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에게서 배움의 징표를
물려받은 사람만이
스승의 가르침은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누구든지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행동해
차의 향기가 옷에 배듯이
스승의 냄새가 몸에 밴
그 사람이 바로 제자일 것이다

황건
황건

수 년 전 영국 런던의 국립해양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마지막 전시실의 이름은 ‘넬슨, 해군, 국가 전시실(Nelson, Navy, Nation gallery)’이었는데 영국이 프랑스·스페인에 맞서 제해권을 차지하는 데 공헌한 영국 해군, 특히 넬슨 제독(1758~1805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넬슨이 해군에 입대할 때부터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의 각종 자료, 그가 전사할 때 입었던 피 묻은 제복과 사망 후 잘라낸 그의 머리털까지 전시돼 있었다.

그 중 넬슨이 전사할 당시 입고 있었던 총알 뚫린 제복을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만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갑옷도 보존됐으면 후대인에게 큰 감동을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해남 대흥사 성보박물관에서 보았던 서산대사의 가사(袈裟)가 생각났다. 유리 진열장 속에 폭이 약 1m, 길이는 2m가 넘는 퇴색된 금빛 가사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755년경에 기록된 <역대법보기>에 따르면 붓다는 마하가섭에게 금란가사(金襴架裟)를 전해주고 계족산으로 들어가면서 훗날 미륵이 나타나면 건네주라고 당부했다. 이때부터 가사는 27명의 조사를 거쳐 달마에게 전수되고, 다시 6조 혜능에 이른다. 서산대사의 가사를 보니 옷을 물려받으면 법도 물려받는다는 ‘전의부법설(傳衣付法說)’이 생각났다.

혜능은 선종의 기치를 내걸고 기존 승단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다. 그의 제자 중에서 그를 6대 조사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하택신회였다. 신회는 732년 활대 대운사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다.

그의 공격 목표는 이미 입적한 신수가 아니라 신수의 뒤를 이어 7조를 자처하고 있던 보적이었다. 무차대회에서 신회는 혜능이 달마의 법을 계승했으며, 신수는 직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필요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전의부법설(傳衣付法說)이었다.

그는 신수계를 대표하는 숭원과 토론을 벌이면서 혜능이 스승 홍인으로부터 가사를 전수받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신회는 혜능이 물려받았다는 가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숭원이 가사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앞으로 저절로 알게 될 것’ 이라고만 대답했다.

<역대법보기>는 신회가 전의부법설을 주창한 지 20여 년 뒤에나 편찬됐으므로 이미 승리한 종파의 견해를 담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지만, 가사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기록의 편찬자는 혜능의 말을 빌려 가사의 행방을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렸다. 즉, 혜능이 죽음을 1년 앞둔 712년 9월 제자 현해와 지해가 누가 후계자인지를 물었을 때 혜능은 대답한다.

“나는 가사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도신 대사도 세 번이나 도난당하고, 홍인 대사도 세 번 도난당했으며, 나 역시 여섯 번이나 도난당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훔치는 자는 없다. 내 가사는 어떤 여인이 가져가 버렸다. 그대들이 내 정법을 전수받은 사람을 알고 싶다면 내가 죽은 20년 뒤에 내 종지를 세우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혜능이 712년(또는 713년)에 입적했으므로 20년 뒤는 바로 신회가 활대에서 무차대회를 연 732년과 일치하는 것을 보아 혜능의 유언은 편찬자가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갔던 날 차향(茶香)이 그윽하게 풍겨 나오던 일자암이 기억난다. 차의 향기는 차를 끓이는 사람만의 것인가? 차의 소유자 이외에는 그 향기를 맡을 수 없는가? 아니다.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스승에게서 배움의 징표를 물려받은 사람만이 스승의 가르침은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누구든지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행동해 차의 향기가 옷에 배듯이 스승의 냄새가 몸에 밴 그 사람이 바로 제자일 것이다. 

[불교신문3619호/2020년10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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