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지혜로 피안에 이르는 ‘가르침’
제법의 공함 직관하는 것이 곧 반야


2009년 선운사 강주시절 낙산사서 관음재일 법문
법상에서 태전선사 일화 게송 읊으면 ‘눈물바다’…

선행스님
선행스님

자세히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곧 ‘위대한 지혜로 피안에 이르는(이르게 하는) 핵심적인 가르침’이라 정리해 본다. 요즘 불교대학에서 특강으로 <반야심경>을 강의하고 있다. 2시간에 걸쳐 3차례를 강의해야 하는 일정이 예정돼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주도면밀하리만큼 예습을 한다. 강의하며 배우는 심정에 환희심마저 든다. 누울 자리가 있어야 눕게 된다는 말처럼 마치 시절인연을 만난 듯, 800명이 넘는 12반에 특강을 포함하면 2반을 빼고는 모두 강의하고 있다. 

구마라집의 <마하 반야바라밀다 대명주경>과 현장법사의 <반야 바라밀다 심경>의 경 제목을 합성하여 <마하 반야 바라밀다 심경>으로 유통된다는 내용을 필두로, 핵심사상인 공(空)은 연기(緣起)의 원리인 상의성(相依性), 곧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기에 결국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을 공(空)이라 하는데, 바로 제법(諸法)의 공함을 직관(直觀)하는 것이 반야(般若) 곧 사물의 이치와 실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라고 정리했다.

또한 오온(五蘊)의 공한 이치를 조견(照見) 곧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른 견해로 통찰하면 일체 괴롭고 불행한 일을 통과하듯 지나게 되어 색과 공이 다르지 않고 색과 공이 같다는 도리를 알게 된다는 대목에 이르러, 당나라 때 홍련이라는 기생과 태전선사의 일화를 든다.

10년 동안 축령봉을 내려가지 않고 (十年不下祝靈峯) 
정진하여 색과 공의 도리 알았노라 (觀色觀空卽色空) 
내 어찌 수행한 이 한 몸을 (如何一滴曹溪水) 
홍련의 품속에 안길 수 있으리오 (肯墮紅蓮一葉中)

이 게송을 접한 한유는 그동안 불교를 비방하던 태도를 돌이켜 이후로는 불교를 홍포했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노래를 한 곡 곁들인다. 홍련의 파계시키려던 마음에는 어느 정도 연정을 품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으로. “눈물이 흘러 나의 볼이 젖어와도 그대 향한 마음은 지울 수는 없는데 우린 정말 헤어지나요~~”(김승덕 ‘우리사랑’)

가끔 뒷말을 듣는다. 너무 슬퍼 눈물을 훔쳤다고. 사실은 2009년 선운사 강원의 강주 시절 낙산사에 1년 동안 관음재일마다 법문을 했다. 전국에서 30대가 넘는 버스로 1000여 명이 넘게 참석한 법회의 법상에서, 위 게송을 소개하며 그 노래를 불렀다. 그때가 5월 중순이었는데 대부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후 1주일쯤 지나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여 법회에 참석했던 불자들은 그 노랫말에 감정이입이 되었단다. 해서 6월 달 법문하는 중간에 그 노래를 다시 했다. 눈시울과 훌쩍이는 소리에 그만 법상에서 눈물을 훔치며 내려온 기억이 있다.

어찌 출가인이 강의나 법회에서 노래를 드러내서 한단 말인가. 그렇다. 조심스럽다. ‘방안 풍수’라는 말처럼 어설픈 줄을 안다. 해서 나름 생각을 한다. 노래하되, 곡조의 리듬은 가능하면 민둥하게. 노랫말의 감정은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삭이듯이. 그리고 전적으로 노래하는 무대는 지양하고 한정된 장소에서 자연스레 한다는 지론이다. 어쨌든 조심스럽다. 이제는 2시간 강의 중간에 한 곡 하는 것이 굳혀지듯 되었다.

화두에 개구즉착(開口卽錯) 폐구즉실(閉口卽失)이라 했다. 글자대로라면 말을 해도 잘못이요. 말하지 않아도 그르친다는 것이다. 발상을 해 본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그르치는 것이요. 그렇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때 말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이것이 반야바라밀 곧 모든 것은 실체가 없이 연기하는 것으로 텅 빈 것임을 바로 알아 깨닫고 이를 삶 속에 실천하는 일이겠다. 

[불교신문3633호/2020년11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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