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편리하고 목탁소리 들을 수 있으면 명당”

수천년 강토 명당 남아있겠나
전통 음택풍수, 묘지풍수는
이미 소용없어진 시대 인식

불교장례는 ‘화장’ 불자라면
‘내 스스로 선업지어서
내 복만큼 산다’고 생각해야

풍수지리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3회에 걸쳐서 음택, 양택, 인테리어 풍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풍수(風水)라고 하면, 말 그대로 ‘바람과 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즉 풍수지리란 ‘물과 바람이 잘 조화된 지리적 여건, 이것에 대한 학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풍수지리의 핵심은 바로 ‘조화된 자연환경’, ‘균형 잡힌 산천 경계’입니다. 특히 음택에 있어서는 이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음택 풍수에 대한 이론이 참으로 다기망양(多岐亡羊) 하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묫자리를 보고도 지관마다 주장이 다른 경우를 보게 됩니다.
 

불교식의 명당은 교통 편리하고 늘 목탁소리 들을 수 있는 ‘법당형 납골당’. 사진은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가 운영하고 있는 ‘법당형 납골당’ 모습.
불교식의 명당은 교통 편리하고 늘 목탁소리 들을 수 있는 ‘법당형 납골당’. 사진은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가 운영하고 있는 ‘법당형 납골당’ 모습.

아무튼 선조들은 음택 풍수에 집착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즘 와서는 이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화장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묘지의 관리가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전처럼 한마을에서 대를 이어 살던 시대가 아니고 그 후손들이 다 도회지로 나가서 살다 보니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들어서는 묘를 쓰기보다는 반대로 묘를 개장(改葬) 하여 그 안에 있는 뼈 또는 일부 흙을 가족 공동묘지 또는 문중 공동묘지로 옮기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 무일선원의 뒷 골짜기의 언덕에도 최근 조성된 김씨 종중 묘가 있는데, 그런대로 보기가 괜찮습니다. 조상 앞앞에 작은 비석을 세워서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이 산 주위에 흩어져 있는 김씨들의 묘가 거의 다 한쪽으로 모였다고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뒷산을 포행하다 보면 아직도 묵묘가 많습니다.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벌초를 했었는데, 재작년부터 아예 산소를 방치해서 아카시아 등 잡목이 무성해진 경우도 보게 됩니다. 아마도 후손이 끊어졌든지, 가족 분쟁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 시대에 산소를 쓰는 것이, 이러한 부작용이 초래됨에도 불구하고 동기감응(同氣感應)을 들먹거리며 “묘를 잘 쓰면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 하니, 꼭 묘를 써야 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봅시다. 새 터에 소위 말하는 ‘명당’이 나온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수천 년 내려오면서 명당을 찾았을 텐데,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 명당이 남아있기나 하겠습니까?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혹자는 묘를 이장해 간 뒤, 그곳이 명당이라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묵묘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 묵묘가 명당이라면 묵묘로 방치되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그곳이 명당이라 할지라도 다시 다른 묘를 쓸 수 없습니다.

풍수지리의 아주 기본 상식에는 “한 번 썼던 묫자리는 기운이 이미 다 쇠해졌기 때문에 묘를 써도 아무 소용 없다. 오히려 큰 화를 당할 수 있는 악 터다”라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런저런 경우를 따져보더라도 명당 터가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또 한편 요즘은 ‘공원묘지’라 해서 많이 씁니다만, 여기 또한 명당을 찾기는 대단히 힘듭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와서는 음택 풍수, 즉 묘지 풍수는 소용없어진 상황이 되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즉 ‘묘를 잘 써서 발복하겠다’라고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묘를 잘못 써서 물이 찬 경우가 없잖아 있습니다. 물이 차지 않은 일반적인 경우에는 한 30년 정도 되면 뼈까지도 거의 다 삭아 없어집니다. 그러한 곳이 좋은 터입니다. 만일 ‘내 조상 묘에 물이 차지 않았겠나’ 하고 의심이 든다면 개장을 해서 화장해야 합니다. 화장한 이후 납골 봉안당에 모시거나 수목장을 하면 됩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보통 묘를 써서 발복하는 기간은 30년 정도입니다. 반대로 묘로 인해 화(禍)가 발생하는 경우도 30년 정도 봅니다. 찝찝해서 개장을 하였는데 물이 차있고 시신이 썩지 않은 상태라면 당연히 화장해야 합니다.

사실 묫자리에 대해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묘를 잘못 써서 그렇다’ ‘묘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 그러한 얘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대통령 한 분이 돌아가신 후 묘를 썼는데, 이것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묘가 구설수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 후손이 잘못된 때가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은 ‘아, 그가 그렇게 된 것은 대통령의 묘가 흉터라서 그렇다’라고 했습니다. ‘묘 터를 잡은 지관의 잘못이 크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가장 내로라하는 지관이 그 묘 터를 잡았을 텐데,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손들이 좀 안 풀린다 해서 그 핑계를 묘 터에 갖다 붙이는 것은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서 그 대통령의 자손들이 잠시 아주 잘 되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또 달리 말합니다.

“봐라, 묘 터가 좋아서 그렇다. 그 지관이 명지관이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상황에 따라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운이라고 하는 것은 늘 기복이 있기 마련입니다.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늘 한 행렬로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대통령의 후손이 이번에는 아주 잘못되었습니다.

이제는 악 터니 명당 터니 하는 말을 지껄이던 사람들이 쑥 들어갔습니다. 묘 터에 대해서는 아예 말도 꺼내지 아니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잘되고 잘못된 것은 다 자기 복이지…”라고 생각합니다. 몇 번의 착오를 거치면서 제정신들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 광명 천지에 살면서 우리의 생각이 어느 정도는 합리적이라야 합니다. 

여기서 참고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혹시 고인의 뜻에 의해 묘를 쓸 경우에는 3대까지는 관리가 되는 그런 위치를 잡으셔야 하고, 우선 물 빠짐이 잘 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저 전망 좋고, 물 빠짐이 좋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미 명당은 없습니다.

제가 호주, 미국에 나가서 포교를 할 때 묘지를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들의 묘지는 동네 바로 옆에 평평한 곳에 공동으로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배산임수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난하게 살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보다 더 잘 삽니다.

한편으로는 서구 사람들은 성당이나 교회의 바닥에다가 시신을 묻는 수도 있습니다. 이 또한 그들의 관습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라고 했던 호킹 박사도 성당 바닥에 묻혔습니다. 후손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저 서구 사람들은 묘를 씀에 있어서 관습과 편리성과 위안 방편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처럼 음택의 풍수지리에는 집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음택의 풍수지리를 따지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봐야 합니다. 옛날 저희들이 어릴 때만 하더라도 그런 걸 많이 따졌습니다. 불과 30~40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 와서는 음택 풍수지리를 논하는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아주 잘된 일입니다. 좀 깨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내 복대로 산다. 내가 열심히 해서 내 스스로 선업(善業) 지어서 내 복만큼 산다. 조상의 묘 터로 덕 볼 생각 없다.’ 

그렇다면 우리 불자의 입장에서는 고인을 어떻게 모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까를 살펴보겠습니다. 불교의 장례는 화장이 원칙입니다. 화장을 하면 육신은 없어지고 영식(靈識)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묘 터로 인한 일체 잡음은 없어집니다.

시신이 있음으로써 거기서 기운이 발산되고, 그로 인해 ‘득(得)과 해(害)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화장은 후손들에게 이익도 손해도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명당이 없는 이 시대에 묘지로 인한 모든 불안감을 없앱니다. 돌아가시고 화장한 재를 처리함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산이나 강에 가서 뿌리는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위법입니다. 둘째는 수목장이라 해서 나무 밑에 화장한 재를 묻는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납골당에 모시면 됩니다. 저는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를 운영하면서 신도님들의 사후 안락처를 꼭 제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아주 어렵사리, 도심 사찰 최초로 ‘법당형 납골당’을 설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년 전에는 감포도량에도 납골당 및 수목장을 만들었습니다. 사찰 안에 납골당이 있다 보니 그 후손들이 거의 불교 안으로 흡수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불교식의 명당은 교통 편리하고 늘 목탁소리 들을 수 있는 ‘법당형 납골당’이라고 확신합니다. 관세음보살. 

* 이 글에 대한 내용은 한국불교대학 유튜브불교대학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無一 우학 한자성어 ⑩ 高峰難得 勝學難達(고봉난득 승학난달)  

높은 봉우리는 오르기 어렵고, 수승한 공부는 통달하기 어렵다

무일선원 무문관이 위치하고 있는 산 이름은 연대산입니다. 꼭대기인 무일봉까지는 두 시간 정도 소요됩니다만, 더운 여름날 오를 때는 힘이 많이 듭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저의 체력도 문제이고, 특히나 바이러스를 가진 진드기가 많아서 아주 신경 써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진드기는 다 아시다시피 SFTS와 쯔쯔가무시병으로 인간을 위협합니다.

그리고 또 간간이 멧돼지 등 산짐승이 출현하여 걸음을 멈칫거리게 합니다. 어쨌든 몇 달 만에 한번 마음을 먹고 산을 오를 때는 양 주머니에 가득 음료수 팩을 넣습니다. 예닐곱 개의 팩을 다 비워야 산 정상에 올라섭니다. 여름 어느 날 산을 오르면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고봉난득(高峰難得)을 짓게 되었습니다. 

승학난달(勝學難達)은 ‘무문관 수행이 참으로 어렵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고 지은 한자성어입니다. 이곳 무문관은 철저한 폐문 상태에서 하루 한 끼 먹는 일종식(一種食)으로 유명합니다. 정말 어지간한 결심과 신심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힘듭니다. 한 번 들어오면 3년을 공부해야 합니다.

힘을 어느 정도 갖춘 수행자가 아니고서는 견디기 힘든 곳입니다. 만일 3년을 버티기만 해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큰 성취를 했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정도는 자기 혁신에 필요한 최소한의 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무문관 공부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쉬운 얘기지만, 스님들이 들어와서 정진하다가 끝을 못 맺는 경우가 반 정도 됩니다. 심지어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수도 가끔 있습니다. 참으로 수승한 공부는 통달하기 어렵습니다. 성불작조(成佛作祖)가 애초부터 그리 호락호락한 명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러하셨고, 모든 조사님들이 그러하셨습니다. 대사일번(大死一番) 해야 절후소생(絶後蘇生)함을 각오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불교신문3622호/2020년10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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