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대표적 불교인사로 사회참여 활동

1960년대 초 사회문제 관심
진보학자 황산덕교수와 교류
‘사상계’ 접하며 역사의식 함양

1960년대 말 월남파병 반대
1970년대 ‘씨알의 소리’ 활동
박정희 독재정권에 적극 항거

일반적으로 법정스님을 평가할 때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을 실천한 수행자이자 수필가로 인식한다. 그렇지만 스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초기 저작의 상당한 부분에서 사회민주화에 대한 글들이 많이 보이고 이와 관련된 활동도 상당히 한 것으로 파악된다. 1970년대 초에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항거했고 유신헌법 선포 때는 불교계를 대표해 상당한 저항운동을 한 모습이 확인된다. 

법정스님이 사회문제에 대한 생각을 골똘히 한 계기는 1960년대 초다. 스님은 자신의 저서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서 이런 내용을 밝힌다.

“양산 통도사 원통방(圓通房)에서 불교사전 편찬 일을 거들면서, 비로소 신문을 보고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움직이는 세상과 접하게 된 것이다.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익혔던 업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통도사에서 지내는 그해 4·19를 맞이했었다. 종교의 역사의식에 대해서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세상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였다.”
 

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 대사회적인 민주화운동에 나서며 많은 글을 기고했던 씨ᄋᆞᆯ의 소리 영인본.
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 대사회적인 민주화운동에 나서며 많은 글을 기고했던 ‘씨ᄋᆞᆯ의 소리’ 영인본.

하지만 법정스님은 출가 후 해인사에서 수행하며 정식 스님이 되는 비구계를 받을 때까지 경전과 참선수행에 매진하며 상당한 민주인사와 접촉하며 사회민주화에 대한 생각을 한 것으로 본다. 대표적인 예가 1958년 강연 차 해인사에 왔던 민주화 인사인 황산덕 서울대 법대교수와의 만남이다.

그 후 황산덕 교수는 법정스님에게 당시 진보 잡지였던 <사상계>를 보내주고 법정스님은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키운다. 법정스님의 사촌동생인 박성직 거사가 해인사에 있던 법정스님과 나눈 편지글 모음집인 <마음하는 아우야!>에는 이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서울대 법대(法大)에 계신 황산덕(黃山德) 교수(敎授)께서 지난 해 여름부터 나에게 <사상계(思想界)>를 보내주고 있다. 거기에서 유 선생(柳先生)님과 함께 함 선생(咸先生)님의 글을 감명 깊게 읽을 수 있었다.”

1960년부터는 통도사에서 운허스님이 주도했던 <불교사전> 편찬사업에 참여하면서 신문과 뉴스를 접하기도 한다. 해인사와 서울을 오갈 때 법정스님은 서울 선학원 앞에서 스님이 5·16 군사쿠데타로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며 사회민주화에 대한 발원한 내용을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가운데 ‘박새의 보금자리’라는 글로 술회했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선학원은 내가 처음으로 스승을 친견,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걸치게 된 인연 있는 절인데, <불교사전> 일로 이곳에 와 있으면서 5·16 군사 쿠데타를 겪었다. 그날 아침 총성이 여기저기 들려왔고 노스님 한 분이 절 마당에서 어정거리다 팔에 유탄을 맞아 피를 흘리는 것을 목격하고, 아하 혁명이란 무력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이구나 싶었다.” 

법정스님은 사회민주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표현했다.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주석하면서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의 주필 겸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다양한 글을 썼다. 1966년 7월에는 월남전쟁 파병반대에 대한 글인 ‘역사여 되풀이 되지 말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지혜와 자비의 길을 닦는 닦는 도량(道場)), 거기를 우리는 사원이라고 부른다. 요즘 이 나라의 방방곡곡 불교 사원에서는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깃발을 내걸고 기도를 하고 있다. 무운장구!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 군국 일제(日帝)의 말기 그들의 식민지이던 한반도의 하늘 아래 휘날리던 그 깃발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헤면서 파아란 동요라도 불러야 할 그 시절의 어린이들은 살벌한 군국(軍國)의 노래를 불러야 했다. 무운장구! 무운(武運)이 오래오래 이어가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무력(武力)이 언제든지 왕성해지라는 것이고, 따라서 군국의 날이 영원불멸하라는 말이다. 그 어떠한 명분에서일지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악이다. 그런데 싸움을 말려야 할 종교인이 그 싸움에 동조한다는 것은 더욱 큰 악이다. 전국 사원에서는 조석으로 한 시간씩 월남전선에 가 있는 장병들을 위해 ‘사기왕성(士氣旺盛), 임전무퇴(臨戰無退), 연일전첩(連日戰捷), 국위선양(國威宣揚)…’의 기도를 하라고 총무원 당국은 지시했다. 

이것은 적어도 불교도들이 해야 할 축원이 아니다. ‘한시 바삐 싸움이 종식되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고 온 누리가 평화롭게 살아지이다’하는 염원이 앞서야 할 텐데, 그저 무운이 장구하라는 것은 무슨 망녕된 말인가. 일체 중생을 내 몸같이 아까라고 하신 불타의 교훈과는 그 거리가 십만 팔천 리나 멀다.”

‘청년 법정’의 젊은 혈기가 넘쳐흐르는 이 글이 게재된 이후 조계종단에서 상당한 압박이 있었는데 이는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중반 불교신문에 재직했던 송재운 전 동국대 교수는 “이 필화사건으로 인해 법정스님은 종단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어 있어서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고 유야무야된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1973년에 출간된 법정스님의 첫 수상집 <영혼의 모음>에도 사회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오롯하게 담고 있다. 이 책은 법정스님의 불교사상과 사회민주화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담겨 있는데 서문에서부터 사뭇 진지하다. 

“어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니 울컥 목이 메었다. 모두가 착하디착한 이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루의 고된 생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눈매에서 뭐라 말하기 어려운 인간의 우수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중략)… 납덩이처럼 무겁고 답답하기만 한 이 가을의 공기 속에서 그토록 선량한 눈매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어디서 무얼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이 뭘 잘못했다고 이 가을의 공기는 이렇게 숨이 막히는가. 언어가, 인간의 그 언어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들으려야 들을 수가 없다. 요즈음 신문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라디오를 들어도 눈물이 난다. 인간의 말이 듣고 싶어서, 우리들 이웃의 나직한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내 귀는 도리어 문을 닫는다. …(중략)… 지형(紙型)까지 떠 놓았지만 언제 책이 되어 햇빛을 보게 될는지 알 수 없다. 영혼의 모음(母音)은 맑게 개인 하늘 아래서가 아니면 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중략)…1972년 입동절 다래헌(茶來軒)에서 저자 합장.” 

책의 하단 각주에는 “이해 가을 군사 독재 정부는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 소위 10월 유신으로써 선량한 국민들로부터 언론과 집회 결사등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했다”는 글귀가 달려 있다. 
 

법정스님이 사회민주화에 눈을 뜬 사상계 내용을 사촌동생에게 보낸 편지.
법정스님이 사회민주화에 눈을 뜬 ‘사상계’ 내용을 사촌동생에게 보낸 편지.

이처럼 법정스님은 1970년대 초에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사로 나섰다. 1972년 <씨알의 소리>에 처음 이름을 올린 법정스님은 이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불교계를 대표하는 민주인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숱한 감시를 받고 탄압을 받기도 한다. 그 정황은 ‘1974년 1월 - 어느 몰지각자의 노래’라는 시(詩)에서도 보인다. 

“섣달 그믐/ 흩어졌던 이웃들이 모여/ 오손도손 나누는 정다운 제야/ 나는 검은색 코로나에 실려/ 낯선 사벽(四壁)의 초대를 받는다./ 이 시대/ 이 지역에서/ 그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떠는 곳./ 밤새껏 냉수를 마셔가며/ 진술서에/ 강요된 자서전을 쓴다. …(중략)… 손가락마다 등사잉크를 발라/ 검은 지문을 남기고/ 가슴에 명패를 달아/ 사진도 찍는다. / 근래 이런 일이/ 내게는 익숙해 졌지만/ 섣달그믐 이 제야에는 성모 마리아의 품에라도/ 반쯤 기대고 싶었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김영현씨가 201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에 기록한 자료는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해(1974년) 12월25일.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열 명의 중앙운영위원을 뽑았다. 지금은 대부분 작고하셨지만 당시는 아직 젊었던 법정 스님, 계훈제 선생, 함세웅 신부, 한승헌 변호사 등과 김병걸 선생이 뽑혔다.”

이처럼 왕성한 사회민주화 운동에 앞장 섰던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 서울을 떠나 송광사 토굴을 보수해 ‘불일암’이라 이름 짓어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 그 이유를 법정스님은 1993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버리고 떠나기> 가운데 ‘아직 끝나지 않은 출가(出家)’라는 글을 통해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75년이던가, 이른바 인혁당(人革黨) 사건으로 한 무리의 반정부 세력이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반체제 쪽에서는 이를 정치적인 조작극이라고 몰아붙이자 군사독재자들은 사형을 언도한 바로 그 다음날 여덟 명 전원을 사형집행하고 말았다. 사법사상 일찍이 그 유래가 없었던 이런 만행 앞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죄 없는 그들을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이 없다고 나는 자책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독재자들에게 조작극이라고 그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보란 듯이 재빨리 사형을 집행하고 만 것이다.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죽게 한 이와 같은 반체제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색 출가 수행자로서 마음에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는다는 일 또한 자책이 되었다. 무슨 운동이든지 개인의 인격형성의 길과 이어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내가 무엇 때문에 출가 수행자가 되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 그릇과 삶의 몫이 무엇인가도 다시 헤아리게 되었다.”

법정스님은 “거듭 털고 일어서는 출가의 각오로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산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불교신문3618호/2020년9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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