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인과 연에 의한 결과

보이는 현상계 잠재의식 투사
현현되어진 대상, 법임을 알아
대상에 집착 버리는 것이 중요

등현스님
등현스님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모든 생명에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객관적인 세계(器世間)와 각각의 생명에게 다르게 느껴지는 주관적인 세계가 있다. 예를 들어, 지구에 사는 생명은 사람, 짐승, 곤충, 새와 바닷속의 생명이 각각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 생명에게 지구라는 세간은 공통적이지만 각각의 경험 세계는 주관적이다.

이렇게 공통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세계를 공유하는 것이 사람들의 세상, 생명의 세상이다. 그렇다면 이 공통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우연히 발생한 것인가? 인연에 의해 발생한 것인가? 아니면 신이 만든 것인가?

불교는 이 세상이 인과 연에 의한 결과라고 하며, 그 인연과 결과를 섬세하게 설명한 원리가 바로 십이연기이다. 십이연기를 믿는 사람도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존재(有)가 발생한다’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믿는 경우가 흔하다. 무명 때문에 느낌이 발생하고, 느낌에 대한 애착이 네 종류의 취착심(四取)으로 확장되고, 그 사취에 의해서 삼유(三有)가 발생한다는 것이 십이연기의 골자이다.

여기에서 사취는 정신적인 상태이고 삼유는 물질적인 상태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삼유 역시 두 가지인데, 정신적인 삼유와 물질적인 삼유가 그것이다. 정신적인 삼유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대상들에 대한 애착이고, 물질적인 삼유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세계이다. 요컨데 느낌에 대한 애착이 사취로 확장되고, 사취가 삼계에 대한 정신적인 애착들을 일으키고, 그것들이 삼계라는 세계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태어난다는 것이 ‘존재로 인해 태어남이 있다(有緣生)’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 물질을 선택하여 태어나거나, 의식의 투사로 본인이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를 믿는다는 것은 정신이 물질세계를 선택하여 생명으로 태어나거나, 정신이 물질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이 세상의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라는 정신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려 든다. 마음과 업이 이 세상을 만들거나 선택하여 태어날 힘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는 말은 삼계가 잠재의식의 투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잠재의식인 알라야식의 종자식이 십이연기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의타기성).

현상세계가 제8 알라야식에 있는 여러 가지 개념들과 기억들이 투사한 세계라고 한다면, 그런 개념들과 저장된 종자식들은 견분(見分)이고 나타난 현상들은 상분(相分)이다. 즉 전오식과 제6식, 제7 아애식과 외계의 대상들마저도 제8알라야식인 잠재의식의 화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야식은 견분이고 견분에 의해 투사된 영상들은 상분이다. 그러한 견분을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아집이고, 세상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법집이다. 이 모두가 제7 염오식(klista manas)이다.

그렇게 형성된 상분 중 물질은 분별되어진 것(변계소집성)에 해당하고, 전오식에서 제7식까지의 식은 의타기성으로 생멸한다. 알라야식에 의해 투사된 대상들은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진 않지만, 경험 세계에는 존재하기 때문에 또한 허망분별(abhutaparikalpa)이다. 

그러므로 가행위에서는 보여진 현상계가 잠재의식의 투사이고, 그 현현되어진 대상이 바로 법이고 세간임을 알아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외계 대상은 먼저 의식에서 발생되어진 것이기에 의식 속에 있는 개념과 이미지가 실재하지 않음을 먼저 관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난위(煖位)의 수행이다.

그리고 그 의식을 떠나서 따로 바깥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관찰하는 단계가 정위(頂位)이고, 외계 대상이 식을 떠나 따로이 존재할 수 없음을 관찰하는 수행은 인위(忍位)이며, 외계 대상 없이 식 또한 일어날 수 없으므로 의식 자체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 세제일위(世弟一位)라 한다.

이렇게 해서 가행위에는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인 견분과 상분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지하여 일어난 것(의타기성)임과 분별되어진 것(변계소집성)임을 알면, 존재의 실상(원성실성)을 경험하는 견도(통달위)에 들어가는 것이다.

[불교신문3623호/2020년10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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