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농사기술 들여온 해양문명을 만나다

인도에서 온 장유화상 창건
수로왕 일곱 왕자 첫 출가지

가야불교 대표하는 천년가람
장유화상탑이 그 시절 전해

대륙이나 육지에서 돌출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땅을 반도(半島)라 한다. 유럽 대륙에서 대서양과 지중해로 향한 이베리아 반도, 지중해 에게해 흑해에 걸친 발칸반도, 유라시아 대륙의 끝자락 한반도 등 많은 반도가 있다. 육지나 대륙과 접하면서 3면이 바다로 향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다양한 문명을 접하는 반면, 잦은 외침에 노출되는 약점도 있다. 이 땅의 불교도 대륙과 해양 양 방향으로 들어왔으니 통불교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불교가 형성된 이유다. 
 

인도에서 전해온 남방불교 역사를 간직한 김해 불모산 장유사 모습.
인도에서 전해온 남방불교 역사를 간직한 김해 불모산 장유사 모습.

통불교 전통 생겨난 까닭

경상남도 김해는 과거 금관가야 문명을 꽃피운 고대문화 중심지다. 낙동강 삼각주 일원의 너른 평야와 바다를 통해 외부와 연결된 교통에 힘입어 일찍부터 고대문명을 꽃피운 금관가야는 불교국가였다.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왕은 남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을 부인으로 맞아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중 장자가 왕국을 이어받고 두 명의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받아 김해 허씨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7명 아들은 지리산에 들어가 수도하여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온다. 

일연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황옥이 기원후 48년 음력 7월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탑을 싣고 왔다. 그 파사석탑은 현재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방 대륙에서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해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이니 가야에는 그보다 300여년이나 앞서 불교가 들어온 셈이다.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조에 따르면 아유타국(阿踰陀國, ayodya)의 공주였던 허황옥은 부왕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해 가려했지만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 가지 못했다. 허황옥은 다시 부왕의 명에 따라 파사석탑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그제 서야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바닷가에 닿을 수 있었다.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따르면 아유타국은 농작물이 풍성한 살기 좋은 땅이며 사람들은 복 짓기를 좋아하고 학예에 힘썼다. 100여 곳의 가람과 3000여 명의 승려가 대·소승불교를 함께 배웠다고 하며 대승경전 <승만경>의 중심무대로 알려진 나라다. 최근 연구나 학자들의 현장 방문에 의해 베일에 가려졌거나 전설로만 여겨오던 아유타국과 불교전래설이 점차 현실로 확인되고 있다. 
 

장유화상 사리탑.
장유화상 사리탑.

남방불교 전래설 뒷받침

남방불교설은 사찰 역사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장유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장유사(長遊寺)와 은하사(銀河寺), 허황옥이 바다의 파도를 잠재우고 무사하게 가락국에 도착해 감사하는 뜻으로 ‘바다의 은혜를 기리는 절’이라는 이름을 붙인 해은사(海恩寺), 수로왕이 어머니를 혹은 수로왕비가 인도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 은혜를 기려 창건했다는 모은암(母恩庵), 수로왕의 극락왕생을 기려 창건한 성조암(聖祖庵), 허황옥이 초야를 치렀다고 전해지며 명월사라고도 불렸던 흥국사, 금관가야인들이 불교를 잘 몰라 신봉하지 않자 교화 차원에서 제8대 질지왕 2년(452)에 세운 호계사와 왕후사(王后寺), 수로왕이 독룡과 다섯 나찰녀의 훼방으로 흉년이 들자 부처님을 청하여 설법을 하니 동해의 용과 고기가 돌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만어사, 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 난 일곱 왕자가 도를 닦아 성불했다는 하동 칠불암 등 20여 개가 넘는 연기 사찰이 현존한다.

장유, 선암, 별포, 능현, 기출변, 범왕리, 대비촌, 불모산, 칠왕소 등의 지명도 남방불교 전래와 관련 있으며 인도에서 위대한 신으로 숭배하는 시바 신앙에 나오는 요니와 링가 유물이 김해지역 사찰에 유독 많이 나오는 것도 인도 불교 전래설을 뒷받침한다. 

지난 10월15일 김해 장유사를 찾았다. 허황옥의 오빠(동생이라고도 한다)이며 금관가야에 불교를 전한 장유화상의 이름을 딴 절이다. 장유사 아래 너른 김해들에 들어선, 인구 15만 명이 넘는 장유 신도시, 장유동은 화상의 이름에서 따온 지명이다. 행정구역은 김해이지만 남해 고속도로가 사이에 놓여있어 창원과 더 가까운 느낌이다. 장유사로 가기 위해 경전철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는데 버스 편도 거의 없어 불편하다. 

계곡 입구에서 내리자 장유사 가는 길이 거의 5km에 이른다. 산비탈 위로 아스팔트 도로가 놓여 있고 간간히 승용차가 오르내릴 뿐 장유사 찾아가는 길은 호젓했다. 2km가량을 올라가자 등산로가 나왔다. 가파르지만 흙길이어서 걷기 편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시 아스팔트 도로를 만났는데 절 입구다. 절 입구에는 금박을 한 대형 지장보살 좌상이 김해 평야를 내려 보고 앉았다. 절 안으로 들어가자 경내가 확 트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다. 김해 평야 시가지가 한 눈에 보인다. 
 

장유사 전경.
장유사 전경.

지명으로 전하는 가야불교 

대웅전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1호인 장유화상사리탑과 가락국장유화상기적비가 맞이한다. 장유화상사리탑은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이 장유암 재건 당시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탑을 헐어서 부장품을 훔쳐가면서 파손된 것을 복원하였다. 절 아래 장유사 입구에 조선시대 후기에 폐사가 된 왕후사지(王后寺址)가 있는데 정확한 지점은 확인 되지 않았다.  

장유사는 48년에 인도 아유타국 태자이자 승려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후가 된 누이 허씨를 따라 이곳으로 와서 최초로 창건한 사찰로 전해온다. 1915년 허식이 지은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駕洛國師長遊和尙紀蹟碑)’에 따르면 스님은 왕후의 친족이었으나 부귀를 뜬 구름같이 보고 티끌세상을 초연하여 불모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나오지 않았다 하여 사람들이 장유(長遊)화상이라 불렀다. 일곱 왕자가 외삼촌인 장유화상을 따라 처음 수도한 곳도 이 곳이다. 장유암이 자리한 산은 부처님의 산, 즉 성불한 일곱 왕자의 어머니 허황옥을 기리는 불모산(佛母山)이다.

이후 장유사는 참선도량으로 선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할 뿐 자세한 기록은 없다.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운파(雲坡)·영담(映潭)·우담(雨潭)·만허(萬虛)스님 등이 중건·중수했다. 6·25전쟁 이후에 점차 퇴락한 사찰을 1980년부터 화엄(華嚴)스님이 중창불사하고 석호스님과 현 주지 해공스님으로 이어지며 지역포교와 신도교화로 김해불교를 대표한다. 

장유사 뒤 용지봉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자 김해 일원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2000여 년 전 김해 해수면이 지금보다 높았다. 불모산 신어산 가까이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 뱃길을 따라 인도에서 이곳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남방불교 전래는 아직 학자들 사이에 공인받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300여 년 간의 불교사가 공백으로 남았다. 중국을 통한 문화 유입 외에 다른 설은 불경스럽다 여겨서일까? 오죽 답답했으면 대통령까지 나서서 가야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을까 그 심정이 이해간다.

남방불교 전래설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인류문명을 꽃피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자리한 한반도는 북으로는 유목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바다로 멀리 인도 아랍 문화를 섭취했다. 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몸 안에 유전자로 남아 흐른다. 우리의 일상 말에도 북방과 남방의 흔적이 남아있다. 물건을 자르는 도구는 북방에서 건너왔고 쌀은 남방에서 왔다. 그 둘이 한반도에서 만나 ‘우리’가 되었다.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는 불교와 함께 쌀농사 기술을 갖고 먼 이국 땅 김해에 안착해 불교를 전파하고 농사 기술도 전파했다. 북으로도 불교가 들어와 찬란한 꽃을 피웠다. 경로가 다르고 시기만 차이 날 뿐 이 땅에서 하나가 되어 민족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한민족을 살찌웠다. 
 

장유사 입구 지장보살상 모습.
장유사 입구 지장보살상 모습.

한국불교 개방성ㆍ역동성 자랑

남방과 북방이 결합한 ‘한국불교’는 다양성 개방성이 생명이다. 그래서 참선 염불 간경 주력 등 모든 수행법을 배척하지 않으며 대승불교를 지향하면서 계율을 중시하고 개개인의 해탈을 추구한다. 산중에서 홀로 참선 정진하면서도 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불교가 아닌 민간요소까지 일주문 안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열려있으며, 일찍부터 육지로 바다로 나아가 세계불교를 배우고 받아들였다. 간다라에서 시작해 고비사막을 거쳐 중원을 따라온 인류 문명 전파로 실크로드 종착지는 신라의 수도 경주였다.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한반도의 토양이 만든 우리만의 불교다. 

해양과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인 세계적이면서 독창적인 한국불교답게 지금 우리는 문호를 열고 다양한 사상과 주장, 문화를 받아들이며 또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가는가?
 

장유사 일원에서 가야불교를 찾는 조사가 진행 중이다.
장유사 일원에서 가야불교를 찾는 조사가 진행 중이다.

김해=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626호/2020년11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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