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⑱ 송광사 불일암 은거
[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⑱ 송광사 불일암 은거
  • 여태동 기자
  • 승인 2020.10.29 13:45
  • 호수 3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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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각오로 서울 등지고 산으로 돌아가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내가 무엇 때문에
출가 수행자가 되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 그릇과 삶의 몫이
무엇인가도 헤아리게 되었다
한동안 소홀했던 ‘중노릇’을
다시 익히고 길들였다
1975년 법정스님이 ‘고달팠던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은거에 들어갔던 순천 송광사 불일암.
1975년 법정스님이 ‘고달팠던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은거에 들어갔던 순천 송광사 불일암.

“바깥소리에 팔리노라면 자기 소리를 잃고 말기 때문에. 가장 깊숙한 데서 나직이 들려오는 ‘내심의 소리’는 곧 우주질서의 하모니이다. 먼 강(江)물 소리 같은. 해서 구도자들은 무성처(無聲處)인 ‘아란야’를 찾아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중략)… 돌아가리로다. 돌아가리로다. 내심의 소리를 들으려 모두들 숲으로 돌아가리로다.” 

1966년 6월5일자 불교신문 전신 <대한불교>에 게재한 ‘돌아가리로다’라는 글이다. 당시는 상경해서 동국역경원과 <대한불교>에서 활동하며 왕성한 경전번역과 집필활동을 하고 있을 때로 법정스님은 ‘서울살이의 고달픔과 쓸쓸함’을 토로하며 마음은 늘 ‘산중(山中)’을 향하고 있었다. 

1970년대를 맞아 법정스님은 강남 봉은사에 머물면서 군사독재의 격동기를 맞이했다. 사회민주화에 앞장섰던 법정스님은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종단은 법정스님에게 냉랭한 시선을 보냈음을 자신의 저서 <버리고 떠나기>에서 회상했다. 

“어용화 된 불교종단에서는 이런 나를 마치 무슨 보균자처럼 취급하였다. 기관원이 절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감시하고 걸핏하면 연행해 가 괴롭혔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군사독재의 당사자들에게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게 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 서울생활을 접고 순천 송광사 뒷산의 불일암으로 은거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자신의 저서 <버리고 떠나기>에서 밝히고 있다.

“75년이던가, 이른바 인혁당(人革黨) 사건으로 한 무리의 반정부 세력이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반체제 쪽에서는 이를 정치적인 조작극이라고 몰아붙이자 군사독재자들은 사형을 언도한 바로 그 다음날 여덟 명 전원을 사형집행하고 말았다. 사법사상 일찍이 그 유래가 없었던 이런 만행 앞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죄 없는 그들을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이 없다고 나는 자책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독재자들에게 조작극이라고 그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보란 듯이 재빨리 사형을 집행하고 만 것이다.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죽게 한 이와 같은 반체제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색 출가 수행자로서 마음에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는다는 일 또한 자책이 되었다. 무슨 운동이든지 개인의 인격형성의 길과 이어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내가 무엇 때문에 출가 수행자가 되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 그릇과 삶의 몫이 무엇인가도 다시 헤아리게 되었다. 75년 10월 거듭 털고 일어서는 출가의 각오로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산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소홀했던 ‘중노릇’을 다시 익히고 길들였다.”

법정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으로 들어간다. 불일암은 개조되기 전에는 ‘자정암’이라는 암자로 비어 있는 상태였다. 법정스님이 불일암으로 내려올 당시 송광사에서 갓 출가했던 보성 대원사주지 현장스님은 자신의 저서 <시작할 때 그 마음으로>에서 당시 상황을 적었다.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계시던 법정스님께서 재출가의 의지로 몇 군데 토굴 터를 둘러보시고는 자정암에 오르셨다. 남향으로 햇볕이 좋고 샘물도 맛이 좋았다. 마침 매화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낡은 자정암 건물을 헐어내고 쓸 만한 목재와 기와를 수습하여 지금 식당채로 쓰이는 하사당을 지었다. 불일암 본체는 팔작지붕으로 14평이다. 법정스님께서 직접 설계하셨다. 예불공간과 명상실이 있고, 책 읽고 글을 쓰는 서재가 있다. 또 작은 다실이 있고 군불 지피고 더운 물 사용하는 정재간이 있다. 정재간 다락은 책을 정돈해두는 서재로 사용하였다. …(중략)… 불일암 본체를 지을 목재와 기와는 인부를 동원하여 등짐으로 져 나른 것이다. 길부터 개설하고 자재를 나르는 요즘의 방식이 아니라 옛길을 보존한 채 2km 거리를 등짐을 져서 목재 하나 기와 한 장이 불일암까지 올라온 것이다. 마침내 1975년 11월2일, 효봉 노스님의 기일에 맞추어 불일암 낙성을 가졌다.”

법정스님의 불일암 생활도 한가롭지만은 않았다. 초기에는 <대한불교(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했고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 송광사를 비롯한 절집 관련 직책도 맡고 있었다. 
 

불일암에서도 법정스님은 나름대로 세상과 소통하며 1978년에는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수상집을 발간, 군사독재 정권과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기도 했다. 책 서문에는 ‘선량한 이웃들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붙였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둘레에는 부쩍 ‘서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출퇴근 시간의 붐비는 차안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계층에서 제자리에 앉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똑같은 자격으로 차는 탔어도 앉을 자리가 없어 자신의 두 다리로 선 채 끝도 없이 실려가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이 잡문집(雜文集)의 이름을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붙인 것은 그런 선량한 이웃들을 생각해서다. 그들이 저마다 제자리에 앉게 되는 날, 우리 겨레도 잃었던 건강을 되찾게 될 것이다.”(저서 <서 있는 사람들> 서문에서)

2001년 개정판을 내면서 법정스님은 당시에 썼던 글에 대해 “1970년대 그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 한 말을 할 수 없고,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숨막힌 때였다. 글 한 줄을 쓰려면 활자 밖의 행간에 뜻을 담아야 했던 그런 시절이었다”고 술회했다. 

법정스님은 대중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무문관(無門關)과 다름없는 불일암에서 자신을 연마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아니지만 여전히 함석헌 목사를 비롯한 사회민주 인사들과 교류도 하고 간간이 글도 투고했다. 

스님은 눈앞에 보이는 그 어떤 정형화된 틀도 거부했다. 철저하게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 앞에 투철했다. 더욱이 법정스님은 불교의 정형화된 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교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고정화 된 불교까지 거부했다.

송광사 불일암을 떠나기로 마음먹고는 ‘새가 낡은 둥지를 떠나듯’ 맡고 있는 직책의 짐을 하나 둘씩 내려놓는다. 

“지난해(1991)부터 나는 걸치고 있던 치수에 맞지 않는 ‘옷’을 한 꺼풀씩 벗어 제치고 있고 있다. 10여 년 동안 관여해 오던 송광사 수련원 일에서 손을 뗐다. 보조사상연구원의 일에서도 손을 씻었다. 그리고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행사에는 안팎을 가릴 것 없이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했다.”(저서 <버리고 떠나기>에서) 
 

원적에 든 법정스님의 유해가 묻힌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 나무는 법정스님이 손수 심었다고 전한다.
원적에 든 법정스님의 유해가 묻힌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 나무는 법정스님이 손수 심었다고 전한다.

불일암을 떠나기 1년 전인 1991년 마지막 여름안거를 난 법정은 임제선사의 어록을 읽으며 ‘차분한 시간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난 4월 보름 여름안거의 결제 날에도 아랫 절에 내려가지 않고 임제선사의 어록을 읽으면서 혼자서 차분한 시간을 가졌었다. ‘그대가 바른 견해를 얻고 싶거든 타인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을 바로 죽이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성자를 만나면 성자를 죽이라, 그래야만 비로소 온갖 얽힘에서 벗어나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하리라. 친구들이여, 부처로써 최고가치를 삼지 말라. 내가 보기에는 부처도 한낱 냄새나는 존재요, 보살과 성자는 목에 씌우는 형틀이요 손발에 채우는 자물쇠, 이 모두 사람을 결박하는 것들이니라.’”(저서 <버리고 떠나기>에서)

법정스님은 모든 것이 ‘손발에 채우는 자물쇠, 이 모두 사람을 결박하는 것들’이라며 진리의 칼날에 서기를 자처했다. 이는 곧 이듬해 불일암을 떠나 ‘머무름 없는 거쳐’를 다시 찾아 아무런 인연도 연고도 없는 ‘삶의 망망대해’이자 ‘진리의 숲’인 자연을 찾아 강원도 오두막으로 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불교신문3624호/2020년10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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