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 연말 ‘보시 리스트’ 작성해 볼까요?
[문화人] 연말 ‘보시 리스트’ 작성해 볼까요?
  • 이소영 시인
  • 승인 2020.12.02 11:06
  • 호수 3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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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 동안 고마움 느낀 사람들에
나만의 ‘보시데이’ 정해 ‘보시행’
작지만 기쁜 마음, 사랑의 결실
당신의 보시리스트엔 어떤 향기?
이소영
이소영

요즘 문화 키워드는 레트로(복고주의)다. 그래서 드라마나 노포 식당, 옷이나 책, 인테리어 등에서 그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내게 레트로는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이다. 1980년대 청춘 남녀들의 연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소위 칼질한다는 경양식집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그때 채 썬 양배추 위에 뿌려져 나온 분홍빛 새콤달콤한 그 드레싱과 함께. 요즘엔 샐러드 드레싱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결정 장애가 일어날 정도이다. 

그 중 사우전드 아일랜드는 드레싱 역사의 산 증인이자 아름답지만 슬픈 사연을 지닌 드레싱으로도 유명하다. 캐나다 킹스턴에 있는 18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천섬(Thousand Islands)을 여행할 때 간 하트섬 주인인 조지 볼트는 사랑하는 아내가 아파서 식욕이 떨어지자 요리사에게 맛있는 소스를 개발하게 했는데 그 드레싱이 바로 천섬에서 따온 사우전드 아일랜드였다. 그러나 아내는 죽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한 볼트는 그 섬을 떠난다. 

이렇듯 아름답지만 슬픈 선물인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에 담긴 볼트의 아내 사랑이나 그 옛날 우체부 아저씨에게 미숫가루나 설탕물 한 잔을 타주던 어머니들의 마음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무슨무슨 데이들이 많지만 거기에는 자본의 논리만 있을 뿐 정성 어린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아 아쉬움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한 해 동안 고마운 마음, 따스한 사랑을 느낀 대상에게 나만의 ‘보시데이’를 정해서 ‘생활 속 레트로 보시’를 실천하겠다는 작은 결심을 해본다.

읽은 책 중 인상 깊었던 문장을 독학으로 배운 캘리그래피로 써서 코로나로 얼굴 보지 못하는 지인들에게 보내기, 코로나를 함께 이겨내고 있는 반려견 코코에게 직접 만든 면 마스크 씌워주기,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완성한 마분지 그림을 액자에 넣어 걸어주기, 산책길에 주운 낙엽들로 만든 책갈피를 자주 들르는 북카페에 갖다 주기,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니 그 소리가 미안하다며 사과를 보내 준 위층 할머니에게 직접 담근 유자청 보내기, 수능을 앞둔 조카에게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 노래 선물하기, 꼭 필요한 물건을 기분 좋게 배송해 주는 택배 아저씨의 건강을 걱정해서 총알 배송 한 번 안하기, 냉동고에 쌓여 있는 아이스 팩을 모아 단골 횟집에 갖다 주기, 매일 안전하게 출퇴근 시켜준 고마운 애마를 셀프 세차장에서 말끔하게 목욕시키기, 선물로 받았지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스카프는 멋지게 코디할 그 누군가를 위해 당근마켓에 무료로 내놓기 등등. 

작지만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서 건네는 작은 선물들. 그렇지만 그 작은 선물이 받는 이에게는 사랑의 결실로, 든든한 응원으로, 뿌듯한 보람으로, 은은한 격려로 크게 다가갈 것이다. 

자, 그럼 메모장에 내 가슴을 뛰게 하거나 내 마음을 토닥거려 준 대상들을 써 보자. 오랜만에 여유롭게 돌아보는 그 순간이 주는 즐거움 또한 내가 나에게 주는 보시라 생각된다. 올해 남은 시간은 줄어들지만 보시 리스트가 늘어날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올 한해 기쁘고 건강하게 잘 보냈다는 증표 같아서. 내년 이맘때쯤 오늘 쓴 보시 리스트가 당신에게는 또 하나의 뜻깊은 레트로가 되리라. 문득 여러분의 보시 리스트엔 어떤 빛깔과 향기, 감촉이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지 무척 궁금한 늦가을 저녁이다. 

[불교신문3634호/2020년12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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