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정] 베르길리우스와 윤회
[수미산정] 베르길리우스와 윤회
  • 황건 논설위원 ·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20.11.26 10:36
  • 호수 3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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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불교에서는
권선징악을 넘어선
해탈의 차원에서
윤회설이 강조됐다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므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나는
열반이나 극락의 왕생 등을
보다 중요시 했던 것이다
황건
황건

지난해 로마를 방문했을 때 보르헤세 미술관을 관람했다. 여러 그림 중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한 편의 재난 탈출 그림이었다. 페데리코 바로치가 그린 ‘불타는 트로이로부터 도망치는 아이네아스’였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장수로서 그리스 군을 막아내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목마 안에 숨어있던 그리스군에 의해 트로이 성은 함락됐다. 나중에 연합군에게 패한 트로이인들을 이끌고 그는 새로운 터전을 찾다가 만난 무녀이자 예언자인 시빌레를 찾아가 죽은 아버지 안키세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혼에게 자신과 트로이인들의 운명에 대해 묻고 싶었다. 저승 세계의 망각의 강가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는지, 또한 죽은 후 정화 과정을 거친 영혼이 어떻게 다시 인간의 육체를 얻어 환생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흙이 적으면 영혼이 순수하고, 흙이 많으면 불순하다. 불순한 영혼은 죽은 다음에 정화될 수 있다. 정화된 영혼은 망각의 강에서 전생의 기억을 씻고 육신을 얻어 지상으로 돌아간다. 육신조차 받지 못하는 더러운 영혼은 동물로 환생한다. 이것이 윤회전생(metempsychosis)이다.”

이 서사시를 쓴 베르길리우스는 예수 탄생 약15년 전에 사망했다. 그 당시에 로마인들은 이미 윤회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인도로부터 전해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로마시대에는 영혼이 재생한다는 관념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윤회설이 시작된 인도에서는 어떠했을까? 우파니샤드와 초기불교에서 업과 윤회에 대해 이거룡 교수는 우파니샤드(BC 600~300)에서 형성된 업과 윤회의 이론이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 시와 입적 후 약 100년 정도까지 초기불교시대에 변용(變容)됐다고 했다.

붓다는 엄연히 윤회를 전제로 설법을 했으며,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입장은 무아설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했다. 윤회의 주체 문제를 설명함에 있어서 불교는 ‘새(鳥) 없는 비행(飛行)’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반면에, 우빠니샤드 전통은 ‘날지 못하는 새의 비행’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이병욱 교수에 따르면 위진남북조시대에 승조(384~414)와 여산혜원(334~416)에 의해 중국불교에서는 업과 윤회의 개념이 수용됐다. 승조는 ‘물불천론’에서 행위의 인과를 설명하고자 했고, 여산혜원은 <삼보론>에서 과보를 받는 주체가 없고 과보를 받는 것은 마음인데 이 마음에도 정해진 것이 없다고 했다.

수당시대를 거치면서 두 가지 양상으로 분화됐는데, 종파불교(천태, 화엄, 선)에서는 업과 윤회의 역할이 축소됐으나, 중국찬술경전에서는 업과 윤회의 개념이 강조된다고 했다. <능엄경>에서는 업과 윤회의 중국적 변형을 찾아볼 수 있고, <부모은중경>에서는 업과 윤회에서 효를 강조하고 있으며, <불설예수시왕생칠경>과 <우란분경>에서는 복전사상의 중국적 변형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신라 원효대사는 윤회의 원인을 일심(一心)에 대한 미혹이라고 보았다. <대승기신론소>에서 “일심 외에 다시 별다른 법이 없으나 다만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일심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파도를 일으켜서 육도를 윤회한다”고 했다.

곧 일심을 깨달을 때 윤회를 면해 해탈할 수 있음을 밝혔던 것이다. 즉, 우리나라의 불교에서는 권선징악을 넘어선 해탈의 차원에서 윤회설이 강조됐다.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므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나는 열반이나 극락의 왕생 등을 보다 중요시 했던 것이다.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운 칼 융(Karl Jung, 1875~1961)이 <티베트사자의 서(Tibetan book of dead)>를 해설한 글이 생각난다. “영적 체험의 절정은 삶이 끝나는 순간에 찾아온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가장 높은 차원으로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수레이다.”

[불교신문3632호/2020년11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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