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을 거짓이라 말 못하는 건
나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심

혜인스님
혜인스님

절에서 속세를 배운다. 세상을 채 다 배우기도 전에 절에 들어온 탓이라는 건 거짓말이다. 절에 온 속인들이 왜 세상을 이해 못 해주냐고 아우성들이기 때문이다. 그 아우성을 못 들은 척 무심히 넘길 수 없는 건 세상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속세를 떠난 이 스님의 마음이 아직 많이 쓰라리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쓰라릴 게 뻔한 세상의 속내를 이해해줄 수 있을까 하여 일부러 배운다. 산사에서 머리 깎고 처세술(處世術)을 배운다.

머리 깎고 속세의 리듬에 맞춰 살아보면, 내가 아닌 나로 살고 있을 게 뻔한 속인들에게 한심하다고 말 못 하는 내가 한심하다 못해 불쌍해진다. 이 불쌍한 처세술에 세상은 귀를 기울이고, 기울여진 눈과 귀가 많아질수록 진실에 가까워지는 거짓들. 아, 진실을 위해 거짓을 배워야 하는 건 줄 알았으면, 거짓이 모르는 진실들은 배워두지 말걸. 그런 거짓의 처세술이 너무도 쓰라려서, 일부러 머리 깎고 세상을 배운다.

너무 황당한 말을 들었다. 누군가에게 서운한 일이 있어 참지 못하고 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있는 그대로 얘기해 주길래 더 화가 나서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단다. 기어코 불편한 질문을 던진 이는 정작 본인인데, 상대가 진실을 말할 거였으면 차라리 거짓을 말했어야 옳단다. 어떻게 나이 처먹고 그런 것도 모를 수가 있냔다.

나이 덜 먹은 젊은이들이라 더 서툰 거짓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습에, 진실을 말해줄 수 없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믿는 척도, 믿어주는 것도 아니고, 그 순간만큼은 그냥 믿어 버리기로 했었다. 거짓을 믿기로 했다는 건 거짓으로 그들을 대했다는 뜻이다. ‘어쩌다 벌써 거짓이 이 친구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된 거지?’ 공허했다. 거짓에게 줄 수 있는 진실이 없어서. 쓰라렸다. 거짓 앞에서 잔인해지는 진실을 잔인하게라도 말해주지 못해서.

그럼에도 진실을 외면하는 거짓을 진실인 양 거짓하는 세상의 진실을 굳이 여기까지 와서 배우는 이유는, 고통을 고통이라, 거짓을 거짓이라 말하지 못하는 내가 아닌 나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아차, 욕심을 욕심이라고도 부르면 안 되지.

“이제 달라질거야.”

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의 단편에 등장하는 어떤 나이 많은 남자는 이렇게 외치면서 이제부터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피곤하군, 사진 속으로 들어가야겠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상은 양탄자라고 불렀다.
의자는 시계라고 불렀다.
신문은 침대라고 불렀다.

그래서 남자는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모든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사실 우스운 얘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슬프게 시작되었고 슬프게 끝이 난다. 잿빛 외투를 입은 그 나이 많은 남자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건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들이 그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했고,
자기 자신하고만 이야기했고,
더 이상 인사조차도 하지 않게 되었다.
(<책상은 책상이다> 중에서)

오늘도 공허하고 쓰라린 책상을 배운다. 침대를 배운다. 세상을 배운다. 산사에서 머리 깎고 나를 배운다.

[불교신문3629호/2020년11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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