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51> 강릉 백운사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51> 강릉 백운사
  • 박부영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20.11.27 10:33
  • 호수 3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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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마지막 황후의 불심과 수행 만나다

‘순정효황후’가 극진히 모신
‘탈속도인’ 향봉스님과 인연
극락보전에 사진 위패 모셔

왕조 무너졌지만 기개는 살아
바른 믿음과 철저한 수행 귀감

반봉건 운동 바람이 불던 동학농민운동기에 태어나 외교권이 박탈당한 빈껍데기 왕조의 며느리가 되어 황후에 오르고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대한민국 건국, 6·25, 4·19, 5·16, 한일 수교, 월남파병까지 봉건시대부터 식민지 시대와 조국 근대화를 지켜본,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 대지월(大智月) 보살에 관한 이야기다. 
 

‘탈속도인’ 향봉스님이 사찰 터에 창건하고 조선 마지막 황후를 모시는 강릉 백운사 전경.
‘탈속도인’ 향봉스님이 사찰 터에 창건하고 조선 마지막 황후를 모시는 강릉 백운사 전경.

순정효황후 대지월 보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는 조선 최초 근대개혁으로 꼽히는 갑오경장이 일어나던 1894년 해평(海平) 윤(尹)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는 을사늑약 다음해 1906년 13세의 나이로 황태자비로 책봉됐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던 어전회의가 열리던 당시 일화다. 일본에 국권을 넘기자고 우기는 신하들 강압에 순종이 쩔쩔매자 이를 병풍 뒤에서 듣고 있던 황비가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고 내놓지 않을 정도로 강단 있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용히 지내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된 나라는 왕조로 돌아가지 않았다. 국민이 주권을 가진 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백운사 극락보전에서 만난 순정효황후 사진.
백운사 극락보전에서 만난 순정효황후 사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조선왕조에 감정이 많았다. 그는 충녕공 세종에게 세자를 물려준 장남 양녕대군파였다. 국민이 주인인 공화국 대통령이었지만 스스로는 왕으로 여겼다. 조선에 빼앗긴 왕조를 되찾은 양 착각했던 것일까? 남아있는 조선 왕가 권속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봉건 잔재 청산을 사명으로 여긴다는 북의 김일성 정권도 조선왕가를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처 피난가지 못하고 낙선재에 남아있던 윤비에게 인민군은 행패를 부렸다. 위험을 느낀 상궁이 기지를 발휘해 야밤을 틈타 빼돌려 남으로 피난가는 바람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휴전 후 환궁했지만 이승만대통령은 낙선재 복귀를 막았다.  

1960년 4·19로 정권이 바뀐 뒤에야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와 1966년 승하할 때 까지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짧았던 황후의 자리는 평생을 함께 한 영광이며 동시에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었다. 어릴 적 배운 왕실 법도를 한 치도 어기지 않았고 당당함과 냉철함 위엄으로 왕실 권위를 지켰다. 사람들은 그런 황후를 존경했다. 세상을 떠나던 날 30만 인파가 몰려 눈물로 애도하고 이듬해 일생을 그린 영화가 나온 것도 비록 왕조는 무너졌지만 그 기상은 살아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승하할 때까지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타임지를 읽을 정도로 늘 깨어있고 자신에 엄격했다. 그리고 새벽 마다 불경을 독송하고 경전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고승을 지극히 모신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 자취가 강원도 만월산 백운사(白雲寺)에 남아있다.
 

백운사 경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불상.
백운사 경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불상.

새벽마다 경전 독송 

지난 11월5일 찾아간 강원도 강릉 백운사에는 가을이 깊이 물들었다. 주문진에서 진고개로 넘어가는 초입에 만월산으로 한참을 들어가자 작은 암자가 나왔다. 사찰 위로 햇살이 따스하게 내렸다. 

노스님이 계신 종무소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자 가만히 있던 개가 일어나 무섭게 짖으며 발을 민다. 노스님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몸집은 작은데 그 기세가 대단하다. 

현재 월정사(月精寺) 말사인 백운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대인 875년 도운(道雲)스님이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절에서 공양미를 씻은 물이 냇가 물을 부옇게 물들였다는 전설로 미뤄 대가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짐작하는 백운사는 폐사 된 뒤 1952년 상원사에서 정진하던 향봉스님이 중창불사하면서 오늘날의 가람으로 일신했다. 

백운사 주전인 극락보전 안으로 들어가자 하단에 사진 여러 장이 놓여있다. 노비구니 스님, 주장자를 든 노스님, 머리에 높고 무거운 단장을 한 왕실여인의 모습도 보인다, 왕실여인이 순정효황후다. 주장자를 든 스님이 황후가 생전에 ‘탈속도인’으로 존경했던 향봉스님이다. 

황후는 불교를 숭상했고 스님을 지극히 모셨다. 조선조 500년 억불 속에서도 왕실 여인들이 불교를 지키고 가람을 수호하며 스님들을 공양했던 것처럼 황후와 상궁들은 그 전통을 지켰다. 불교도 궁궐에서 쫓겨난 왕실 여인들을 지극히 받들고 지켰다.

공산 치하 서울을 벗어나 부산으로 피난 간 황후 일행은 경남지사 관사로 피난을 갔다가 동래포교당에 잠시 몸을 의탁했다. 그곳에서 동산스님과 불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말년은 나름 행복했다. 5·16이후 박정희 정권 덕분에 일본에서 귀국한 동서 이방자 여사, 시누이 덕혜옹주와 낙선재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1966년 2월3일, 창덕궁 낙선재 석복헌에서 향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순종이 잠들어 있는 유릉에 합장하고 시호를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로 정했다. 

조선 마지막 왕비와 함께 그녀의 삶을 규정하는 키워드는 불교다. 조선이 망하고 불문에 귀의한 황후는 일제 강점기에는 용성스님을, 해방 후에는 향봉스님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3·1 운동 33인 중 한 분으로 민족 지도자며 불교 개혁가요 선교율을 겸비한 삼장법사 용성스님을 황후는 존경하고 지극 정성 모셨다. 나라가 망한 뒤 불문에 귀의한 것도 용성스님과 인연이었다. 황후를 모시는 상궁 두 명이 용성스님 신도였다.

그 중 한 명이 사저를 보시해 대각사를 세웠다. 용성스님의 역경불사, 대각사 창건도 황후의 지원이 컸다. 용성스님 입적 후에도 황후는 스님이 번역한 <화엄경>을 새벽마다 독송했다. 부산피난 시절 동래포교당에 몸을 의탁한 것도 용성스님 제자 동산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는 향봉스님과 인연이 지중했다. 평소 탈속도인(脫俗道人)이라 칭하며 존경했던 향봉스님을 정성을 다해 모셨다. 불교정화 운동 당시 담요를 보내 후원하고 선학원으로 상궁을 보내 법문을 받아오게 해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한다. 대만 장개석 총통이 선물로 보낸 약재로 약을 지어 올릴 정도로 극진했다. 

황후가 존경하고 모셨던 향봉스님은 송광사 석두(石頭)스님 상좌로 금강산 마하연 금정선원 망월사 등 아란야에서 정진하고 만공스님 한암스님 회상에서 공부한 올곧은 수행자였다. 사찰 주지를 거부하고 평생을 화두를 들고 정진한, 황후의 표현대로 진정한 ‘도인’이었다. 
 

향봉스님과 백운사를 지킨 비구니 스님의 사진을 모신 극락보전.
향봉스님과 백운사를 지킨 비구니 스님의 사진을 모신 극락보전.

주지 거부하고 평생 참선 정진

불심 깊었던 황후와 상궁 그리고 탈속도인은 극락보전 사진으로 남아 그 옛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향봉스님은 국상을 주관 한 후 황후의 위패를 백운사로 모셨다. 황후를 모셨던 상궁들은 백운사에 제사비용을 보내 기신재를 부탁하고 죽어서도 황후를 모실 수 있도록 위패를 백운사에 안치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황후를 끝까지 모셨던 김명길 박창복 성옥염 상궁 중 막내인 성상궁은 순정효황후 승하 후 궁중 법도대로 3년상까지 치렀다. ‘궁녀는 궁 밖으로 나오더라도 시집을 가면 안된다’ 는 원칙을 지켜 독신으로 여생을 보냈다.

서울 보문사 시자원(施慈院)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며 노년을 보내고 2001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 세상에 가서도 곁에서 모실 수 있도록 순정효황후 위패가 모셔져 있는 백운사에서 49재를 지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백운사에서 49재를 지내고 위패를 안치했다. 

순정효황후도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내 나이 70여 세 되오니 부처님 세계로 갈 것 밖에는 없다”며 “장례 후에는 유언대로 도인 스님께 영가를 태우고 일주년에 마치게 하길 부탁한다”고 했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여인들은 왕조가 멸망한 뒤 부처님께 귀의하여 도인 스님을 모시며 평생 수행자로 정진하다 백운사에 남았다. 

가을이 깊어가는 백운사를 떠나 만월산으로 내려오며 묻는다. “나는 과연 조석으로 독송하며 수행자를 받들고 부처님 세계로 갈 길 밖에 없음을 믿고 준비하는가?” 불교 쇠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고 많은 해결책이 나오는 지금, 황후와 상궁들처럼 신심이 돈독하고 행이 올곧으며 부처님 가르침을 확신하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하는데서 불교중흥의 길이 있는 것은 아닐까? 백운사 속 사진이 묻고 또 묻는다. 
 

백운사 입구.
백운사 입구.

강릉=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632호/2020년11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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