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49> 아차산 영화사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49> 아차산 영화사
  • 박부영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20.10.22 13:31
  • 호수 3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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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민주 복지…불교사회화 선도 천년고찰

월주스님이 만들고 이끈
인권 환경 국제구호 등
한국불교 사회화 발상지

의상대사 창건 천년고찰
부처님오신날 기념비 우뚝

10ㆍ27법난이 일어난 지 40년이다. 1980년 10월27일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불교정화를 명분으로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하여 종단 지도자, 고승대덕 스님들을 강제 연행하여 고문한데 이어 계엄군을 동원하여 전국 사찰에 난입해 훼불을 자행한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언론은 스님들을 부정축재자 파렴치범으로 매도하고 사찰을 범죄자 소굴로 왜곡했다. 수많은 불교신자가 실망하여 불교를 떠났으며 불교는 만신창이가 됐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자리한 아차산 영화사 전경. 한국불교를 규정하는 ‘불교사회화’가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자리한 아차산 영화사 전경. 한국불교를 규정하는 ‘불교사회화’가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27법난 40주년과 월주스님

10·27법난은 불교계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다. 1970년대까지 호정권불교라는 오명을 무릅쓰고 정권을 지지했던 스님들이 대오각성했다. 산에서 도시로 내려오고 젊은이에게 다가갔다. 지지부진했던 포교 신도교육에 일대혁신이 일어났다. 사회민주화에도 눈을 떴다. ‘사회적 모순 해결 없이는 개인의 행복도 수행자의 해탈도 무의미하다’는 자각이 젊은 스님들 사이에 번졌다.

1980년대 불교를 주도했던 사회민주화, 불교자주화, 대중교화 운동이 1990년대 종단 민주화로 계승되고 오늘 한국불교를 규정하는 정체성이 되었다. 남방의 계율 중심, 중국의 정토불교와 다른 개인의 해탈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구현하는 ‘한국적 대승불교’가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됐다. 

서울 광진구 아차산 영화사(永華寺)는 개인 수행과 사회가 결합된 ‘한국불교’ 발원지다. 종단 원로회의 의원이며 총무원장을 역임한 월주스님이 이곳에 주석하며 새로운 한국불교를 만들고 전파했기 때문이다. 월주스님은 10·27법난 피해자의 대표적 인사며 상징이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구부가 자행한 10·27법난의 직접 계기는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동참하지 않은 괘씸죄였음이 이후 정부 차원 진상 조사에서 밝혀졌다.

1979년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데 이어 1980년 5·18계엄확대로 모든 국가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본격적으로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각계각층의 지지 선언이 이어졌다. 불교계도 동참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40대 젊은 나이에 조계종총무원장에 오른 월주스님은 신군부의 뜻과 정 반대로 움직였다.

자체 정화에 나서면서 불교자주화를 주장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 조계종은 정치 사회 심지어 외교 분야까지 정부와 철저하게 보조를 맞췄다. 호국불교 전통에다 통합종단 출범에 박정권의 지원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산중에서 참선을 통해 성불을 추구하는 수행풍토 영향도 컸다. 

그러나 조계종을 탄생시킨 ‘일등공신’ 불교재산관리법은 불교가 성장하면서 족쇄로 작용했다. 사찰 해우소 한 칸 마음대로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제약이 심했다. 정부 지원 아래 교세를 확장하면서도 대놓고 정부를 비판하던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정부를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심지어 동원되면서도 간섭과 제약에 시달렸다. 굴욕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종단 지도부는 정부 앞에 한없이 나약했다. 이 모든 것이 불교 자주성을 가로막는 불교재산관리법 때문이었다. 

종정 중심제에서 총무원장 중심제로 바뀐 뒤 첫 총무원장에 오른 월주스님은 종단 출범 후 20년 만에 불교재산관리법 폐지를 주장했다.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라는 정부와 군부의 요구도 물리쳤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월주스님은 강제로 연행된 뒤 온갖 수모를 겪고 강제로 총무원장 직에서 물러났다. 
 

영화사 일주문.
영화사 일주문.

한국불교가 가야 할 사회화 

월주스님은 ‘자의반 타의반’ 해외로 나갔다. 그러나 해외 생활은 스님의 견문을 넓히고 한국불교가 앞으로 가야할 길을 발견하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 종교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함께 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음을 일찍부터 깨달았던 스님은 미국에서 통일 환경 국제구호 인권의 가치를 보았다. 한국불교가 놓쳤던 덕목이다. 환경 인권 국제구호 등 모든 사회 분야가 이후 ‘불교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월주스님에 의해 불교 품으로 들어왔다.

10·27법난 이후 1980년대 종단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군과 언론에 의해 파렴치 집단으로 낙인 찍혀 고승대덕의 신뢰가 떨어지는 바람에 권위가 서지 않았다. 미숙한 종단 운영이 더해져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젊은 스님들은 현대식 교육을 받고 사회민주화, 환경, 통일 등에 눈을 뜨고 일반 시민단체와 힘을 합쳐 불교의 대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조계사가 오욕과 분쟁으로 지탄받을 때, 영화사는 새로운 불교, 사회와 함께하는 한국불교를 희망하는 젊은 엘리트 스님과 청년불자가 찾는 미래의 희망이었다. 

1994년 종단개혁으로 1980년대 사회민주화, 새로운 불교를 이끌었던 젊은 스님과 청년불자, 재가 지식인들이 월주스님을 총무원장으로 모신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0·27법난으로 인해 꺾였던 종단자주화 불교사회화의 꿈이 25년 만에 날개를 폈다. 월주스님과 젊은 스님들이 꿈꿨던 한국적 대승불교는 종단운영의 기본 방향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른다.

불교와 사회의 만남이 영화사에서 시작했다. 1991년 대구 낙동강 페롤 방류 사태로 시작한 환경운동, 조국과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잊혀졌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모신 나눔의 집, 북한 동포의 기아 참사를 돕기 위한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계 최초의 국제구호기구 지구촌공생회 등 월주스님이 시작하고 불교와 사회에 퍼뜨린 자비나눔 활동은 영화사에서 꿈을 꾸고 일으켰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기념하는 비석.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기념하는 비석.

10월14일 찾은 영화사에는 가을이 내려앉았다. 아차산에서 내려오는 단풍이 영화사 위에도 어른거리고 평일인데도 산을 찾는 등산객이 적지 않게 절을 스쳐갔다. 절은 고요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이웃한 초등학교도 조용하다. 

절 뒤편으로 돌아가면 비석이 서있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지정을 기념하며 그 내력을 적은 비석이다. 영화사에 이 비석을 세운 까닭은 월주스님이 제정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1945년 미군정과 더불어 정부 지정 국가공휴일이 되었지만 2000년 가량 내려오면서 거의 대부분 국민이 기념하는 초파일은 제외됐다. 1960년대부터 종단은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지정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듣지 않았다.

1970년 7월 총무원장 청담스님이 교무부장에 월주스님을 임명한 뒤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운동은 정부대상 투쟁처럼 흘렀다. 전국의 불자가 버스를 타고 상경하고 경찰이 이를 막는 등 불교와 정부 간 대립과 공방이 펼쳐졌다. 월주스님이 그 운동을 지휘했다. 법정스님이 불교신문 사설을 통해 당위성을 알려 전국의 불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독실한 불교신자 용태영 변호사가 무료 변론에 나서고 애를 쓴 덕분에 1975년 마침내 부처님오신날 공휴일이 제정됐다. 종단, 불자지식인, 정치인이 합심하고 전 불자가 동참한 운동이 만들어낸 역사적 쾌거다. 그 내력을 적고 기념하는 비가 영화사에 서있다.
 

세조가 기도하고 병을 고쳤다는 영화사 미륵전.
세조가 기도하고 병을 고쳤다는 영화사 미륵전.

세조가 기도하여 지병 치유

영화사는 천년 고찰이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의상대사가 화양사(華陽寺)란 이름으로 창건했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화양사 등불이 궁궐까지 비친다하여 용마산 기슭 군자봉으로 이건했다가 1907년 현재 자리로 다시 옮겨오면서 영화사라 했다. 영화사 미륵전 미륵석불입상은 세조가 기도하여 지병을 치유했다는 내력을 담고 있다. 대처승이 점유하던 사찰을 월주스님이 정화했으며 한 때 젊은 스님들이 현대 학문을 연마하던 승가대학이었다. 

10·27법난 4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과거를 떠올리는 또 다른 소식이 전해졌다. 월주스님이 30여 년 전 세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보금자리 ‘나눔의 집’을 운영하는 조계종 스님 이사들을 경기도가 해임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 월주스님이 나서고 당시 종정 월하스님이 약값 차비 등을 아껴 모은 거금을 보태 갈 곳 없고 속가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던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셨다.

주민들이 그 사실을 알고 항의하는 바람에 집을 구하지 못하고 떠돌다 독실한 불교신자가 지금의 집을 희사해 나눔의 집이 만들어졌다. 경기도는 일부 시민단체와 언론에 밀려 운영상 문제를 들어 월주스님을 비롯한 종단 이사진을 전원 해임하는 식이다. 40년 전 무력으로 빼앗았던 권력이 진보단체로 바뀌었을 뿐, 불교를 희생양 삼는 행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나 지자체가 언제 이토록 신속하게 법인 이사진을 교체한 적이 있었던가? 온갖 회계 인사 부정을 저질러도 고발조차 않던 정부가 불교가 운영하는 학교나 단체에 대해서는 재빠르게 반응한다. 현 정부와 가까우며 기독교계통인 정의기억연대와 윤모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대하는 태도와 북한에 비판적이며 보수적 성향의 월주스님과 나눔의 집에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전혀 다른 모습에서 40년 전을 떠올리면 지나친 비약일까? 

영화사를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10·27법난은 끝나지 않았다. 사회를 향한 우리의 노력과 정성이 부족한 업보인지 모른다. 4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전됐지만 아흔을 바라보는 월주스님에게 지운 불교사회화의 짐은 여전히 크고 무겁다. 수많은 ‘영화사’와 ‘월주스님’이 나올 때 비로소 10·27법난의 비극도 끝이 날 것이다.
 

영화사 유치원 모습.
영화사 유치원 모습.

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622호/2020년10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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