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업의 성벽 마주한 순간
삶이 죽음보다 더 무서운 족쇄

혜인스님
혜인스님

내 업(業)을 말해주는 선배를 만났다. 그는 선배답게 묻지도 않은 내 업에 대해 굉장히 현실적으로 조언해주었다. 처음 만난 자리였고, 선배라는 것도 대화 중에 알게 됐지만, 그는 내가 후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더 많이 공부하고 더 깊이 수행한 듯이 얘기했다. 조언을 듣고 나니 마음속에 굳은 다짐 같은 것이 생겨났는데, 그건 사실 선배의 조언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 틀려서도, 그가 선배답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다 맞는 얘기여서, 참 선배다운 분이어서, 그래서 더 그와는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결심 같은 것이 섰다. 그렇게 업을 잘 알고도 결국 업대로 사는 것에 너무 오래도록 익숙해진, 그래서 업이 삶의 현실이 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아무리 업을 이기려 해도 결국 지고 다시 돌아오게 될 거라 말했고, 그건 지금의 나로서는 너무도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럴 바엔 지혜롭게 업을 받아들여,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성취를 이뤄야 한다고 힘주었다. 그가 조언하는 희망찬 미래는 마치 업 위에 성을 쌓는 일처럼 들렸고, 그 미래의 성(城)이 현실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던 건 그 일에 내가 참 자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대로 살면 진짜 그대로 될 것만 같아서, 견고한 업의 성 안에 갇혀있을 내가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누구나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다니. 언젠가 불교 만화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내용이었다. 나중에 존재에 대한 욕망이 곧 번뇌의 족쇄란 걸 배우고 나서야, ‘아, 나도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는 거구나. 살고 싶은 업마저 풀어버렸으면 진즉에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 선배가 보여준 견고한 미래의 성벽을 마주하는 순간 죽음보다 더 두려운 족쇄가 생겨버렸다.

아무리 싸워도 이길 수 없고, 싸울수록 더 견고해지는 것. 그래서 지면 편해지는 것. 그렇게 모두가 지기 때문에, 져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삶과 싸워 이긴다는 건 죽는 거니까, 오히려 죽음이 문제라면 문제지, 살고자 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없는 거니까. 그래서 모두가 문제 삼지 않는 삶. 삶이 곧 죽음보다 두려운 족쇄였다.

삶이 두려워진 건, 그 삶의 에너지가 너무도 강렬하고 진해서, 도저히 나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만 굶어도, 하루 이틀만 안 자도 마치 죽을 것 같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이 미친 듯한 생명의 에너지. 아이고 업아, 하루 이틀 안 살아도 안 죽어. 싫다고? 멈출 수가 없다고? 그럼 죽든지 말든지. 난 떠날 테니까.

요새 중인 나보다 불교계 유명인사가 되신 우리 아버지는 갑자기 머리를 깎고 나타난 큰아들에게 울며불며 뒤로 넘어가셨다. “네가 떠나면 난 죽어버리겠다.” 업을 녹인답시고 온 힘을 다해 그 강렬한 에너지를 마주하다 보면, 그 강렬함에 오히려 내가 녹는데, 그럴 때마다 가끔 왜 그때 일이 떠오르는 건지. 난 조용히 대답했다. “죽으세요. 전 갑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간다면, 그동안의 모든 삶을 또 버려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더 이상 종단에 소속될 수 없을지도, 중으로 살 수 없을지도, 아니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그치만 싸워 이길 수 없다고 지고 살 바엔, 뒤에서 당하더라도 차라리 등지고 떠날 수밖에.

이 서툰 다짐보다도 무서운 건, 우습게도 다짐은 누구에게나 너무 쉬운 일이라는 것. 결심을 못 해서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없잖나. 문제는 현실이지. 이렇게 어리석게도 900일이 한참 지나서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다고 다짐한다.

[불교신문3633호/2020년11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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