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성 상징하는 치성광여래에 복덕 빌어

불교, 고려 때 별자리 신앙 수용
조선시대에 대중적으로 성행
일월, 일곱별의 구요신앙 유래

치성광여래 재난 소멸시키고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여겨
좌우엔 일광, 월광보살 협시

북두칠성 뜻하는 칠여래 비롯
도교 북극성 북두칠성 상징한
자미대제 칠원성군 함께 표현

경허스님 개심사 회주 때 조성
구름으로 성격별로 무리 나눠
존격 차이 시각적으로 보여줘

하늘의 별자리는 누군가에겐 길잡이가 되어 주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기도 하며, 어떤 이에게는 복덕을 가져다주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별자리 신앙을 받아들여, 북극성, 북두칠성을 비롯한 성수(星宿)를 형상화하고 예배 존상으로 숭배해 왔다. 한국의 경우, 삼국 및 통일신라 때도 관련 신앙이 확인되긴 하지만, 불교에 수용되어 구체적으로 법식을 갖추고 체계화된 것은 고려 때이다.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서 좀 더 대중적으로 성행하게 된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 후기에는 불사의 후원 주체가 사찰과 민간에게로 이행하면서 별자리 신앙이 폭넓게 수용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각화된 이미지를 지닌 불화의 수요도 증가하여 각종 형식의 관련 불화들이 제작되었다.

그 중심에 치성광여래도(熾盛光如來圖)가 있다. 일부에서는 ‘칠성도(七星圖)’라 부르기도 하고, 대부분 걸개그림이므로 ‘칠성탱화(七星幀畵)’라고도 부른다. 필자는 불교에 수용된 별자리 그림의 ‘주존’이 칠성이 아닌 ‘치성광여래’이기에, 불화의 명칭을 치성광여래도라고 칭하고자 한다. 
 

치성광여래도, 조선 1887년, 면본채색, 206×251.5㎝, 서산 개심사.
치성광여래도, 조선 1887년, 면본채색, 206×251.5㎝, 서산 개심사.

치성광여래도는 삼성각(三聖閣)의 중앙에 봉안되기도 하고, 혹은 북극전(北極殿), 칠성각(七星閣),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전각에 걸리기도 하며, 때론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 사찰의 주불전 측면부에 봉안되기도 한다. 이번 회차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치성광여래도는 서산 개심사의 것으로,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충남 서산 상왕산(象王山) 자락에 자리한 개심사(開心寺)는 말 그대로 ‘마음을 열어 깨달음을 얻으라’는 의미의 절이다. 마음을 씻는 곳, ‘세심동(洗心洞)’이라고도 불리는 명찰로, 현재는 예산 수덕사의 말사로 소속되어 있다.

명필 김규진이 쓴 ‘象王山 開心寺’라는 편액이 걸린 안양루를 지나 대웅전에 들어가면, 정면 중앙에는 새롭게 그려 모신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원본은 1991년에 분실됨)가 걸려있고 그 옆인 향 좌측에 치성광여래도가 모셔져 있다. 이 그림은 조선 말엽인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세로 높이는 206cm, 가로 너비는 251.5㎝이고 면 바탕에 채색되었다.

화면 중앙에는 ‘북극성(北極星)’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가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춘 채 대좌에 결가부좌하고 앉아계신다. 치성광여래는 <불설대위덕금륜불정치성광여래소제일체재난다라니경(佛說大威德金輪佛頂熾盛光如來消除一切災難陀羅尼經)>에 따르면, 여러 가지 재난을 소멸시켜주고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언급되어 있다.

또한 <대묘금강대감로군다리염만치성불정경(大妙金剛大甘露軍拏利焰鬘熾盛佛頂經)>에서는 치성광여래가 손에 금륜(金輪)을 들고 있으며 몸에서는 무량백천(無量百千)의 광명이 나온다고 쓰여 있기도 하다. 개심사본의 경우, 금륜은 생략되어 있다.

치성광여래 신앙의 뿌리는 구요(九曜) 신앙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구요 신앙은 ‘일월’과 ‘일곱별’로 구성된 구요(九曜)가 본궤도를 벗어나 인간에게 영향을 줄 때 그에 따른 재앙을 소멸시키기 위해 기도하는 성수(星宿) 신앙이다.

연구자들의 성과에 따르면, 치성광여래는 이러한 구요 신앙이 중국에 전래된 후 당시 중국의 전통적인 북극성신앙과 습합, 변화하면서 새롭게 형성된 존상이라고 한다. 또한, 북극성은 밤하늘에서 무한한 광명인 ‘치성광(熾盛光)’을 발하므로, 이를 여래화하는 과정에서 ‘치성광여래’라는 명호가 차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치성광여래, 좌협시 소재보살(일명 ‘일광보살’)과 우협시 식재보살(일명 ‘월광보살’)
치성광여래, 좌협시 소재보살(일명 ‘일광보살’)과 우협시 식재보살(일명 ‘월광보살’)

치성광여래의 좌우에는 붉은 해를 든 소재보살(消災菩薩)과 흰 달을 든 식재보살(息災菩薩)이 협시하고 있다. 이들의 존명은 이미 고려 때부터 확인되며 조선으로도 계승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치성광여래도나 조선 1717년작 동화사 치성광여래도를 보면 좌협시를 ‘소재보살’, 우협시를 ‘식재보살’로 기록했다.

또한, 의식집인 석문의범(釋門儀範, 1935)에도 ‘일광변조 소재보살(日光遍照 消災菩薩), 월광변조 식재보살(月光遍照 息災菩薩)’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들을 일명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에 기인한 것이다. 

치성광삼존의 주변으로는 좌측(향 우측)에 3위, 우측(향 좌측)에 4위, 총 7위의 여래가 두광(頭光)을 갖추고 합장한 채 서 있다. 이분들이 바로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상징하는 칠여래이다. <불설북두칠성연명경(佛說北斗七星延命經)>에는 ‘대소 생명이 모두 북두칠성의 소관이다.

이 경을 받들면 현세에 복덕을 누리고 후세에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북두칠성을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고도 칭하고 있다. 이렇듯 북두칠성은 전통적으로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대표적인 성신으로 여겨져 왔으며, 불교에서도 칠성을 별도의 화폭에 그려 모시기도 했다. 
 

자미대제와 협시.
자미대제와 협시.
칠원성군, 칠여래, 이십팔수, 삼태육성 일부(화면 아래서부터).
칠원성군, 칠여래, 이십팔수, 삼태육성 일부(화면 아래서부터).

치성광여래의 앞에는 구름으로 별도의 구획을 만들어 자미대제(紫微大帝)를 두었고, 칠성여래의 앞쪽에는 칠원성군을 두었다. 자미대제와 칠원성군은 도교에서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존상들이다. 천관서(天官書)나 상청십일대요등의(上淸十一大曜燈儀) 등을 보면, 중천성주(中天星主), 즉 북극성을 자미대제라고 칭하고 있다.

칠원성군의 경우, 북두칠성연명경에서는 ‘양명탐랑태성군(陽明貪狼太星君), 음정거문원성군(陰精巨門元星君), 진인록존성군(眞人祿存貞星君), 현명문곡뉴성군(玄冥文曲紐星君), 단원염정강성군(丹元廉貞網星君), 북극무곡기성군(北極武曲紀星君), 천관파군관성군(天官破君關星君)’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치성광여래와 협시보살의 주변에는 도교 관복을 입은 이십팔수(二十八宿)가 각각 14위씩 좌우로 에워싸고 있으며, 화면 상단에는 삼태육성(三台六星)이 자리하고 있다. 28수는 한 달에 달이 지구를 도는 시간을 28일이라고 보고 이에 따라 나타나는 별자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자세와 표정을 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삼태육성은 북극성을 지키는 별로, 상태성(上台星)·중태성(中台星)·하태성(下台星)의 6 별자리이다. 장수를 상징하는 복숭아 등의 과일을 들고 있거나 홀을 든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듯 개심사본은 주존인 치성광여래, 좌우 협시인 소재보살(일광보살)과 식재보살(월광보살), 칠성여래, 이십팔수와 남태육성까지 모두 등장한다. 더불어 치성광여래와 칠성의 도교 존상인 자미대제와 칠원성군도 표현되어 있다. 불교에서 언급된 각종 별자리가 빠짐없이 등장한 셈이다. 구성과 더불어 배치에서도 이 그림의 우수성이 확인된다.

무수히 많은 존상들이 한 화면에 함께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름을 이용해 각기 성격별로 무리를 나누었다. 또한, 형상의 크기 차이도 확연하다. 예를 들어, 주존인 치성광여래는 가장 크게 그렸고 28수는 상대적으로 매우 작게 묘사했다. 존격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명확히 확인시켜 준다.
 

경허당 성우스님 진영, 1936년, 면본채색, 127×87.5cm, 수덕사 소장.
경허당 성우스님 진영, 1936년, 면본채색, 127×87.5cm, 수덕사 소장.

이 그림은 경허당 성우(鏡虛堂 惺牛, 1846~1912)스님이 개심사에 회주(會主)로 있을 때 제작, 봉안된 것이다. 화기(畵記)의 맨 앞에 명시되어 있다. 경허스님은 근대 한국불교를 중흥시키셨으며, 수월·혜월·만공스님을 길러낸 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치성광여래도는 개심사가 경허스님을 모시고 사세와 선풍을 진작하던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현재도 개심사에는 스님이 쓰던 요사채 ‘경허당’이 남아 있다.

그림의 제작은 상옥(祥玉)스님이 주관했으며 밑그림은 능호(能昊)스님 등이 맡았다. 이 그림은 갑사 대자암(大慈庵) 치성광여래도(1885)의 화면 구성 및 구도를 일부 수용했지만, 재해석하여 새롭게 구성했다. 조선 말엽, 치성광여래도가 활발히 제작되던 때, 별자리 신앙과 그림의 구성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인식을 바탕으로 그려진 치성광여래도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불교신문3616호/2020년9월23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