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단청과 조화 이루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다

마곡사 대광보전 내부.
마곡사 대광보전 내부.

불화는 재질과 형식에 따라 벽화(壁畵), 탱화(幀畵), 판화(版畵), 사경화(寫經畵) 등으로 분류한다. 벽화는 그중에서도 전통이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불화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경전인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那耶雜事)>에 따르면, 인도 기원정사(祇園精舍)의 문, 강당, 식당, 욕실, 화장실, 승방 등의 벽에 불교 주제의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전한다. 중앙아시아, 돈황, 중국 중원의 사원에도 벽화가 불화의 주류로 자리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고려 때까지만 해도 일반 사찰에는 벽화가 주류였을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와서 일부 변화가 생긴다. 불전의 안팎벽에 여전히 그림이 그려지긴 했지만, 불전 내부 ‘예배화’로는 주로 ‘탱화(幀畵)’가 대신했고 벽화는 불전의 ‘장엄’ 용도로 그 기능이 집약된다. 이번 회차에서 소개할 마곡사 대광보전(大光寶殿) 벽화는 조선 후기 법당에 구현된 벽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관음보살도’와 ‘나한도’는 물론 ‘도교 신선도’, ‘운룡도’, 그리고 ‘산수화’에 이르기까지 각종 주제의 그림들이 단청과 조화를 이루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또한,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들은 예배에서부터 장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충남 공주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한 천년고찰 마곡사는 유구한 역사와 사세에 걸맞게 현재도 대웅보전, 대광보전, 영산전 등 다수의 불전이 남아 있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마곡사 대광보전은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신 법당으로, 해탈문, 천왕문, 오층석탑을 지나면 만날 수 있다. 정조 6년인 1782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1785년에 중창했다고 하며,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재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벽화는 법당의 안팎에서 모두 확인된다. 

외부는, 다른 사찰들처럼, 비바람이나 햇빛 등으로 인해 일부 박락과 손상이 있지만, 내부는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다. 내부 벽화들은 법당이 중창된 후인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 무렵까지 그려진 것들이다. 
 

백의관음보살도, 대광보전 후불벽 뒷면.
백의관음보살도, 대광보전 후불벽 뒷면.

후불벽 뒤에선 관세음보살 예배

대광보전 내 정면 중앙에는 목조비로자나불좌상(15세기 추정)이 모셔져 있고 그 뒤로 석가모니불도(1788년)가 걸려있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은 후불벽 뒤쪽에 자리하고 계신다. 고주(高柱, 다른 기둥보다 높이 세운 기둥) 사이에 한지를 여러 겹 발라 화면을 마련한 뒤 그 위에 백의(白衣)를 걸치고 암석 위에 앉아계시는 모습의 관세음보살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벽화는 흙벽이나 나무벽에 바로 그리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마곡사 관음보살도는 종이를 붙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첩부(貼付)’ 벽화이다. 

관음보살은 초승달 모양의 둥근 눈썹에 꼬리가 올라간 가늘고 긴 눈, 두툼한 코에 작고 붉은 입술을 하고 있다. 손은 반가좌한 오른쪽 다리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았고, 왼발은 연꽃을 밟고 있다. 백의 위로 긴 머리칼이 양쪽으로 3갈래씩 흘러내리고 있으며, 보관에는 입상의 화불(化佛)이 모셔져 있고 목에는 영락으로 장식했다. 

양쪽 반석 위에는 관음보살을 향해 청조(靑鳥)를 들고 배례하는 선재동자와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이 각기 자리한다. 배경 산수는 모두 먹으로 진하게 처리했는데, 관음보살의 백의와 붉은색 군의(裙衣) 및 띠 매듭 등과 강렬한 채색 대비를 이룬다. 비록 어둡고 협소한 공간이기는 하나, 불자들은 이곳에서 관음보살께 예를 갖추고 진언을 외운 후 악업을 참회하는 예참(禮懺) 의식을 행했다고 전한다. 
 

나한도 일부, 대광보전 내목도리 윗벽.
나한도 일부, 대광보전 내목도리 윗벽.
나한도 일부, 대광보전 내목도리 윗벽.
나한도 일부, 대광보전 내목도리 윗벽.

상벽(上壁)은 깨달은 나한의 세계 

대광보전 안에서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면 상벽(上壁) 곳곳에서 나한(羅漢)이 확인된다. 특히 내목도리(內目道里,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짜 맞춘 공포의 안쪽에 건너지른 나무)의 윗벽에 총 서른네 분이 자리하고 있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지만, 윤곽선과 채색이 명료하여 각기 나한의 자세와 표정이 잘 드러난다. 

나한은 대부분 가사 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역동적이다. 금강령을 들고 의식을 행하거나 경전을 읽는 모습 혹은 나무에 기대어 앞의 경치를 바라보는 등 주제와 풍모도 획일화되어 있지 않고 다채롭다. 지물(持物)도 마찬가지로, 북과 징 등의 악기에서부터 파초선, 부채, 경상, 호리병, 염주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전체적으로 종교적인 위엄과 인간미가 공존하는 나한의 속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명작이다.

나한은 깨달음의 경지인 아라한과(阿羅漢果)에 도달한 위대한 수행자를 통칭하는 용어이다. 나한은 각종 신통력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분들이기에 나한전, 응진전, 영산전 등에 모시고 예배를 올린다. 그런데, 이와 달리 불전의 상부에 나한을 모신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후기에 중창 혹은 중수된 사찰의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 주불전을 보면, 상부에 나한이 적극적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포벽, 내목도리 윗벽, 심지어 고주 창방이나 출목 윗벽에서도 나한이 확인된다. 이는 나한이 ‘부처에 버금가는 경지에 이른 분들’이며 ‘미륵이 올 때까지 열반에 들기를 미룬 채 이 땅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소임을 맡고 있다’는 점과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해, 나한이 부처와 불법의 공간을 수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철괴도, 대광보전 측벽.
이철괴도, 대광보전 측벽.
유해섬(하마선인)도, 대광보전 측벽.
유해섬(하마선인)도, 대광보전 측벽.

측벽은 불교에 수용된 도교 신선

대광보전 내 북측 벽(주존 비로자나불을 기준으로 했을 경우 좌측 벽)을 보면 여러 명의 도교 신선들이 그려져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물가에 앉아 명상에 잠겨있기도 하며 물 위를 걸어 다니는 신선도 보인다. 

그중에는 이철괴(李鐵拐)와 유해섬(劉海蟾)도 포함되어 있다. 이철괴는 도교 팔선(八仙) 중의 하나이다. 어느 날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해 먼 곳을 다녀오니, 제자들이 스승이 운명한 줄 알고 화장을 시켜버린 뒤였다. 이에 굶어 죽은 거지의 몸으로 들어가 헝클어진 머리에 배를 드러낸 절름발이의 형상으로 살게 되었다. 그는 대나무 젓가락에 입김을 불어 쇠지팡이로 만들곤 했는데 이로 인해 ‘쇠지팡이(鐵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신통한 약이 들어있는 호리병을 차고 다니는 모습이 그의 상징이 되었다. 

유해섬은, 벽화에 그려진 것처럼, 세 발 두꺼비를 늘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하마(蝦䶆, 두꺼비)선인’이라고도 불린다. 마곡사 벽화에서는 앞가슴을 드러낸 흰색 상의에 적색 하의를 입은 선인이 맨발로 넘실대는 파도 위를 걸어가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의 앞에는 두 다리를 위로 뻗친 채 물속에서 뛰어오르는 두꺼비가 있고, 선인은 두 팔을 크게 벌려 이를 희롱하는 듯하다. 

조선 후기 불전을 보면 벽면에 간혹 신선이 그려진 경우를 볼 수 있다. 부안 개암사 대웅전, 통도사 대광명전, 논산 쌍계사 대웅전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불교 공간에 도교 신선이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이들이 신통력을 지닌 성인이고 그 풍모가 ‘나한’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여, 그림을 그리는 화사들이 불교 수행자로 오해했을 가능성이다. 또 한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불교에서 ‘도교를 수용’하려는 태도가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도교의 뿌리는 매우 깊었고 민중들에게도 친숙했기에 자연스럽게 수용, 습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불교신문3620호/2020년10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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