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의 고락 없애려면 육바라밀 실천과 함께 기도와 참선수행 하길

역사상 창궐한 숱한 전염병
전쟁보다 많은 생명 앗아가

코로나도 인과의 수레바퀴
각자의 업으로 문제 생겨나

스스로의 업은 스스로 멸하고
중도의 마음으로 인과 없애야

진우스님
진우스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지구를 삼킬 기세다. 10월 현재 세계적으로 코로나 확진자는 3414만명을 훌쩍 넘어섰고, 최근에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까지 확진돼 세계 경제에 악재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세상 모든 것은 일체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연기(緣起)하니, 이는 정치 경제 사회 코로나 전쟁 평화도 마찬가지다.

전염병이 사회를 뒤흔드는 예는 인류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가장 오랜 ‘공포의 감염 질환’은 나병(癩病)이다. 11세기 십자군전쟁 도중 중동 지역에서 처음 발생한 나병균은 유럽으로 옮겨진 이후 무려 200년간 인류를 집단적 공포에 빠뜨렸다. ‘페스트’(pest)로 불리는 흑사병 역시 유럽 인구의 3분의1 가량을 앗아간 전염병이다. 천연두는 인류 역사에서 아즈텍제국과 잉카제국을 사라지게 한 주범이다. 

20세기에 가장 크게 유행한 것은 스페인 독감이다. 1차 세계대전 뒤 귀환 병사들을 통해 세계에 전파되기 시작한 1918년부터 2년여 동안 창궐한 스페인독감으로 동서양을 망라해 5000만명이 숨지는 참사가 터졌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죽은 사람이 1500만명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인명 손실을 가져왔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국에서는 흔히 무오년 독감(戊午年毒感)이라고 하는데, 740만명을 감염시켰고 14만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밖에도 사스, 신종플루, 에볼라, 메르스, 지카 바이러스까지, 어찌 보면 인간끼리의 싸움인 전쟁보다도 훨씬 공포스러운 죽음의 안내자다. 

이같은 현상은 왜 일어날까? 부처님의 말씀에 의한 불교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고(苦)를 떠나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괴로움 없는 즐거움이 없고 즐거움이 없는 괴로움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해석은 즐거움을 떠나야 괴로움이 없어진다고 해야 한다. 즉 즐거움과 괴로움을 모두 떠나야 한다. 물론 선적인 관점에서는 떠난다는 자체도 없어야 한다. 떠나는 것 또한 머무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도라는 말을 덧붙이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대적인 현상을 인과라고 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잡아함경> ‘제일의공경’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此滅故彼滅)”

이는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만드는 내 마음의 모습을 말한다. 아침에 해가 뜨니 반드시 해가 진다. 태어났으니 반드시 죽는다. 여름에는 낮이 길고 겨울에는 밤이 길다. 그러나 1년을 놓고 볼 때 낮과 밤의 길이는 똑 같다. 또 밀물이 들어오면 썰물이 되어 나간다. 1mm의 차이도 없다. 인과의 모습인 것이다. 하나가 생기면 다른 하나가 똑 같이 생긴다는 말이다.

때문에 즐거움과 괴로움의 질량 또한 똑같다. 행복과 불행의 질량 또한 똑 같을 수밖에 없다. 다만 해가 뜨는 시간과 해가 지는 시간이 다르듯이, 밀물의 시간과 썰물의 시간이 다르듯이 즐거움과 행복, 괴로움과 불행의 때가 다를 뿐,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면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시간 또한 똑같이 생기기 마련이다. 

코로나19 사태 역시 근원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좋은 시절의 역사가 있었다면 좋지 않은 시절의 역사도 도래하게 된다. 역시 인과(因果)의 수레바퀴다. 이를 윤회(輪廻)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내가 살아가는 때에 나타난 것일까? 코로나19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상관없이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교육원장 진우스님은 코로나19 사태에서 우왕좌왕하는 이들에게 “인과의 현실을 모른 척해서는 안된다”며 “육바라밀과 함께 기도, 참선으로 인과의 업을 소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청주 용화사 불자들이 코로나로 고통 받는 주민들에게 사찰음식을 나누며 보시바라밀을 실천하는 모습. 불교신문
교육원장 진우스님은 코로나19 사태에서 우왕좌왕하는 이들에게 “인과의 현실을 모른 척해서는 안된다”며 “육바라밀과 함께 기도, 참선으로 인과의 업을 소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청주 용화사 불자들이 코로나로 고통 받는 주민들에게 사찰음식을 나누며 보시바라밀을 실천하는 모습. 불교신문

괴로움의 인과(因果) 업(業)이 있는 사람은 코로나19는 물론 설사 코로나19와는 전혀 상관이 없더라도 괴로움의 과보(果報)는 받게 된다. 반대로 즐겁고 행복한 인과 업이 도래한 사람은 역시 코로나19를 피해서 즐겁고 행복한 업보를 받게 된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는 현상은 괴로움의 인과 업을 받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 된다. 좋지 않은 공업(共業)에 해당한다.

즉 즐겁고 행복한 낙업(樂業)이 나타나는 사람이 많게 되면 좀 더 즐거운 세상이 되고, 반대로 괴롭고 불행한 고업(苦業)이 나타나는 사람이 많으면 좀 더 괴로운 세상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각자의 업(業)이 문제라는 것이다. 나의 업이 좋으면 좋은 세상이 되고 나의 업이 고통이면 괴로운 세상이 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좀 더 평안하고 편안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래서 최첨단의 과학이 발달하여 편리한 세상이 되고 있다. 4차산업이다, 5차산업이다, 좀 더 있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해결하는 세상이 오게 될 것이다.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육신통(六神通)의 시대가 보편적 과학문명으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현실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생기게 된다는 인과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극락에서도 괴로움은 존재하고 지옥에서도 즐거움은 존재하게 된다. 때문에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인과의 과보(果報)를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개의 인간은 죽어라고 좋은 것만 추구하고 있다. 끝없는 고락(苦樂)의 수레바퀴가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이제 각자 모두가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수박 겉핥기로 들어서는 안 된다. 엄연한 인과의 현실을 모른 척해서는 안된다. 불구덩이 속에서도 인과의 업을 갖지 않으면 불에 태워지는 고통은 없다. 생사(生死) 생멸(生滅)이라는 인과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해결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중도(中道)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굳을 대로 굳어진 삼독심(三毒心)의 업을 쉽게 녹일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마음 수행이 필요하다. 부처님께서는 가장 함축된 행동지침을 말씀하셨다.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이다. 보시는 욕심을 없게 하여 내 것 네 것에서 벗어나 중도(中道)의 마음으로 인과를 없애는 최고의 방법이다.

내 것이라는 즐거움으로 인해 네 것을 뺏거나 빼앗기지 않으려는 괴로움의 인과를 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인연 연기에 맡기면 된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인연 연기에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된다. 간섭한다고 하여 뜨는 해가 바뀌고 지는 해가 거꾸로 뜨지는 않는다. 해가 뜨는 것에 간섭하지 않고 해가 지는 것에 간섭하지 않으면 저절로 해는 뜨고 지게 될 뿐이다. 

지계는 계(戒)를 지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간섭하지 않게 되면 저절로 걸림 없는 무애행(無涯行)이 나오게 된다. 이를 지계라고 한다. 물론 처음에는 좋은 행동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좋고 나쁜 것에 너무 집착하고 분별하게 되면 이 또한 인과에 걸리어 고락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니, 인연 연기에 맡기고 무심코 중도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저절로 몸이 움직여지게 된다. 참 지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인욕은 참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참을까? 즐거움과 기쁨 행복하기 위한 생각을 참는 것이다. 속된 말로 성질대로 하면 우선의 마음은 후련하다. 그러나 인과가 작용하여 후과(後果)가 따르게 되고 곧 후회하는 괴로움을 맛보게 된다. 남을 통하여 후련한 마음을 가지는 대가로 인해 언젠가는 고통을 당하게 되는 인과가 생긴다. 상대는 상대의 업에 의해 행동하게 되는 것인데 굳이 내가 부화뇌동(附和雷同)할 필요는 없다. 내가 움직이는 것은 곧 나의 업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것은 나의 고락(苦樂) 업(業)으로 귀착된다. 그러니 이러한 분별의 고락 업을 없애기 위해서는 육바라밀과 함께 기도와 참선을 해야 한다. 적어도 기도하는 시간, 참선하는 시간은 분별 잡념을 잠시나마 멈출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이 지속이 되어 일상생활 속에서도 기도와 참선의 마음으로 집착과 분별이 없이 행동하게 된다면 절대적인 마음의 평안이 오게 된다. 그러면서 항상 인과를 화두로 삼아 잊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늘 상기해야 한다. 부모자식 지간이라도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의 업으로 살아간다. 즉 부모는 부모의 고락 업에 의해 인과로서 살아가고 자식은 자식의 고락 업에 의해 인과로서 살아간다. 부모의 업을 자식이 대신할 수 없고 자식의 업을 부모가 대신할 수 없다. 하물며 나 이외의 업을 내가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각자의 업은 스스로 멸해야 한다. 부모로 인하여 즐거움을 얻는다면 어떤 식으로 든 괴로움의 과보가 남을 것이고, 자식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얻는다면 부모 스스로 즐거움의 과거에 즐거움의 인과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부모자식 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고락 업이 작동하는 것이니, 철저히 스스로의 업은 스스로 멸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업을 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중도를 행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시작은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부터 이다. 분별없는 마음이 곧 부처이다. 부처는 더 이상의 괴로움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현상은 인과 인연에 맡기고 끄달리지 말며, 내 마음의 인과(因果) 업(業)을 멸하여 중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야 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라 하겠다.

[불교신문3621호/2020년10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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