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21> 통일신라불상⑫ 9세기 후반의 왕실 발원 불상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21> 통일신라불상⑫ 9세기 후반의 왕실 발원 불상
  • 배재호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 승인 2020.11.19 09:55
  • 호수 3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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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화엄정토사상 의지해 비로자나불 조성

지방사원 철불 조성하던 시기
신라 왕실은 전통불상 재료로
지권인 비로자나불상 만들어

동화사 석조비로나자불상은
민애왕 명복 발원하며 봉안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 2존
‘대각간 부부’ 깨달음 기원해
김계명과 광화부인으로 추정

손자인 헌강왕 후원받아 불사
현준스님 주도 가능성 추측

9세기 후반, 지방 사원에서 철불 조성이 한창일 때, 신라 왕실에서는 전통적인 불상 재료인 돌과 나무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였다. 비로자나불상은 9세기 중엽에 가장 유행하였는데, 그 전통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

8세기 중엽에 조성된 불국사(佛國寺)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경남 산청의 내원사(內院寺)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그 예로, 이들 불상은 화엄 정토사상과 신앙 속에서 조성되었다. 9세기 후반에 왕실에서 발원한 대구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비로암(毘盧庵)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의 목조비로자나불좌상들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만든 것이다. 
 

내원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높이 102cm, 무릎 폭 85.2㎝, 내원사 비로전.
내원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높이 102cm, 무릎 폭 85.2㎝, 내원사 비로전.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불신 높이 129cm, 대좌 높이 89cm, 광배 높이 137cm, 동화사 비로암.사진=김세영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불신 높이 129cm, 대좌 높이 89cm, 광배 높이 137cm, 동화사 비로암. 사진=김세영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민애대왕석탑기(敏哀大王石塔記)’에 경문왕(景文王, 861~875 재위)이 863년(경문왕 3)에 민애왕(閔哀王, 838~839 재위)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동화사 원당(願堂, 비로암)에 삼층석탑을 세운다는 기록이 있어서 앞서 언급한 분위기에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승려 심지(心智, 心地, 헌덕왕의 태자 혹은 3자)가 832년에 동화사를 중창하면서 비로암을 아버지 헌덕왕(憲德王, 809~826 재위), 삼촌 흥덕왕(興德王, 826~836 재위)과 김충공(金忠恭, ?~835, 민애왕의 아버지), 사촌 민애왕(閔哀王, 838~839 재위)을 위한 원당으로 삼은 것이다. 불상은 비로암이 민애왕의 원당이 되는 839년부터 석탑이 조성된 863년(민애왕 사후 2기) 사이에 왕실 사람들의 극락정토 왕생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화엄경>의 경주(經主, 경전 주인)인 비로자나불이 극락정토 왕생과 관련되는 것은 민애왕 때 그의 모후 선의왕후(宣懿王后)를 위해 승려 균량(均諒)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봄가을로 <화엄경> 결사(結社)를 행하고, 경문왕이 원성왕(元聖王, 785~798 재위)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대숭복사(大崇福寺, 鵠寺)에서 화엄 승려이자 동해 삼화사(三和寺) 철조노사나불좌상의 조성을 주도했던 결언(決言) 대덕으로 하여금 <화엄경>을 설법하게 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대숭복사에 새로 봉안된 불상(861년)은 최치원(崔致遠, 857~?)이 찬술한 ‘숭복사비명(崇福寺碑銘)’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구체적인 전모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지권인 비로자나불좌상이나 설법인 노사나불좌상(혹은 비로자나불좌상)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신, 광배, 대좌를 따로 만들어 조합한 것으로, 통견 방식의 법의를 입고 지권인을 결한 채 팔각연화대좌 위에서 가부좌하고 있다. 불상은 경계가 모호한 육계와 머리, 부풀어 오른 듯한 눈두덩과 양 볼, 짧은 목, 양감이 느껴지는 좁고 둥근 어깨, 두꺼운 가슴, 아담한 상체, 높고 넓은 무릎 등 통일신라시대 9세기 석조불좌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다.

광배와 대좌는 8세기 불상보다 작지만 훨씬 화려하게 장엄되었다. 광배에는 한 세트의 불삼존상과 여덟 존의 불좌상이 구름무늬와 불꽃 무늬에 둘러싸여 있으며, 대좌에도 구름무늬 속에 일곱 마리의 사자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높이 125cm, 무릎 폭 95.5cm, 해인사 대비로전.사진=손영문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높이 125cm, 무릎 폭 95.5cm, 해인사 대비로전. 사진=손영문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높이 126cm, 무릎 폭 95.5cm, 해인사 대비로전.사진=손영문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높이 126cm, 무릎 폭 95.5cm, 해인사 대비로전. 사진=손영문

한편 883년(헌강왕 9)경에 조성된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2존도 왕실발원 불상으로서 주목된다. 대적광전과 법보전에 각각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비로자나불좌상들은 대적광전의 불상이 법보전의 불상보다 부드럽고 둥근 분위기지만, 같은 장인에 의해 조성된 듯이 크기, 형식, 조형이 거의 같다. 불상들은 편단우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지권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으며, 원만한 상호, 적절한 신체 비례, 탄력적이고 유기적인 법의 주름을 갖추고 있다. 불상의 형식은 8세기 중엽에 조성된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등 왕경 경주 불상을 모델로 하였다. 

해인사 불상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분석, 제작 방식, 조형적인 특징을 통하여 두 불상이 시차를 두고 따로 조성되었거나 원래부터 함께 제작되었다는 견해로 나뉜다. 불상에서 발견된 복장(腹藏) 유물들은 불상 조성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개금(改金)과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음을 알려 준다. 즉 고려시대 1167년경에 사씨(史氏) 집안에서 사위(史褘)의 극락정토 왕생을 위하여 불상을 중수하였으며, 조선시대 1490년에 학조(學祖)대사가 해인사를 중수할 때 황금을 입혔다는 개금 기록이 확인된다.

고려시대의 중수와 조선시대의 개금 기록에서는 불상의 어느 부분을 어떤 식으로 고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으나 조선시대 15세기 말에 머리의 일부가 수리된 것은 분명하다. 두 불상에 보이는 원통형의 정상 계주(髻珠), 중앙 계주, 나발(螺髮), 귀 등은 통일신라시대 9세기 후반의 불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으로, 학조대사에 의해 15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원당암(願堂庵) 목조아미타불삼존상과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한편 법보전 불상의 몸 안쪽에 있는 나무에서 먹으로 쓴 글씨가 발견되어 불상 조성의 배경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추측이 가능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각간(大角干)님께서 등신(等身, 깨달은 몸)이 되시며, 오른쪽의 불상은 비(妃, 부인)님께서 등신을 얻기를 서원합니다. 중화(中和) 3년(883) 계묘년(癸卯年) 하절(夏節, 여름철)에 이 불상을 옷칠하고 금을 입혀 조성합니다.” 

명문에서는 조성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으며, 조성 목적은 대각간 부부가 깨달은 몸을 갖추기를 바라는 것이다. 묵서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어서 불상 조성 사실을 기록한 것은 거의 확실시되지만, 그 형식이 다소 엉성하여 발원문의 일부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한 불상 속 발원문이 적힌 나무의 위치가 모호하고, 서체가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아서 전해오던 기록을 조선시대 15세기 말에 개금 중수할 때 장인들이 베껴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불상들은 보림사(寶林寺) 철조비로자나불좌상(858년)과 삼화사(三和寺) 철조노사나불좌상(860년대) 등 9세기 중엽에 조성된 왕실 발원 불상과 같이 왕실의 후원 속에 해인사 승려가 주도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각간과 그의 비에 대해서는 김위홍(金魏弘, ?~888)과 부호부인(鳧好夫人, 康和), 김위홍과 내연 관계였던 북궁장공주(北宮長公主,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7 재위), 경문왕의 아버지인 김계명(金啓明, ?~?)과 그의 비 광화(光和, 光義, 康和)부인 등 여러 견해가 있다. 그러나 대각간을 김위홍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불상이 진성여왕이 즉위(887년)하기 전인 883년에 조성되었고, 김위홍이 대각간이 된 것은 진성여왕 즉위 이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히려 김계명과 광화부인이 묵서의 인물로 추정된다. 불상 조성을 후원한 왕이 그들의 손자이자 해인사 승려들과 친분이 있던 헌강왕(憲康王, 875~886 재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헌강왕이 생전에 해인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은 헌강왕이 죽은 후 그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불국사에서 열린 화엄 결사를 불국사 승려가 아닌 해인사 승려 현준(賢俊)이 주도한 사실을 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들이 헌강왕의 후원 속에서 현준스님 주도로 조성됐을 가능성을 추측하게 만든다. 

한편 “등신(等身)을 이룬다”는 묵서의 내용은 대각간 부부가 등신불상(等身佛像)의 모습으로 출현했다는 뜻과 함께 “깨달은 몸(燈身)을 갖추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즉 헌강왕은 돌아가신 조부모인 대각간 김계명과 광화부인이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여 깨달음을 이루길 바라면서 불상 조성을 발원한 것이다. 

최치원(崔致遠, 857~?)이 찬술한 ‘해인사 묘길상탑지(海印寺妙吉祥塔誌)’에는 해인사 입구의 묘길상탑에 봉안된 물목(物目)들이 기록되어 있다. 묘길상탑은 도적들로부터 해인사를 보호하다가 죽은 승려와 중생들이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면서 통일신라시대 895년에 세운 탑이다. 물목 중에는 ‘華嚴二佛(화엄이불)’이 있는데, 그것이 죽은 사람들의 극락정토 왕생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대각간 부부의 정토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들을 연상하게 한다. 

[불교신문3630호/2020년1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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