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빈털터리 빚쟁이 돼
대승은 마음 닿는 데까지구나

혜인스님
혜인스님

대승(大乘)은 어디까질까? 크다(大)는 건 얼만큼일까? 그래, 크고 작음을 분별하지 않는 게 진짜 큰 거라는 건 나도 알겠어, 머리로는. 그치만 현실을 사는 풋내기 승려로서, 지금의 내게 대승은 한 천팔백만 원어치쯤 되지 싶다.

대승과 초기불교를 함께 공부하던 학인 시절엔 마치 피카소의 그림을 보듯 아름답지만 난해했었다. 썩어 문드러질 부처를 보지 말라면서까지 법을 강조하시던 초기의 붓다와, 법도 이름일 뿐 집착할 것이 못 된다던 대승의 붓다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소승과 대승을 언제나 따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둘 사이에 ‘중승’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있었으면 양다리 걸치는 거로도 모자랄 뻔했다.

하루하루의 현실을 마주할수록 경전 속 세상은 잡을 수 없는 허공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믿고 의지하는 도반에게 무심코 말을 꺼냈다.

“대승이라는 건, 각자의 욕망을 이뤄주려는 게 아닐까?”
“...?”
“우리 현실이 자꾸 부처님 법하고 멀어지니까, 법만으로는 멀어지는 현실을 잡을 수 없으니까, 원하는 것부터 먼저 들어주고 도와준 다음에야 법이든 뭐든 할 수 있다는 말 아닐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현실은 계속 멀어진다. 때로는 현실 속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부처도 법도 아니요 그냥 ‘관심’일지도 모른다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절에서 만나는 불자들도 스님의 법보다 관심 어린 눈빛과 따뜻한 말 한마디에 훨씬 훨씬 감사해하시는 걸 보면. 그렇다면 멀어지는 현실을 법은 어디까지 따라가야 할까. 일단 끝까지 따라만 갈 순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대뜸 돈을 빌려달라는 분이 계셨다. 알지도 못하는 분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진 돈을 몽땅 빌려드렸는데도 또 부탁을 해오셨다. 빈 통장 잔고를 보여드리고 나서야 처음으로 얼마가 필요하냔 물음 외에, 내가 궁금한 걸 물을 수 있었다.

“지금 저보고 빚쟁이가 돼서 당신 빚을 갚아달라는 건가요?”
“마지막으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결국 내 사정을 묻지도 않고 필요한 금액과 계좌번호부터 부르라던 도반을 소개해 드렸다. 그분을 만나보고는 밤새 고민했다던 그 도반은 다음 날 아침 결국 완곡한 거절의 연락을 보내왔다. 그렇다면 내가 갚을 테니 나한테 빌려달라고 부탁해서 결국 그분께 총 1808만6879원을 드리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분은 겨우 집 나간 엄마 대신 월세방을 지키는 어린 아들 둘의 보금자리를 압류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하셨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은 모두가 한목소리였다. 스님은 돈보다 법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사람은 사기꾼일 것이다. 사기꾼이 아니더라도 스님께 빚까지 져가며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은 최소한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돈을 빌려주면 못 받는 건 둘째치고 그 사람도 정신을 못 차릴 게 뻔하다.

나는 울었다. 고마워서. 내게 진심으로 조언해주고 나와 함께 걱정해주며 나를 무조건 믿어주는 사람들이 고마워서. 슬퍼서. 그분께 평생토록 그런 사람 하나 없어, 모르는 스님에게 자신을 제발 믿어달라며 울며불며 빌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슬퍼서 울었다.

대승은 마음에 닿는 데까지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빈털터리 빚쟁이가 되어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모두의 마음을 담을 진정 큰 수레가 되려면 저 밑까지 더 내려가야겠구나. 저 끝까지 내려가 봐야 크다(大)는 게 얼만큼인지 알 수 있겠구나. 

기다려라 대승아.

[불교신문3623호/2020년10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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