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은 그릇 따라 이익 얻네

독송만 해도 눈가에 촉촉이 젖는 기운이 무엇이며, 장엄한 법계를 의상께서는 이다지도 절절하게 맺었을까? 물에 넣어도 젖지 않고 불에 던져도 한자도 타지 않을 영적인 기운은 어디에서 왔을까?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 비 허공에 가득하니 중생들은 그릇 따라 이익을 얻네” 80권의 방대한 <화엄경>을 장엄한 법성게, 어느 한 글자 버릴 수 없는 완전함에 한없이 가벼워지는 마음을 느낀다.

집에서 아침, 저녁으로 독송하고, 가끔 들리는 산사에서 새벽 기도에는 사뭇 다른 울림과 떨림으로 정성을 다 한다. 

전시회에 법성게는 빠지지 않는 글제이며 작품은 소품과 2폭 가리개와 8폭등 다양한 작품으로 영적인 기운을 담아내기 위해 붓 끝에 영성을 다 한다.

작품의 인연은 묘하다. 시절인연은 만드는 것인지 본래 있는 것인지 참으로 모르겠다. 부처께서는 인연은 짓는 것이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몇 번 인사 올린 적이 있는 세수(歲數) 100세, 노선사께서 청산의 모습으로 때로는 백운의 모습으로 머물렀다가 향기만 남기시고 원적에 드셨다.

수행자로서의 일 외에 일체 관심이 없으셨던 올곧은 거울이신 노스님의 원적(圓寂)에 불초한 시골 서생(書生)에게 10여장의 만장(挽章)과 이별의 노래 법성게(法性偈)를 쓸 수 있는 지극한 복을 주셨다.

불자 서예가라고 자칭하고 살다보니 인연 있는 사찰에서는 난생 처음 사다리를 타고 벽지에 붓글씨를 쓰기도하고, 일주문, 현판, 주련, 상량문등 불교 관련 글씨를 쓸 기회가 주어질 때 마다 환희심을 다하며 이 복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깊이 깨물어 본다. 참으로 고맙고 기쁘다. 

법성게를 쓴 그날 저녁 스스로에게 놀랐다. 210자의 글자가 열반락(涅槃樂)을 누리듯 웃고 있는 느낌을 나 혼자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니, 참으로 다행이고 고마웠을 뿐이다. 언제 다시 쓸 수 있는 복된 인연이 올 것인가? 

다비식 날 맨 앞에 들려진 만장(輓章), 태워져 다시는 볼 수 없지만 나의 작품 사진첩에는 영기(靈氣) 머금은 채 남겨져있다. 

영결식장에서 노선사의 육성 법문이 쟁쟁하다.

“수좌의 마지막 병은 게으름” 이라는 말씀과 “금가루도 눈에 들면 눈병이 된다”라는 경책의 말씀, 불에 타버린 210자의 말씀 법성게는 천화(遷化) 되었다.

허공에 가득한 보배 비, 늘 주변에 가이없이 내리건만 내 수행의 그릇 작아 항상 부끄러울 뿐이다. 

[불교신문3632호/2020년11월25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