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 참여 앞장…주춤하던 지역불교 ‘활기’

사찰서 자란 유년기 밑거름
편안 대신 치열함 택한 출가
기본 충실한 수행‧포교활동

이천 영월암 주지 부임 후
신뢰 바탕의 탈권위 리더십
지역불심 모은 구심점 역할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강제반출된 이천오층석탑. 이를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한 이천시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1016일 이천오층석탑과 똑같은 환수염원탑으로 이천시청 앞에 우뚝 섰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이천시내를 한눈에 굽어보는 도량 영월암의 주지 보문스님이다. 보문스님은 이천오층석탑 환수운동 뿐만 아니라 존재감 없던 이천불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데 적지않은 역할을 해냈다. 이천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보문스님을 만나기 위해 영월암으로 향했다.

어린시절을 사찰에서 보낸 보문스님은 정오스님과 정무스님을 보며 출가의 꿈을 키웠다. “머리깎는 순간 편안하게 살 생각은 버리라”던 어른 스님들의 가르침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다.
어린시절을 사찰에서 보낸 보문스님은 정오스님과 정무스님을 보며 출가의 꿈을 키웠다. “머리깎는 순간 편안하게 살 생각은 버리라”던 어른 스님들의 가르침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다.

첫 주지 부임지가 영월암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부모님을 여의고 10살 되던 해 정오스님을 따라 간 곳이 영월암이었다. 노보살님들이 동아전과를 사주고 새 옷을 사와서 입혀주던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깃들고 꿈을 키우던 곳이다. 공주 신원사와 화성 용주사, 화성 만기사를 거쳐가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출가 전 이미 절에서 살았던 보문스님에게 사표가 된 어른은 정오스님과 정무스님이다. 정오스님은 늘 따뜻함으로 품어주면서도 때로는 회초리를 들어 바른 길로 이끌어준 아버지 같았다. 아랫마을에 내려가 놀고 올때면 영월암 은행나무 밑에 앉아서 기다리곤 했다. 절로 올라오는 아이가 눈에 보여야 비로소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오스님이 입적한 뒤 보문스님은 용주사에서 자랐다. 용주사엔 10여명의 어린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정무스님은 용주사 주지였다. 휴일이면 학생들을 방으로 불러 과자를 주기도 하고, TV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두 어른은 출가수행자의 꿈을 갖게 해준 멘토이기도 하다. 두 어른이 보여준 모습을 따라 가고 싶도록 만들어줬다. 세영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된 것도 세영스님이 멘토 같은 정무스님의 제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문스님은 1970년대 출가한 어른 스님들과 옛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요즘 스님 중 한명이다. 유년기를 사찰에서 보낸 것이 큰 밑거름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당시 어른 스님들이 일러준 가르침은 지금도 생생하다.

머리깎는 순간 편안하게 살 생각은 버려라.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이 길을 갈 수 없다.” 지금은 뵐 수 없는 두 어른이 보문스님에게 일러준 출가수행자의 길. 보문스님은 그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기에 기본에 충실한 삶에 늘 무게를 두어왔다. 기본으로 돌아가 출가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하고자 했다. 중생구제와 같은 거창한 원력이 아니라 열심히 기도하며 살고자 했다. 그럴 때 수행자로서의 내적인 성숙이 이뤄지고, 죽음이 눈앞에 닥치더라도 당당하고 편안히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국대와 동국대 대학원, 강원을 수료한 이후 줄곧 선방에 다니던 보문스님은 은사 세영스님의 만류로 2009년 영월암 주지를 맡았다. 보문스님이 사찰 운영에 있어서 가장 중시하는 원칙은 스님과 신도, 사찰과 신도간 관계와 신뢰다. 주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신도들과 첫 만남이 있던 날, 보문스님은 신도가 주체가 되어줄 것을 당부했다. 그 다음은 스님이 언행으로써 보여주면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결과가 이천불교를 대표하는 지금의 영월암이다.

지난 11년간 영월암에서 보여준 보문스님의 탈권위 리더십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확신이 자리잡고 있다. “신비주의나 배타적, 지적 영역으로 종교의 권위와 지위가 유지되던 시대는 지났다거나 이제는 신도들과 고락을 함께 하고 신도들의 삶에 종교가 용해되어야만 존립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찰 운영 원칙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보문스님이 처음 이천에 처음 왔을 때 이천불교는 하나로 규합되지 못했다. 이천불교연합회가 있기는 했지만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도 열지 못할 만큼 제각각이었다. 보문스님은 부임 1년 뒤부터 지역사회 내 역할을 키우기 위한 활동을 일사천리로 시작했다. 당시 구제역으로 이천농가가 크게 흔들릴 시기였다. , 돼지 37만두 중 34만두를 땅에 묻은 축산농가들은 시름에 빠져 있었다. 이를 기회로 삼았다.

보문스님은 20111월 이천지역 스님들과 축산농민들, 지역사회 주요 인사들을 영월암으로 초청해 구제역 희생 동물 천도재를 열었다.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와 경승위원회 설치 등을 끌어냈다. 구제역 천도재를 시작으로 IMF 구제금융사태 이후 중단됐던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가 그 해 재개됐다. 이미 지역사회에서 시작된 이천오층석탑 환수운동에 지역불교계가 결합한 것도 이 시기다. 이천오층석탑 환수 기원 탑돌이 문화제를 불교계가 주관해 개최하는 등 지역 현안에도 적극 참여하며 인지도를 높여 나갔다.

2016년에는 이천경찰서 경승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미 개신교 경목위원회와 가톨릭 경신위원회가 오래전부터 활동하고 있었다. 뒤늦은 출발이었지만 곧바로 경승실을 개원하는 등 발빠르게 역할을 늘려나갔다. 지역사회 현안 참여와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문스님은 지역사회는 사찰이 지역 현안을 함께 하지 않으면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각 지역에서 사찰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지역불교가 함께 한다면 필요할 때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선원에 다닐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8년의 선원 생활 중 5년을 보낸 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정진할 때는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 5년을 함께 정진한 스님들이 보문스님에 대해 알지 못할 정도였다. 석사 학위를 받고 난 직후였기에 더 입을 닫았고 드러내지 않았다. 스스로를 경계한 수행생활이었다. 그러니 주지 소임을 맡아 이천에서 그토록 왕성하게 활동하리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돌이켜보면 첫 방부와 안거는 참으로 힘들었다. 정진시간을 때우다시피 보내야했던 고역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보문스님은 그때의 기억을 가장 값진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부단한 수행과 깨달음에 대해 깊이 참구하며 출가수행의 가치를 각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거를 더해갈수록 환희심이 솟아났다.

보문스님은 선원에서의 8년 수행과 은사 스님을 시봉하던 3년의 공부가 영월암에서의 활동에 투영돼 있다고 생각한다. 보문스님은 그때의 공부가 없었다면 지금의 활동과 삶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후배 스님들에게도 보문스님이 어른들에게 배웠듯이 치열하게 살라고 조언한다.
 

보문스님.
보문스님.

보문스님은

1964년생. 10세 때인 1973년 정오스님을 따라 이천 영월암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군 전역 후 출가할 때까지 줄곧 절에서 살았다. 1987년 용주사에서 세영스님을 은사로 득도, 송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90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동국대학교와 통도사 강원, 동국대 대학원에서 수학한 이후 제방 선원에서 16안거를 정진했다.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사무국장, 출가상담사, 교육아사리 등 다양한 소임을 수행했으며 현재 이천 영월암 주지를 맡아 지역불교 현장에서 수행과 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이천=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불교신문3631호/2020년11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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