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용화사 앞뜰엔 가을이면 어김없이 만리향(萬里香)이 돌아온다. 선인들은 향기는 본래 코를 킁킁대며 맡는 게 아니라 듣는 것(聞香)이라 하셨건만, 온라인 법회만으론 만리에 이르는 이 향기도 전할 길이 없으니, 줌(Zoom) 프로그램에도 5D시스템을 도입해달라고 요청이라도 해야 할까 보다. 하여, 봄가을 꽃피고 단풍 물드는 이맘때면, 서울대 총불 법우들을 데리고 캠퍼스를 걷는다.

이른바 ‘캠퍼스 걷기명상’ 개봉박두! 매일 도서관과 강의실을 오가며 걷던 이곳이지만, 오늘의 공기는 새로운 질감으로 가슴을 파고든다. 이런 날 많은 가르침을 들이대지 않아도 좋다. 그저 길을 같이 걸으면 충분하니. 마스크 속에서 푹 발효된, 가슴으로부터 일렁이는 세포들의 노래가 시작된다. 걷기명상은 자연과 교감하며 내면의 소리를 ‘듣는’ 시간.
 

서울대 총불 법우들과 함께 한 ‘캠퍼스 걷기명상’ 모습.
서울대 총불 법우들과 함께 한 ‘캠퍼스 걷기명상’ 모습.

인류가 이 지구별에 첫발을 딛고 산 그날로부터 지금껏, 수없이 묻고 또 물어 온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이 있었다. 해답을 찾아온 인류는, 아무리 정교한 과학적 지식과 복잡한 수식과 철학과 신앙의 체계로도 명쾌히 답을 밝혀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 기원전 6세기경 붓다라는 한 ‘깨어난 자’가 이 행성을 걷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본질을 통과하는 길’이 평등하게 열린다.

진리의 보편타당성과 평등성은 인류를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했다. 걸음걸음, 호흡 호흡마다, 온전히 귀 기울여 이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의 심장 고동 소리를 듣는 시간. 들어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해가 되어야 용서되고, 진실로 화해할 때 자유롭다. 나는 몇십억 년간 함께 해 온 지구별로부터 왔고 지구별로 돌아갈 것이므로, 지구별과 연결되지 않은 나는 없으므로(緣起無我), 지금 지구별의 소리를 듣는 것은 곧 가이아와 함께 해 온 ‘맥락 속의 나’를 듣는 일이다.

참선이 벼랑 끝에 이른 시절이 있었다. 도망치듯 미얀마 명상순례를 나선 길, 붉은 일출 장엄하게 번지던 그 새벽, 난 만달레이 바간의 한 굴 속에 이교도들에게 목이 잘린 불상과 마주 앉아 있었다. 밀려온 깨어남의 기연! “잡석에 불과하지만, 위대한 석공들은 그 속에 이미 계시는 부처님을 본단다.” 없던 부처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정을 쪼아 군더더기 업장의 무게만 덜어내 주면 본래 있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이미 집에 도착해 마친 길’을, 하여 오늘 우린 묵묵히 들으며 걷는다.

용화사 다실엔 지구본 하나가 가끔씩 돌려진다. 복잡하게 선(線) 그어진 크고 작은 국가들, 서로 먹고 먹히며 겪어 낸 반복의 역사가 들려주는 잔혹한 피비린내를 만리향이 품어안고있는 미학은 참으로 절묘하지 않은가! 동서와 남북으로 갈라져 갈등으로 점철된 우리 슬픈 대한민국 가이아의 심장소리는 지금 어떨까? 이런 시대를 온몸으로 껴안고 살아내야 하는 우리 학생들의 심장소리는 지금 어떠한가?

내 방식대로 모두를 뜯어 맞추고 획일화시키려는 유아적인 통일을 고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한 존재 한 존재가 본래 갖추고 태어난 실상(實相)에 눈 뜬 삶,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 낱낱 삶이 ‘최상의 축제’로 빛나도록 허용해주는 성숙한 보살의 문을 화쟁(和諍)하는 자, 그는 늘 듣고 있다. 대학생 법우들이여, 지금 눈앞에 놓인 그 문은, 세상으로부터 닫아걸기 위함인가? 열어 만나기 위함인가?

만리향 가지 끝에 앉아 꽃 따 먹다 말고 눈 마주친 참새 한 마리, 느낌표 하나 던져주곤 가을 허공으로 힘차게 날아오른다. “스님!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진 못해요. 전단향도, 따가라향도, 말리까향도요. 하지만 참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니, 지구별 모든 방향으로 퍼져간답니다.”(<법구경-담마빠다> 꽃의 품) “저랑 같이 문향(聞香)하며 걸으실 참사람, 거기 누구 없소? 짹!”

[불교신문3623호/2020년10월24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