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생명과 평등하게 음식 나누는 불교식사법

삼동결제를 앞두고 아랫반 학인 스님들은 발우공양 습의(習儀)로 분주하다. 산문출입을 금하고 수행에 드는 안거철에 발우공양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발우공양은 학인 스님들이 익혀서 이어나가야 할 소중한 의식이고, 하판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행익(行益)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수십 년 전만해도 대부분의 사찰에서 삼시 세끼 발우를 폈다. 근래 출가자의 감소와 의식의 번거로움으로 인해 발우공양을 하는 사찰이 급격히 줄어들어, 안거철의 공양의식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석남사의 발우공양 모습.
석남사의 발우공양 모습.

출가수행자의 일상식

“중노릇 제대로 하려면 ‘예불․대중공양․울력’ 세 가지만 잘하면 된다.” 송광사의 초대 방장 구산스님은 승가의 발우공양 전통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의지가 확고하였다. 대중생활을 하는 출가자의 일상에서, ‘여법한 공양과 노동을 함께하는 일’이 부처님을 향한 귀의와 나란히 소중하게 다루어진 것이다. 

발우를 펼 때면 사중의 최고 어른부터 갓 입문한 하판 스님에 이르기까지, 큰방에서 평등하게 분배한 음식을 일체생명과 나누며 남김없이 먹는 여법한 공양이 이어졌다. 높은 벽에는 결제 대중의 용상방이 당당하게 걸려 있고, 선반 위 법명이 적힌 자리마다 발우가 정연하게 놓인 모습은 청정한 수행가풍을 느끼게 하는 선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좌차대로 앉아 죽비에 맞춰 음식을 나누고 공양하는 의식 하나하나는 ‘공양이 곧 수행’임을 절감케 한다. 

발우공양 가운데 장삼에 가사를 갖추고 <소심경>에 따른 게송을 외며 행하는 공양을 ‘법공양(法供養)’이라 구분하기도 한다. 법공양이 아닌 경우 평상복을 입고, 묵언작법(黙言作法)이라 하여 게송을 외지 않지만 절차와 정신은 동일하다. 대중울력이 있었거나 특식을 할 때는 ‘상공양’을 했는데, 법식과 무관하게 먹는다 하여 이를 ‘뒷방공양’이라고도 부른다. 

‘가지산 호랑이’로 명성이 자자한 인홍스님 당시, 석남사는 서슬퍼런 수행기강으로 유명했다. 아침·점심에는 발우를 펴고 저녁만이라도 뒷방공양으로 편히 먹기를 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많았지만, 큰스님은 상추쌈을 싸먹더라도 발우를 펴도록 하였다. 어쩌다 뒷방공양을 하면, “출가자란 존재는 부처님의 제자이고 인천(人天)의 대 스승이거늘, 어찌 스스로 수행자의 위의를 흩트리느냐”는 호통이 떨어지곤 했다. 

발우공양은 참으로 불편한 식사임에 틀림이 없다. 일상에서 가장 풀어지기 쉬운 시간에, 가장 수행자다운 방식으로 공양하는 모습은 중생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우렁차고 검박하게 외는 게송마다 공양에 임하는 출가자의 마음가짐이 담겨 있듯이, 출가수행자의 일상식은 발우공양의 정신과 역사 속에서 전승되어 왔음이 분명하다. 

부처님과 제자의 공양

어느 시기부터인가 한국불교에서 법공양은 오시(午時)에 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초기불교 당시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한 부처님께 사시(巳時)에 마지를 올린 다음 그 제자들이 공양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 법복을 갖추고 게송을 외는 여법한 법공양을 이 시간에 두는 것이다. 사시마지 무렵은 전각마다 부전 스님이 신도들과 함께 불공을 올리면서, 사찰이 본격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송광사의 법공양은 이러한 의미를 잘 구현하고 있다. 송광사에서 법공양을 알리는 종은 ‘11시7분’으로 정해져 있다. 이는 사시예불과 연동된 것으로, 예불을 마치고 대웅전에서 마지퇴공을 하면 소종을 다섯 망치 쳐서 발우공양의 시작을 알린다. 이 종을 사중에서는 ‘공양종’, ‘밥종’ 등이라 부른다. 

공간배치도 뛰어나다. 10시 반이 지나면서부터 학인 스님들의 각 법당 마지퇴공과 퇴수가 이어진다. 법당의 모든 마지와 청수가 통과하는 문이 큰방 뒤로 나 있고, 바로 옆에 마련된 퇴수공간에 청수를 붓게 된다. 공양종은 마지가 통과하는 문 옆에 달아놓아, 대기하고 있던 소임자가 대웅전 마지퇴공과 청수 붓기를 확인한 다음 종을 치는 것이다. 따라서 공양종은 공양을 알리는 소리이자 부처님 마지를 마쳤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사시공양이 끝난 뒤 그 제자들이 오시공양을 한다는 뜻이 일련의 행위에 잘 담겨 있다. 

이처럼 오시에 법공양을 올리는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실제로는 아침에 법공양을 하는 사례가 더 많다. 오시 무렵이면 신도들이 많은데다 행사 등으로 격식을 갖춘 공양을 하기에 번거롭고, 새벽예불을 올리고 나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무렵이 여법한 공양의식을 행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한편 진관사 계호스님은, <선원청규> ‘이시죽반(二時粥飯)’의 영향을 받아 예전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 또한 두 번이었을 것이라 보았다. 아침에 죽을 먹고 점심에 밥을 먹었던 옛 선종사찰의 법식을 따라, 공양을 하기 전에 본사(本師)인 부처님께도 똑같이 마지를 올리는 규범이 통용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 의식집에 나타나는 수륙재 당일의 공양 가운데, 이른 아침에 마지와 죽공양을, 점심에 사시마지와 오시 밥공양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에서도 어느 시기까지는 하루 두 번의 마지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송광사에서 대웅전 마지퇴공과 함께 울리는 공양종.
송광사에서 대웅전 마지퇴공과 함께 울리는 공양종.

죽공양과 김장울력

<청규>의 ‘이시죽반’처럼, 죽은 예나 지금이나 출가자의 소중한 수행음식으로 꼽힌다. 부처님이 6년고행 끝에 한 그릇의 유미죽으로 정각 성취의 기력을 삼았듯이, 수행정진에 집중하는 안거기간이면 아침으로 죽공양을 하는 사찰이 적지 않다. 

인홍스님은 아침마다 정갈한 흰죽으로 발우 펴는 것을 전통으로 삼았다. 대신 공양주가 죽을 묽게 끓이면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별다른 간식이 없던 배고픈 시절이라, 되직하게 끓여서 든든한 한 끼로 수행에 힘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러한 가풍에 따라 일타스님은 ‘석남사 흰죽이 맛있다’며 통도사에서 석남사로 넘어오곤 하였다. 그런가하면 대중은 많고 양식이 부족해, 묽게 끓인 죽을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픈 사찰도 많았다. 

송광사에서는 지금도 아침마다 죽으로 발우를 펴고 주말 아침에는 떡국이 오른다. 죽을 기본으로 하는 신죽(晨粥)의 아침공양은 수십 년 동안 이어온 송광사의 전통이다. 전날 밥을 사용해 죽을 끓이되, 잣죽·호두죽·땅콩죽에서부터 콩나물죽·무죽·감자죽·아욱죽·시금치죽 등에 이르기까지 매일 재료를 달리하여 영양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삼동결제는 김장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여져 있다. 김치는 겨울철의 가장 소중한 찬이자, 추운 날씨에 엄청난 양의 김장을 담그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따라서 스님들 사이에 ‘삼동결제는 김장을 함께 담가야 공부할 자격이 있다’는 불문율이 있다.

대개 선방의 김장날짜는 결제 전에 잡히고, 방부를 들인 스님들도 미리 김장날짜에 맞추어서 가게 된다. 1960~1970년대 동학사 강원에서는 김장에 빠질 경우 벌칙으로 콩 한말을 내야 했고, 1970년대 전후의 <선방일기>에도 김장울력이 끝난 다음에 온 스님들은 스스로 낮 시간에 좌선을 포기하고 땔 나무를 하여 송구스러움을 면했다고 한다. 

김장거리를 다듬을 때의 풍속도 전한다. 스님들이 둘러앉아 시래기를 챙길 때면, 늦게 출가한 스님들이 법문은 못해도 특유의 이야기꽃으로 뒷방법문을 꽃피우곤 했다는 것이다. 참선시간에 졸던 늦깎이 스님들이 지대방에서 세간의 이야기로 활개를 치듯이, 참말 거짓말을 보태어 구수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인기가 있어 ‘시래기 법사’라 부르곤 했다는 것이다.

목 발우와 철 발우

목발우는 예나 지금이나 발우의 대명사이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뿔발우가 유행하던 시절, 사미계를 받은 스님들은 간절히 목발우를 갖고자 했고, 은사 스님이 목발우를 내려주는 날이면 뛸 듯이 기뻤다는 소회도 전한다. 발우는 평생을 지니는 것이요 수행자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옻칠을 하여 윤이 나는 나무발우의 단아한 품격을 선호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철발우를 쓰던 때가 있었다. 1947년 종단의 청정가풍을 회복하고자 조직한 봉암사 결사시절에, 성철스님은 목발우를 없애고 철발우를 들였다.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초기불교 당시 나무발우는 외도들이 사용하던 것이라 하여 금했던 율에 따른 것이다. 부처님 당시 철발우 이전에 흙발우를 썼던 전통이 있어, 개인적으로 토기 발우를 만들어 쓰는 스님도 있었다고 한다. 

성철스님의 율을 따랐던 석남사에서도 1960~1970년에 철발우를 사용했다. 쇠로 만든 흰 발우를 사서 스님들이 직접 구웠는데, 발우에 들기름을 바른 뒤 아궁이에 산죽이나 생솔가지 등으로 불을 피워 그 연기로 그을려 까맣게 만드는 것이다.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기름을 발라 굽기를 몇 차례 거듭해야 한다. 그런데 쓰다보면 색이 벗겨져 주기적으로 다시 구워야 했는데, 까만 철발우를 곱게 구운 날 아침에 흰죽을 받으면 아주 맛이 좋았다고 한다. 

학인 스님은 행자들과 함께 발우공양의 준비에서부터 청수, 밥, 국, 숭늉을 나누는 행익은 물론 퇴수와 찬상을 들고나는 일까지 모두 맡는다. 밥 진지(進止)를 할 때면 어시발우에 밥 담는 모양을 잘 갖추어야 한다. 밥을 풀 때면 ‘담는다’는 표현 대신 ‘된다’고 했는데, 주걱으로 양쪽을 한 번씩 눌러서 뜨면 두 번 푸는 법 없이 정확하게 세 홉 밥이 나오기 때문이다. 일정한 양을 보기 좋게 담아내는 것은 윗반에서 아랫반에 전수하는 노하우이기도 하며, ‘밥 뜨는 실력이 좋은 학인’이 따로 있어 인정을 받기도 한다. 

찰밥공양을 할 때면 어른 스님들 몰래 김에 찰밥을 싸서 서로 던지기도 하고, 만두공양이 있는 날이면 장난기 많은 스님들이 만두 속에 고춧가루나 소금을 넣기도 했다니 놀랍기만 하다. 수행과 다르지 않은 여법한 출가자의 공양의식에도 윤활유와 같은 미소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불교신문3629호/2020년11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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