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한다는 것은 더 잘되려고 하는 것”

이사의 ‘손 없는 날’이란
음력 9,10,19,20,29,30일
건강과 재물 인간관계에도
손해가 없는 날이어야 해

지난 8회 차에 이어서 이사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이사(移徙)의 이는 ‘옮길 이(移)’ 자로, 이 글자를 뜯어서 살펴보면, ‘벼 화(禾)’에 ‘많을 다(多)’ 자입니다. 즉 ‘벼가 많다’, ‘벼가 많은 곳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사를 한다는 것은 ‘더 잘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이사를 할 때는 모든 것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방향이나 날짜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방향이나 날짜 때문에 ‘동티가 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인간 심리라고 봐야 합니다. 아무튼 이사를 해서 적어도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방편을 쓰는 것은 삶의 작은 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 방위에 대해서는 전 시간에 자세히 말씀을 드렸으니, 오늘은 이사 날짜에 대해서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손 없는 날’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손 없는 날이란 손해(損害)가 없는 날, 즉 건강에도 그렇고 재물에도 그렇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손해가 없는 날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손 없는 날에 이사를 하면 무탈하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 손 없는 날이라 하는 것은 음력으로 9일, 10일, 19일, 20일, 29일, 30일입니다. 이날 이사를 하면 ‘아무 걱정 할 것이 없다’, 즉 ‘손해가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은 불교 교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고, 민간 신앙과 역학(易學)이 습합(習合)의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원리가 있으나 굳이 자세하게 알 필요 없이 단순히 적용하면 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손 없는 날에 이사를 하면 되는데,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다 보니 이 날에 많이 몰립니다. 그렇다 보니 이삿짐센터의 분주함으로 이사 비용이 껑충 뛴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차선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으니,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면, ‘동쪽으로 갈 때는 어느 날만 피하면 되고, 또 서쪽으로 남쪽으로 북쪽으로 갈 때는 어느 날만 피하면 무탈하다’고 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 이론을 참고하여 이사를 하면, 이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손 없는 날에 많이 몰려서 이사 비용이 올라가는 것에 대한 손실을 덜 수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동쪽으로 이사를 갈 때는 1일, 2일, 11일, 12일, 21일, 22일만 피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남쪽으로 이사를 간다면 3일, 4일, 13일, 14일, 23일, 24일만 피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서쪽으로 이사를 간다면 5일, 6일, 15일, 16일, 25일, 26일만 피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북쪽으로 이사를 간다면 7일, 8일, 17일, 18일, 27일, 28일만 피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사를 하실 때는 손 없는 날을 택하든지, 아니면 방향에 따라 각각의 날짜만 피해서 택하면 됩니다. 이렇게만 하면 ‘이사 날짜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라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위의 내용들은 민간의 관습이자 신앙이지 불교 고유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절에서는 이사할 때 이것저것 잘 따지지 않습니다. 저희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같은 경우에도 작은 포교당에서 대지가 있는 건물로 이사할 때, 위에서 말한 이사 택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각 도량을 열고 이사할 때도 날을 받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는 스님들을 둘러보아도 “날 받아서 이사를 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절도 가끔 이사를 합니다. 도로 편입 등 국가사업 때문에 그럴 수가 있습니다. 이때 대부분 스님들은 그 절의 전체 일정과 형편을 고려하여 이사를 하지, 세속 사람들처럼 택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움직이는 날은 ‘언제나 좋은 이삿날’이다. 그림은 우학스님의 붓글씨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
부처님께서 움직이는 날은 ‘언제나 좋은 이삿날’이다. 그림은 우학스님의 붓글씨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

그렇다면 불교적 입장에서는 왜 ‘굳이 날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부처님 가시는 날은 다 부처님 날이요, 좋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다 부처님의 무대요, 부처님이 가피 내리시는 곳인데 어느 날 움직이든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옛날에 ‘운문’이라는 선사(禪師)께서는 법문을 하시다가 “대중들이여, 내가 보름 전의 일은 묻지 않겠다. 보름 후의 일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누가 한번 일러 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스님께서는 스스로 답하시기를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니라’라는 뜻인데, 이미 우리 불자들이 많이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움직이는 날은 언제나 좋은 이삿날입니다. 그 이사의 주체(主體) 스님들이 신심이 견고하면 신장까지도 도울 것이므로 탈이 날 수가 없습니다.

혹시 재가불자 중에서도 늘 기도하는 신심 깊은 불자가 있다면, 마음 내키는 대로 스님들처럼 걸림 없이 이사하셔도 됩니다. 단, 이사를 해놓고 후일에 문제가 생겼을 때라도 전혀 방향이나 날짜에 집착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방편은 집에서 지극정성 모시던 부처님 사진이나 불상이 있다면, 날짜나 방향에 그렇게 개의치 않아도 됩니다. 가정 법당의 경우로써 절이 움직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심 있는 우리 불자들이 이사할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까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지금부터는 이사할 때 참고해야 할 전반적인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만일 살던 집이 아주 편안하였다거나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 경우라면 이삿짐이 나갈 때 그 문을 확 열어놓는 것이 좋습니다. 창문까지도 다 열어젖혀서 그 기운을 함께 데리고 간다는 생각을 하십시오. 물론 살던 집이 반대의 경우라면, 마지막에 문을 꼭꼭 닫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옛날 어른들이 해오던 관습 같은 것이지만, 제가 늘 말하는 심기론(心氣論)의 측면에서도 꼭 맞는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이론입니다. 

새집으로 들어간 이후에 대해서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이사하고 짐이 정리되는 대로 안택(安宅) 의식을 할 것을 권합니다. 잘 아는 스님을 모셔다가 집의 거실에서 불공을 올리십시오. 절에 같이 다니는 도반들이 있다면 당연히 같이 참석하도록 하십시오. 이 안택 불공 하나로 모든 염려가 다 묻힙니다. 가정집이 아니고 큰 사업체 현장이나 또는 중요 사무실에서도 안택 불공을 더러 하는 수가 있는데, 신심 있는 불자라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더욱 번창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모시는 스님은 두 분 이상 복수가 좋은데, 열심히 공부하는 스님들이라야 합니다. 안택할 때 이것저것 많이 상차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팥 시루떡 정도면 되고, 스님들이 쇄수(灑水) 의식을 하도록 맑은 청수(淸水) 한 대접 준비하시면 됩니다. 스님과 도반들이 함께 정성껏 염불기도 올리고 그 자리에서 불공한 음식을 나눠먹는다면, 그 자체가 훌륭한 동티 예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건이 된다면 그 불공 음식을 이웃에 돌리는 것도 좋은 일이 됩니다.

전 시간, ‘이사 방향’에서 말씀드렸듯이 21일 정도는 매일 집에서 1시간 정도씩 기도를 올리시되, 평상시 하던 기도 끝에 <화엄경> ‘약찬게’와 <금강경>을 꼭 한 편씩 독송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는 스님께 부탁드려서 경면주사로 마하(摩訶)를 써서 현관문 위에 붙인다면 동티 걱정은 십만 팔천 리 멀어집니다. 이상한 문양의 부적은 삼가고, 스님이 써주시는 ‘마하’같은 경전 구절을 붙이시기 바랍니다. 불자의 최종 방편은 불교적이라야 합니다.

* 이 글에 대한 내용은 한국불교대학 유튜브불교대학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無一 우학 한자성어 ⑨ 信敎持善(신교지선)

종교를 믿으면 착함은 유지한다

우리의 본성(本性)에는 본래 착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본성을 외면하게 된 것은, 나쁜 마음을 먹고 마구 악(惡)을 짓기 때문입니다. 미혹의 구름이 끼어서 그렇게 된 것이지요.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특히 탐욕의 구름만 걷어내면 본래 맑은 하늘, 즉 청정한 본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 그중에서도 정법의 종교인 부처님 법을 믿으면 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전도선언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 중에는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정법을 듣지 못한다면, 설령 착한 구석이 좀 있었다 하더라도 악해질 수 있다는 말씀에 중생들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아주 큰 사건이 되었던, 제주도 섬 여인, 36세 고유정을 보십시오. 너무 엄청난 일이라서 위키백과사전에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잔인한 고유정도 학교 다닐 땐 아주 착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가 부처님 법만 믿었더라면 아마 착함이 잘 유지되어 그런 악업을 짓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불교를 잘만 믿으면 우리의 착한 마음, 착한 본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좀 박복하여 불법(佛法)을 만나지 못한다면 신을 믿는 종교라도 좋습니다. 만일 일신교(一神敎)를 만날 인연도 부족하다면 애니미즘(animism), 즉 정령신 안에 바탕을 둔 다신교(多神敎)라도 믿으면, 아무것도 믿지 아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종교는 분명 수준 차이가 있습니다. 다신교, 일신교, 진리교, 명상교, 자각교 등의 서로 다른 차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위의 종교라도 갖게 되면, 갖지 않았을 때보다는 착할 수 있습니다.

[불교신문3620호/2020년10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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