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얻었고 하나는 잃었도다”

해인총림 방장 원각스님

법안문익(法眼文益)선사가 어느 날 문에 드리워진 발(簾)을 가리켰습니다.
그 때 두 납자가 함께 가서 동시에 주렴(珠簾)을 걷어 올립니다.
이에 선사는 말했습니다.

“일득일실(一得一失)이로다.
하나는 얻었고 하나는 잃었도다.”

선사께서 강소성 승주(昇州) 청량원(淸凉院)에서 법을 펴던 시절 어느 날 손가락으로 가만히 발(簾)을 가리켰습니다. 이처럼 선문(禪門)에서 많은 공부인들이 발(簾)을 통해 안목이 열렸습니다. 장경혜릉 선사 역시 발(簾)을 말아 올리다가 바깥 경계를 보고 깨달았다고 고봉원묘 선사는 ‘선요(禪要)’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덕산선감 선사도 방장실에 쳐진 발(簾)을 경계로 들어오고 나가면서 안목이 바뀝니다. 숭신용담선사 방에서 발을 걷고서 문밖으로 나왔으나 바깥은 칠흑처럼 캄캄했습니다. 다시 발을 걷고 방 안으로 들어오자 용담스님은 지촉(紙燭)에 불을 붙여 덕산스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덕산스님이 받으려고 하는 찰나 용담은 ‘후~’ 하며 꺼버렸습니다. 그 순간 덕산스님은 안목이 활짝 열렸습니다.

본래 주렴 안은 밝았고 주렴 밖은 어두웠습니다. 하지만 찰나에 주렴 안과 주렴 밖이 동시에 밝아졌던 것입니다. 염내사(簾內事)와 염외사(簾外事)가 결코 다르지 않았습니다. 덕산과 장경은 주렴을 사이에 두고서 일체의 현상세계(事法界)인 차별세계의 망상을 걷어버리고 이법계(理法界)인 절대평등의 경지를 체득한 것입니다.

법안문익 선사는 함께 발(簾)을 걷어 올린 두 납자를 향해 “일득일실(一得一失)이로다. 하나는 얻었고 하나는 잃었도다”라고 말하면서 상반된 언어로 일갈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다는 것입니까? 만약 이 질문에 대하여 정법에 대한 안목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문익선사의 낙처(落處)를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산승이 이렇게 제창(提唱) 함에도 얻음도 있고 잃음도 있으며 결제대중이 이렇게 모였다고 해도 얻음도 있고 잃음도 있을 것입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뒤로부터 문득 얻음과 잃음이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발(簾)을 가리키기 이전의 소식을 알아차려야 비로소 득실의 시비가 완전히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3조 승찬선사는 ‘신심명’에서 “득실시비(得失是非)를 일시방각(一時放却)하라. 얻음과 잃음 옳음과 그름을 일시에 놓아버려라. 하고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양변을 여의면 통연히 명백하다”고 했습니다.

결제 90일 동안 또 다른 모든 시비와 득실을 떠나 오롯하게 애써 정진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해야 되겠습니다.

松直棘曲 鶴長鳧短
羲皇世人 俱忘治亂

소나무는 곧고 가시나무는 굽었으며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다리는 짧구나.
천하 성군시절의 사람들은
태평성대도 난세도 모두 잊는구나.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