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욕심과 노여움 어리석음으로 가득하고 태어난 지 회갑이 넘었건만 무엇이 ‘나’라고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는 확연한 명제 속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야만 하는지 혼돈과 역경 속에서 나의 생은 이사 나갈 짐처럼 꾸려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헐어놓으면 이삿짐처럼 볼품이 없다고 생각하니 울컥 회한에 가슴이 저리다. 

역대의 선지식과 조사들께서도 이 한 물건을 해결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건만 찾은 것은 진정한 나, 진아(眞我)는 무엇이었을까? 

달마는 혈맥론에서 “만약 부처를 찾고자하면 반드시 견성해야 한다. 성품이 바로 부처이다. 견성치 못하면 계 지킴은 천상에 나게 할 뿐이며 보시는 복의 과보를 얻을 뿐이다”라고 했다. 밖으로 구하고 자기 외적인 삶에 전부의 에너지를 쏟았다면 지금 바로 여기에서부터 자신의 참 나를 찾아야 한다.

평생이라는 시간의 전부를 ‘서도삼매(書道三昧)’와 ‘문자명상’으로 어설프게 수행이라는 명분아래 길나서고, 찾고, 만나고, 어루만지고, 25시간 온전히 살건만 어떻게 몰입 하여야만 서예를 통해 방편적으로 나를 만날 수 있을지, ‘나’의 진정실체는 누구인가를 묻고 답하고 있다. 불교는 스스로 완성하는 자력 신앙이다. 나의 삶은 온전히 나일뿐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배고플 때 내가 먹지 않으면 배부르지 않는다. ‘나’라는 단어는 참으로 정의할 수 없는 묘한 영적의 기운이다. 

어느 날이었다. ‘나는 누구인가’하고 써놓은 나의 작품 앞에서 멍해졌다. ‘묻는 그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몰록 닥쳐왔다. 붓을 들어 작품 아래 써놓고 작업장을 들 때마다 멍히 올려본다.

시골 생활의 아침 오롯하게 물기 머금은 나무들 가지에서 들리는 새소리 자꾸만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고 있다.

부처님께서도 “화려한 꽃을 나에게 바치는 것이 진정한 공양이 아니라 나의 법을 통해 깨달음의 문을 여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라 하였다. 

내가 만나는 나, 이 물건이 나라고 실체할 수 있는가 묻고 깨물어도 정의할 수 없는 나를 잡고 붓을 잡고 헐떡거린다.

붓을 들어도 진정되지 않는 아침, 금(金) 매미가 껍질을 벗어나는 그 광명의 순간을 느끼고 싶다. 

찾는 이 없는 토굴에서 꼬집으면 ‘아야’ 하고 소리치고 칭찬하며 웃는 묘한 자신의 내면이나 더듬어 가야겠다. 

[불교신문3630호/2020년1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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