으로 유명한 기도처였다. 상궁들만 드나들며 왕가의 번창을 발원한 자복사찰이었다. 

학림사 입구에 유래를 알 수 없는 부도 2기 주인이 상궁이라는 설이 있다. 산세 모양이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학지포란(鶴之抱卵) 형국이라 해서 학림사(鶴林寺)라 했다. 학림사 일출이 하도 장관이어서 노원 9경으로 삼았다. 학터에서 공부하면 스님은 활연개오(豁然開悟)하고 일반인은 장원급제한다는 속설이 있어서인지 학림사에서 고시 공부하여 판검사 된 이가 많다고 전한다. 학림사를 나오는데 절 입구에 약사전이 있다. 조선시대 석조약사불을 모신 이 곳에서 기도하면 병이 낫고 소원이 성취되는 영험이 깊다하여 원근에서 많은 불자들이 찾는다. 

6·25 전쟁 때 대부분 불탄 사찰을 오늘날 가람으로 일신한 분은 금산사를 본사로 둔 도원스님과 현 주지 덕오스님이다. 어린이집 유치원 불교회관을 운영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앞장서는 학림사는 노원지역 포교를 책임진 천년고찰이다. 기도와 부처님 찬탄이 끊이지 않는 아름다운 절이 산중에서 영원히 빛나기를 염원하며 산을 내려왔다. 

다음날 다시 수락산을 찾았다. 이번에는 당고개역에서 시작했다. 먼저 찾아간 곳은 도안사다. 당고개역에서 내려 동막골로 접어들었다. 일붕스님 시비를 새긴 절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자 108 순례 차량이 서 있다. 도안사는 현대 성지 순례 새 역사를 창조한 선묵스님이 새롭게 일군 가람이다.

경내는 108 순례 역사와 의미 동참자를 새긴 비석과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조선중기 창건했다고 전하는 도안사는 선묵스님이 1976년부터 대웅전 미타전 천불전 산신각 범종각 등을 불사하고 108산사 순례 10년을 기념하는 108 평화 보궁을 조성했다. 평화와 행운의 길조라는 관음조 파랑새가 나타났다는 바로 그 절이다. 
 

도안사 안에 조성한 108보궁.
도안사 안에 조성한 108보궁.

◇ 108산사 보궁 모신 도안사

108산사순례는 선묵스님이 도선사 주지로 재직하던 2007년 도선사를 시작으로 108 산사를 순례하여 2015년 10월 도안사를 마지막으로 1차 회향한, 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성지순례다. 108산사순례는 수많은 동참인원으로 인해 가는 곳 마다 특산물시장이 활기를 띠어 지자체장이 나서 서로 순례를 유치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정월 삼사순례, 보궁순례, 해외 성지순례에 머물던 한국불교의 순례 역사가 이후 전 사찰로 확산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역사와 동참자가 도안사 108순례 보궁에 새겨져 있다. 

수락산에는 골짜기 마다 수많은 절이 있다. 당고개 역에서 도솔천으로 향하는 동막골은 불교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을 전체가 절이다. 조계종 태고종 조동종 그리고 이름 없는 종단 등 수없이 많은 절이 줄지어 서있다. 골짜기로 접어들수록 더 많은 절이 반긴다. 규모와 역사, 종단이 어디든 이 곳 사찰은 묵묵히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고락을 함께 했다. 그러나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집도 사라지고 사람도 떠난 듯 을씨년스럽다. 

암자를 찾아 도솔봉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이에 어느 새 해가 저문다. 계곡으로 내려서는데 뒷덜미가 서늘해져 돌아보니 들개 5마리가 먼발치서 노려보며 따라온다. 사람들이 떠나면서 버림받고 산으로 올라와 야생개가 된 후세들이다. 깜빡 잊고 있었다. 산은 사람도 절도 주인이 아니다. 길이 없어도 어디든 빠르게 갈 수 있는, 그들이 주인이다. 사람은 잠시 머무를 뿐이다. 주인을 피해 조용히 산을 내려왔다. 
 

흥국사 전경.
흥국사 전경.

◼ 수락산 대표하는 흥국사 

옛 이름 수락사에서 山名 유래
‘약사여래불’ 영험담 유명해

흥국사는 수락산을 대표하는 가장 크고 유명한 고찰이다. 덕절(德寺)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 말사로 신라 진평왕 21년(599년) 원광(圓光)국사가 창건하여 수락사(水落寺)라 하였다. 수락산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흥국사가 지금처럼 크게 일어난 것은 1568년 선조가 등극하자마자 자신의 친부 묘를 이 절 아래로 이장하여 원당으로 삼으면서다. 

나라를 왜구에 빼앗긴 치욕을 겪고도 반성하기는커녕 조선을 구한 이순신을 질투하여 조선 역대 임금 중 가장 무능하다고 지금도 욕먹는 선조는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제로’ 였지만 명종이 후사를 두지 못하고 붕어(崩御)하는 바람에 등극할 수 있었다. 선조는 죽은 아버지가 능이 아니라 묘(墓)로 불리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왕실에 땔감을 대는 동대문 산 꾼들에게 ‘덕능’에서 가져왔다면 값을 후하게 치고 ‘묘’에서 가져왔다면 아예 사지를 않았다 한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덕능이라 부르고 그 원당인 흥국사를 ‘덕절’이라 했다. 선조의 염원이 간절했던가? 지금도 이 일대 명칭이 온통 덕능길이다. 

선조가 편액을 하사하고 개칭한 흥덕사는 인조 4년 1626년 다시 흥국사로 바뀌었다. 정조 대에 왕실의 시주를 받아 기허(騎虛)대사가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무슨 연유인 지 이후 여러 차례 불타고 다시 중수하는 일이 반복됐다. 1790년(정조 14)에는 봉은사(奉恩寺)·봉선사(奉先寺)·용주사(龍珠寺)·백련사(白蓮寺) 등과 함께 나라에서 임명하는 관리들이 머무르면서 왕실의 안녕을 비는 오규정소(五糾正所)의 한 사찰로 채택되었으니 왕실의 보호가 각별했다.  

흥국사는 탱화로 명성을 날린 절로 유명하다. 흥국사 출신 불모(佛母)는 나라전체에 이름나 당시 불모 모두는 이곳 흥국사를 거쳐 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며 심지어는 흥국사의 공양주, 부목까지도 탱화를 잘 그렸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약사도량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출가한 딸이 있어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 정진했는데 건강을 잃은 부친을 위해 약사여래를 조성하여 정릉 봉국사에 모시고 기도드려 그 효험으로 병이 나았다. 소문이 퍼져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사세가 날로 커졌는데 홀연히 약사여래가 행방을 감췄다. 행방이 묘연하던 약사불을 어느 시냇가에서 발견해 아무리 옮기려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유명한 절 이름을 차례로 대던 중 “흥국사로 가시겠습니까?” 하니 꿈쩍 않던 부처님이 번쩍 들렸다. 그 약사여래불이 만월보전에 모셔져 있다. 

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634호/2020년12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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