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원산까지 산문으로 떠나는 기차여행
서울에서 원산까지 산문으로 떠나는 기차여행
  • 허정철 기자
  • 승인 2020.10.05 14:09
  • 호수 3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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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방민호 교수
일제강점기 당시 경원선
관련 문인들 산문 엮어내

“시대 상황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을 것” 기대

경원선 따라 산문 여행

방민호 지음 / 예옥
방민호 지음 / 예옥

“석왕사 역은 석왕사 때문에 생긴 역이외다. 이태조가 아니더면 석왕사도 아니 생겼을 것이요, 석왕사가 아니더면 석왕사 역도 없을 것이올시다. 저리 생기고 여기 생기여 호랑이의 소굴이던 무인공상(無人空山)이 사방 인사(人士)가 즐겨 모여드는 놀이터가 된 것도 이상한 인연이외다.”(C.K.생의 ‘석왕사 가는 길’ 중에서)

불교신문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문학평론가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과 교수가 일제강점기 당시 문인들이 남겨 놓은 경원선 역들에 관련된 산문을 가려 뽑아 책으로 엮은 <경원선 따라 산문 여행>을 선보여 주목된다.

경원선은 1911년 용산-의정부, 1912년에 의정부-연천-철원, 1913년에 철원-복계-검불랑, 고산-용지원-원산, 1914년에 검불랑-세포-고산 구간이 완공됨으로써 전 구간 개통됐다.

1941년 당시 경성 역부터 원산 역까지 226.9km 내에 경성-용산-서빙고-수철리-한강리-왕십리-동경성(청량리)-연촌-창동-의정부-덕정-동두천-전곡-연천-대광리-신탄리-철원(101.8km)-월정리-가곡-평강-복계-이목-검불랑-성산-세포(154.8km)-삼방협-삼방-고산-용지원-석왕사-남산-안변-배화-갈마-원산 역 등 모두 35개의 역이 있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 경원선은 또 하나의 남북 종단 철도 경의선과 함께 휴전선을 경계로 나뉜 삶을 살아와야 했던 한국인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가지 못하는 철로’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원산 해수욕장과 함께 경원선의 3대 피서지로 꼽히던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 입구인 석왕사역과 관련된 산문이 눈길을 끈다. 동아일보 1926년 9월1일~13일에 연재된 무명 여성 C.K.생의 ‘석왕사 가는 길’은 삼방에서 석왕사를 지나 원산에 이르는 여정을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필치로 기록해 놓은 것으로 기행 산문의 가치를 여실히 맛볼 수 있게 한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당시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 응진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사진은 일제강점기 당시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 응진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문학의 답시길을 경원선으로 삼았던 이광수도 방인근과 함께 잡지 <조선문단>을 기획한 곳이 바로 석왕사였다. 그는 책에 수록된 ‘석왕사’(동아일보 1928년 10월30일)에서 “석왕사의 송림은 언제 보아도 좋다”면서 “사기리(沙器理)에서 단속문(斷俗門)까지의 평원성(平原性) 송림도 특색이 있거니와 단속문에서 등안각(登岸閣)에 이르는 약 5리 간의 계곡성(溪谷性) 송림이 더욱 좋다”고 사찰 풍광을 극찬했다.

여기에 현대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필자들도 좋은 산문들을 남겨 놓았다. “천하명승의 명사십리로 해수욕을 가는 나로서는 보일보 기차의 속력을 따라서 일선의 정감이 동해에 가득히 실린 무량한 양미(凉味)를 통하여, 각일각 접근하여짐으로 그다지 열뇌(熱惱)를 느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면 천산만수를 격하여 있는 천애의 야미를 취하려는 미래의 공상으로 차중의 현실 즉 열뇌를 정복한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이른바 일체유심이다. 만일 이것이 유심의 표현이 아니라면 유물의 반현(反現)이라고 할는지도 모른다.”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만해스님은 원산 해수욕장에 놀러갔던 내용을 기행문 형식으로 서술한 ‘명사십리’(<삼천리>, 1933년 9월)는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수필이다. 또한 염상섭의 ‘남궁벽 군의 죽음을 앞에 놓고’(<개벽>18, 1921년 12월), 임화의 ‘경궤연선’(동아일보, 1938년 4월13일, 16일 ,17일), 채만식의 ‘청량리의 가을’(<동광> 38, 1932년 10월), 이기의 ‘태평양과 삼방 유협’(동아일보, 1934년 7월20일) 등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와 더불어 김기전, 박달성, 차상찬 등 천도교 잡지 <개벽>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열정 가득한 민족애의 소유자들도 자신들의 발로 몸소 국토를 답사하며 쓴 글들을 남겼다. 지리와 역사와 종교, 문화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던 이들의 산문들이 자칫 가벼움에 흐르기 쉬운 이 산문집의 균형을 잡아준다.

저자는 “산문선에는 주로 동아, 조선, 매일 등에서 뽑은 신문기사들이 ‘팁’으로 실려 있다”면서 “이는 역마다 좋은 산문을 고르기 어려웠던 데서 온 고육지책이지만 그보다 일제 강점기의 삶 그 자체를 이 기사들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시대 상황을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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