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고 산란한 마음 명료하게 한 곳으로 집중”

명상생활에 최고로 좋은 도반은 따뜻한 차(茶)라 말하고 싶습니다. 분주하고 흔들리고 들뜬 마음이 차 한잔을 통해 코로는 차향을 들이켜서 정신을 맑게 하고 손바닥의 오장육부 반사구를 따뜻한 컵과 차의 온기로 이완시켜 줍니다. 입술과 혀 목구멍을 통해 넘어간 따뜻한 차는 불안하고 산란했던 마음을 이완시켜 줄 뿐만아니라 마음을 명료하게 한곳에 집중하게 도와줍니다.

긴장된 근육들이 풀어짐으로써 답답한 마음도 릴렉스가 되어 집중된 마음 가운데 알아차림이 명료해져서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현상계의 본질을 잘 이해하게 되어 삶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지혜도 열립니다.
 

선엽스님은 “차(茶)로써 성덕(聖德)을 이루어가는 일념의 모습들을 다도(茶道)라 하고, 그러한 사람을 진정한 다인이라 부른다”며 일상생활에서도 차와 명상을 통해 다도의 정신을 가져보라고 권한다.
선엽스님은 “차(茶)로써 성덕(聖德)을 이루어가는 일념의 모습들을 다도(茶道)라 하고, 그러한 사람을 진정한 다인이라 부른다”며 일상생활에서도 차와 명상을 통해 다도의 정신을 가져보라고 권한다.

바로 차명상 이야기입니다. 차에 관련된 책을 쓰려고 보니 차를 만나게 된 소중한 첫 인연이 떠오릅니다. 10대 철없던 어린 시절, 아스팔트 도시 한복판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보며 다락방에 풀숲 침대가 너무 좋아보여 한밤중에 남동생 데리고 여행용 큰 가방을 가지고 동네 공원 잔디밭에서 풀을 뜯었던 그 때부터 이미 자연 속 건강약차와 인연을 맺지 않았나 싶습니다.

출가 전 깊은 산중 토굴에 고요한 산물을 받아 정갈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차를 우리시던 곱던 비구니 스님도 떠오릅니다. 결정적으로 차의 힘을 믿고 차를 수행도반으로 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는 2007년부터 4년간 서울보훈병원 법당 총무소임을 맡았을 때입니다. 

호스피스활동과 병실 라운딩을 하며 병원법당 다도봉사팀을 운영했던 그 시절 병원로비와 병실을 직접 찾아다니며 차를 배달하며 환자들과 차로써 교감하고 소통했던 그 때 차의 위력을 느꼈습니다. 종교인이 찾아가도 나와 다른 종교면 짜증부터 내고 관심이 없었던 환자들이 직접 우린 차를 한잔 하자고 하면 대다수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감사해 하셨습니다. 그 환자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그때는 하루 5000여번 차를 우려서 다도봉사팀과 함께 병실을 찾아다니며 병환으로 지치고 힘들어 하는 환자들에게 관음의 마음으로 감로수 한잔을 선사했습니다. 10평 남짓한 병원법당에 다실을 만들어 오가는 환우와 보호자에게 차한잔하며 마음을 쉬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 시절이 차와 깊은 인연의 시작이었던것 같습니다.

그 시절 차를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 명원문화재단과 원광대 차문화경학과를 다니면서 차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뜻깊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누군가 차와의 인연을 물으면 언제나 그 시절 서울 보훈병원이 떠오릅니다.

차(茶)가 곧 선(禪)이며 다도(道)의 경지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어떠한 형태나 형식에 있지 않습니다. 많은 다인들과 저 역시 여러가지 다구(茶具)와 그릇들을 진열하고 화려한 차림새로 풍악에 맞춰 몸동작을 지어내며 다도시연이니 헌공다례니 하는 모습들은 상업성 이벤트성으로 상술적 퍼포먼스를 펼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차생활 속 인품과 기품은 차생활 정신이나 다도와는 꽤나 멀고 먼 세속의 티끌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선대의 어른들께서는 오거서(五車書, 다섯 수레분의 경서)를 마음에 담고 생활 속에서는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을 실천하고, 오히려 부족할까 부끄러워 성현(聖賢)을 흠모하며 서릿발 같은 차 한 잔으로 심신을 일깨우고 중정(中正, ‘中’이란 감정과 욕망에 휩쓸리지 않으셨으며 ‘中’이 바르지 못하면 ‘중’이 아니라 하셨음을 ‘中正’이라 함)수행으로 추슬러서 자기를 극기복래함을 통해 늘 자신을 연마했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자기 수양 속에서의 차 한 잔을 통해 인격이 완성되면 그것이 비로소 다도인 것입니다. 차의 정신과 불교의 가르침인 다선일여(茶禪一如)는 이보다도 높고 높아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정점(頂點)에서 완숙되는 차선입니다. 가고 오고 머물 때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말할 때나 침묵할 때와 행동하거나 명상할 때(語默動靜) 어느 때(一切時) 어느 곳(一切處)에서든지 “지금 이 순간” 이전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말며(無憶) 이 순간 이후로 미래가 다하도록 과거의 헛된 한 생각도 갖지 말며(無念) 무상무념에도 기대지 말고(無住) 한 모금 차를 마시면 선(禪)과 더불어 한 가지 맛(茶禪一味)이라고 하는 경지입니다. 

이렇듯 인간들이 형성한 일체의 것의 격식을 넘어선 곳에 선(禪)이 있습니다. 또 차와 선이 따로 따로 이루어지면 선이 아니고 도가 아니므로 다선일여(茶禪一如)라 합니다. 

선(禪)에는 고정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차 또한 정해진 일정한 격식이 없습니다. 있는 상황에서 차생활을 즐기며 차를 마실 뿐입니다. 선(禪)이나 도(道)는 성자(聖者)의 경지입니다. 흉내내기로 모습을 비슷하게 한다고 하여 그것이 곧 다도(茶道)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도란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道)를 흠모하는 분들의 삶의 목적이 출세나 명예 또는 재물과 재색에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자 하는 수행의 바른 팔정도의 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차(茶)로써 성덕(聖德)을 이루어가는 일념의 모습들을 다도(茶道)라 하고 진정한 다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수행인이 차를 마시면 격식이 없어도 다도(茶道)요, 잡된 사람은 우아한 모습으로 격조있게 마신다 해도 진실된 다도는 아닌 것입니다. 

시대적 형편으로 보아 체험다도(體驗茶道) 즉 다도체험으로 볼 수는 있지만, 이도 일본 쪽에서 빛이 나는 듯합니다. 일본의 초암다실(草庵茶室)은 어장해사(魚藏蟹舍)라고 하여 물고기 집이나 바닷게 집처럼 겨우 웅크리고 출입하며 눈비나 피하는 초막인데, 우리네 불교에서는 스님들이 조촐하고 정갈한 가운데 수행하는 곳을 토굴(土窟)이라고 합니다. 

깊은 산중에 초막이나 토굴은 드문드문 있었고 향상일로(向上一路, 성자를 향해 가는 외길)의 길에 있는 선승(禪僧)들이 머무는 곳을 움막이라 하였습니다. 일본 다도는 이러한 선승들이 화려하게 장엄한 궁성 한켠에 토굴을 얽어놓고 지내며 무사들의 헛된 생각을 다스리는 마음수양의 도를 다도를 통해 지도한 데에 그 근원이 있습니다. 
 

일기일회(一期一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고, 한번의 인연이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을 대하듯 동일한 인물과 두 번 만날 수 없음을 불교의 무상(無常) 관점으로 차실에서도 몸과 마음을 다듬어 상대에게 최선을 다함입니다. 한 찰나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일기일회가 분명한데도 이것을 일러서 일본 사무라이 문화의 일도양단(一刀兩斷)의 냉혹함이라고 비하시켜서는 안됩니다. 일기일회는 이 한마디만으로도 차를 도(道)로 승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 그 선사들의 경지였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돈을 내고 일본다도를 좇아 다다미방 초암 다실속에서 차를 마시는 행위는 다도가 아니라 다도체험일 뿐입니다. 체험을 통해서 흐트러지는 자신을 추스르고 잠든 의지를 일깨워 생기(生氣)를 뿜어내고자 함입니다. 일상 속의 생활차 속에서 옛 선승의 체취와 기품을 느껴보고자 함이 체험다도의 일단이란 뜻입니다. 

어느 이가 발표하기를, “중국은 생활차요, 한국은 풍류차요, 일본은 무사도 차”라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분별하는 정의에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차(茶)는 생활차(生活茶)와 다도(茶道)로 나누어 볼 수 있음이 공통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이나 학자들이 머그잔에 찻물을 가득 채워놓고 한 모금씩 머금어가며 학문하는 모습도 생활차요, 가정이나 식당 또는 호텔 등에서 숭늉처럼 마시는 것도 생활차요, 영국인들이 아침 6시 식전에 침대에서 차 한 잔을 시작으로 하루 네 번 갖는 티타임도 생활차요, 손님을 맞이하여 정갈하고 향미있게 나누는 차도 생활차요, 아취있는 모임에서 청담(淸談) 속에 나누는 고품질 차도 생활차인 것입니다. 이렇듯 일상적 차생활을 통해서 차(茶)의 덕(德)이 몸과 정신과 생활 속에 서리게 하는 차정신, 이것을 우리는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네 차문화는 몇 사람의 권위나 편부(片富)를 위하여 ‘동네잔치’를 너무 길게 하는 듯 합니다. 다도도 아니고 생활차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다구가 어떻고 물과 불이 어떻고 차 우림이 어떻고를 논하며 이것을 다도인양 착각하고 있으니 담배연기 아지랑이를 강물로 믿는 혼란에 다름 아닙니다. 지금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차(茶)를 복잡하고 어렵고 사치스럽고 신비한 것으로까지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차를 권위나 명예나 부를 얻어가는 쪽으로 삿되게 이용한 어리석은 패악이 빚어낸 현상입니다. 

다반사(茶飯事), 즉 생활차를 회복해야 한국의 차가 살아나고, 차가 살아나야 우리 민족의 흥왕(興旺)한 기운이 살아나게 됩니다. 

[불교신문3624호/2020년10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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