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茶聖’ 계승하는 국내 최대 차 축제

사찰의 새벽예불은 차를 올리면서 시작된다. “제가 이제 맑고 깨끗한 물로 모든 감로의 차를 만들어 삼보님 전에 받들어 올리나니, 원하옵건대 자비로이 받아주소서.” 다게(茶偈)의 내용처럼, 차는 이른 시기부터 부처님께 올리는 주된 공양물이자 수행자들이 심신을 닦는 소중한 방편으로 삼아왔다. 다도를 정립하고, 차를 둘러싼 심오한 사상과 풍성한 문화를 남긴 초의선사(草衣禪師)는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추앙받는 분이다. 이에 가을이 되면 선사를 기리고, 그 뜻을 계승하는 국내 최대의 차축제가 남도에서 전승되고 있다. 
 

초의선사 부도 앞에서 올리는 헌공다례(2008년). Ⓒ대흥사
초의선사 부도 앞에서 올리는 헌공다례(2008년). Ⓒ대흥사

묘한 이치 담긴 감로차

불교에서는 차를 ‘감로다(甘露茶)’라 일컫는다. 감로는 범어 암리타(amrta)에서 온 용어로, 불로장생하는 신묘한 천상의 음료를 말한다. 이를 마셔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가르침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차를 끓여 마시는 데 현묘한 이치가 있어 ‘다도(茶道)’라 했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은 물론 영가를 천도하는 자리에도 차를 올려 감로의 법문으로 삼았다. 

이처럼 소중한 공양물이자 수행의 영역이기도 했던 차는 이른 시기부터 한국불교와 나란히 흥망성쇠를 함께해왔다. 신라 경덕왕 때 충담(忠談) 스님은 매년 양기 충만한 3월3일과 9월9일에 다구(茶具)를 들고 남산에 올라 미륵세존께 차를 올렸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전한다. 신라의 조각상과 탑·부도에 차공양 모습이 새겨져 있듯이, 불전에 차를 올리는 헌다의식은 이른 시기부터 정착되어 향, 등, 꽃, 과일, 쌀과 함께 육법공양물의 하나로 자리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지배층에도 차가 성행하여 중요한 국가행사에 진다의식(進茶儀式)이 빠짐없이 등장했고, 외국사신과 신하에게 내리는 귀한 하례품의 하나였다. 궁중에는 차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다방(茶房)을 두었으며, 왕실의 비호 아래 민간에 수준 높은 차가 생산되고 사찰에 차를 공급하는 다촌(茶村)이 생겨났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초기부터 주다례(晝茶禮)라는 용어가 왕조실록에 등장하듯이 낮 제사에는 차를 올렸고, 정비된 <주자가례>에도 술을 올린 다음 헌다(獻茶)의 순서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차를 불교의 산물로 보면서, 관혼상제에 쓰던 차를 술과 물로 대체하는 등 제도적 다례(茶禮)의 퇴조와 함께 차 문화도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와 별개로 차는 여전히 스님들과 지식층에서 수양과 사유의 매개물로 삶의 일부를 이루었고, 시·서·화의 발달과 함께 문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 가운데 조선후기에 와서 다도는 황금기를 맞게 되었으니, 그 중심에는 대흥사 일지암에 주석하던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있었다. 
 

나무대롱을 타고 돌확으로 흘러내린 일지암의 유천수. Ⓒ산정
나무대롱을 타고 돌확으로 흘러내린 일지암의 유천수. Ⓒ산정

茶禪一味 초의선사

“차는 물의 신(神)이오, 물은 차의 본체이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됨으로써 참다운 정기가 존재하듯, 물과 차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중정(中正)을 잃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 초의선사의 말이다. 조선후기 불교사를 빛낸 초의선사는 차를 우려 마시는 현묘한 이치가 선(禪)과 다르지 않음을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일생으로 보여주었다. 

초의스님은 삶의 중반기에 두륜산 대흥사의 동쪽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여 년간 홀로 정진하며 다도와 함께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었다. 당시 사찰에서 차를 마시는 전통이 깊었으나 본격적인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데 비해, 이곳에서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해 다도정신을 널리 알리며 차 문화의 중흥을 이끈 것이다. 이에 그가 반평생을 머문 일지암은 다도의 탄생지라 불리며 지금까지도 다인(茶人)들의 순례가 이어진다. 

한국의 다경(茶經)이라 부르는 <동다송>에서 초의선사는 우리 차의 색과 향, 기운과 맛(色香氣味)이 중국차에 뒤지지 않음을 설파하고, 지리산 화개동의 드넓은 차밭의 우수함을 찬탄하였다. 또한 “늙어 쇠한 찻잎을 뒤늦게 따서 땔감 말리듯 볕에 말려, 나물국 끓이듯 솥에 달이니 빛깔은 탁하고 맛은 쓰고 떫다”며 법도에 어긋난 제다풍속을 한탄하고, 차를 채취해 만드는 법, 끓이고 마시는 법, 성질과 효능 등을 정리했다. 

특히 정약용과 김정희 등 당대의 다인들과 교류하며 차와 사상의 만남으로써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강진에서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짓고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용과의 만남은, 젊은 시절 초의스님이 다도의 정수를 깊이 체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갑이었던 추사와는 허물없이 농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대도, 그대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차만은 재촉하오. 만약 차 보내기를 지체하면 마조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을 받을 것이오.” 남도와 한양을 오가는 서신에서, 추사는 스님에게 차를 보내달라며 이렇게 보채거나 을러댔다. 

당대의 대선사였던 백파선사(白坡禪師)와 활발한 선 논쟁을 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흥사에서는 서산대사의 의발을 모신 이후 13명의 대종사를 배출했는데, 마지막 대종사가 초의스님이었다. 이처럼 차를 둘러싸고 신묘한 사상과 호방한 기상이 만연한 가운데, 대흥사는 불교다도의 중심지로서 해마다 초의문화제를 열어 그의 다도정신을 계승해가고 있다. 
 

일지암에서 유천수를 긷는 모습.
일지암에서 유천수를 긷는 모습.

일지암 복원, 초의문화제 개최 

대흥사에서는 초의스님의 기일인 음력 8월 2일이면 대웅보전에서 조실 스님과 본·말사 스님들이 모여 조사다례를 봉행해오고 있다. 초의문화제(草衣文化祭)는 이와 별개로 ‘초의스님과 차’를 조명하고자 대흥사와 함께, 해남다인회를 중심으로 한 전국의 다인들이 주체가 되어 치르는 차축제이다. 

초의스님의 삶과 사상의 터전인 일지암은 1866년 스님이 입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나서 흔적 없이 사라진 터였다. 다만 그의 방계손이자 대흥사 주지를 역임한 응송(應松)스님이 광복 이후 초의스님의 자료를 수습해 연구하며 차 전통을 이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대흥사와 전국 다인들이 초의스님을 추모하고 그의 뜻을 계승하고자, 오랜 현장답사와 고증을 거쳐 1980년에 새로 띠 집을 지어 일지암을 복원하였다. 샘과 물확은 물론, 차를 끓이던 다조(茶竈)와 좌선석(坐禪石)까지 옛 모습대로 갖추어졌다. 

이어 1992년에 제1회 초의문화제를 시작으로, 해마다 기일이면 일지암에 올라 헌다례(獻茶禮)를 봉행하고 차와 관련된 다양한 문화행사가 이어졌다. 한때 스님의 탄생시기이자 찻잎이 나는 봄철에 맞추어 개최시기를 양력 오월로 옮겼다가, 다시 양력 시월의 가을축제로 정착되었다. 며칠에 걸쳐 대흥사 경내는 풍요로운 차축제의 장으로 문을 활짝 열고, 일지암과 부도전, 초의선사 동상 앞에서는 격조 있는 다례가 펼쳐졌다. 

초의문화제는 점차 전국의 다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으로서 위상을 지니게 되었고, 차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함께 차 문화를 즐기는 종합축제로 자리 잡았다. 또한 연례행사에 그치지 않고 <초의전집> 발간을 비롯해 다인회관 설립, 다시(茶詩) 강독회 개설, 차문화 관련논문 공모 등 내실 있는 기념사업이 이어졌다. 축제에서는 인문학특강, 음악회, 차유적지 순례, 다식 경연대회, 차 만들기 체험 등 차를 둘러싼 다양한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이처럼 가을의 전통산사에서 풍성하고 다채로운 차 문화가 펼쳐지는 가운데, 초의문화제의 핵심으로 전승되는 것은 일지암에서 유천수(乳泉水)를 길어와 헌공다례를 봉행하고, 육법공양과 선고다인 헌다례를 올리는 일련의 의식이다. 

茶로 하나 되는 무차법회

초의문화제는 일지암에서 찻물을 길어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스님과 여섯 명의 동자가 암자에 올라, 바위틈에서 솟아나 나무대롱을 타고 돌확으로 흘러내린 청정한 샘물을 떠서 항아리에 짊어지고 오는 것이다. <동다송>에서 초의스님이 “나에게 유천(乳泉)이 있어 이 물을 떠서 찻물을 끓이네”라고 노래했던 샘물이다. 이에 일지암의 샘물을 유천수라 하고, 샘물을 기르는 동자를 유천동(乳泉童)이라 부른다. 

샘물을 짊어지고 산길을 내려오다가 초의스님이 세운 동국선원(東國禪院)에 멈추어 염송과 함께 예를 올린다. 이곳은 수많은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방부를 들여 정진하며 선풍을 드날린 선방으로, 초의스님의 선맥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의례장소는 조금씩 바뀌기도 하는데, 2015년 참관 당시에는 유천동 일행이 초의스님의 동상 앞에 도달하여 헌공다례(獻供茶禮)를 올렸다. 다인들이 다구를 펼쳐놓고 일지암에서 길어온 유천수로 직접 차를 끓여 스님께 올리는 다례이다. 

이후의 의식은 전국에서 모인 스님들, 다인들, 동참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현전 앞 특설무대에서 펼쳐졌다. 먼저 헌공다례를 마친 스님과 유천동이 행렬을 이루어 무대에 올라 예를 표하고, 초의스님과 역대 조사들에게 향·등·꽃·과일·쌀·차를 차례대로 올리는 육법공양의 장엄한 의식이 봉행되었다. 이어지는 선고다인(先故茶人) 헌다례는 17인의 스님들을 비롯해 일백 명이 넘는 다인에게 차와 함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다. 

헌다례에서 염송하는 선고다인 제문(祭文)에 “이 세상 가득 어리는 생명 가운데 으뜸인 싱그러운 한 맛, 옛 조주스님이 중생들에게 권하였듯 일지암 유천수에 감로의 차를 달여 바칩니다. 다인 영가들이시여, 부디 이 세상 모든 괴로움 쉬시고, 저 은하의 강물을 타고 반야용선에 기대어 극락왕생하소서”라는 내용이 있다. 성속과 생사의 분별없이 축제의 장에 다향(茶香)이 사라지지 않으니, 초의문화제는 차로써 하나 되는 무차법회(無遮法會)의 성격을 지녔다. 

[불교신문3621호/2020년10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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