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 가끔 나를 불러 앉게 한다오

“어느덧 벽(壁)을 마주해 앉음이 잦아졌소. 벽은 가슴에 여백을 길러주고 오늘도 잠자코 벽은 나를 불러 앉히오”라는 이호우 선생의 시는 나에게 맛깔 나는 한 작품을 남기는 기회를 주었다. 시가 나에게 깊이 울림이 되었던 것은 동방 선종의 초조(初祖) 달마(達磨) 대사의 9년 면벽과 벽관(壁觀)이라는 문자에 매여 있는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벽을 향해 앉아서 말이 없으니,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벽을 보는 바라문이라 하였다. 수행자는 달마가 벽을 보느냐 벽이 달마를 보느냐 라는 이원적 관계를 넘어서야 본래 자기 부처를 만날 수 있다. 

9년이라는 한정된 세월이었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을 초조로 하는 선에서 28대조 달마는 누구를 기다린 것일까? 시절 인연의 도래를 위한 인고의 시간, 마주한 바위에는 어슴푸레 달마대사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하니 수행 부족한 나로서는 어찌 할 수가 없다.

“모릅니다.” “무공덕”이라는 숭산(崇山)이 무너지고 소림굴이 깨어지는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한 양무제,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본체가 스스로 공적하여 세상에 함이 있는 일로는 구할 수 없다는 가르침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달마 가신 뒤 깊이 아파했다.

몇 년 전 아부다비 루브루 박물관 아트샵에서 만난 엽서 한 장 ‘무공덕(無功德)’이라는 작품, 서예인들의 공부 부족으로 내몰린 서예시장의 현실을 직면하면서 많이 아파했던 기억이 난다. 

가끔씩 앞산 송화산 봉우리를 안고 마주 앉는다. 몸을 고르고 마음을 내리고 숨을 다스린다. 잃어버렸던 본분사(本分事)를 찾아 나서고 앉았다는 생각마저 없어지는 그날이 있을 것이라 믿고 기다린다.

9년 면벽에 달마는 혜가(慧可)스님과 시절인연의 열매를 맺었건만, 나와 서예 인연 중에 누가 백설위에 붉은 눈을 내리게 할 것인가?

벼루에 속상한 시커먼 먹물이 하얗게 빛난다. 솔뫼 정현식 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불교신문3622호/2020년10월21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