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정권 희생양…자주성 인식 전화위복”

대통령과 국무총리 법난 사과
법난 후 불교사회운동 ‘본격’
정토구현 발원 사부대중 원력

1980년 10월27일 새벽.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 사찰에 무장병력이 들이닥쳐 스님과 재가불자를 강제 연행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10·27 법난(法難)이다. 신군부는 합법적으로 출범한 총무원 집행부 등 종단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렸다. 10·27 법난이 발생한지 40년이 흐르면서 한국사회와 불교 역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종교의 자유를 무시한 법난을 겪은 불교는 시선을 돌려 시민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정토(淨土) 구현의 원력을 실현해 나갔다. 법난 40주년을 맞아 불교계 시민사회운동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력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불교계였다. 사진은 법난이 일어난 당일인 1980년 10월27일 ‘제5공화국헌법 발효’ 기사를 보도한 한 일간지 1면.
무력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불교계였다. 사진은 법난이 일어난 당일인 1980년 10월27일 ‘제5공화국헌법 발효’ 기사를 보도한 한 일간지 1면.

1980년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시절 2년7개월간 이어진 조계사-개운사의 갈등이 해소되고 새로운 종단 집행부가 합법적으로 출범했다. 그해 4월 17대 총무원장에 선출된 월주스님은 종단 화합을 기반으로 불교발전을 성취하기 위해 종도들과 마음을 하나로 모아 나갔다. 

그러나 신군부는 총무원장의 인가(당시는 문공부가 권한을 갖고 있었다)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불교 길들이기’에 나섰다. 조계종이 광주시민 돕기에 나서고, 공개적으로 정권을 지지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신군부가 초(超) 헌법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10·27법난을 일으켰다는 분석도 있다. 비상계엄령을 확대하고 광주 시민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한 후 국민의 시선을 돌리는데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회정화 차원에서 불교계를 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언론을 동원해 ‘비리·범법(犯法) 승려 연행’ 등의 뉴스를 쏟아낸 것도 그 때문이다.

10·27법난 당일 5공화국 헌법을 발효하고, 다음날인 28일 국회 기능을 대행하는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명단을 발표했다. 신군부가 정권 장악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과정에서 자행한 법난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총무원장 월주스님이 1980년 10월7일자 동아일보 ‘청론탁설(淸論濁說)’에 게재한 ‘사회정의’란 제목의 칼럼은 그 당시 신군부에 대한 종단 지도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월주스님은 “이기심은 인간을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의 노예가 되게 하고 나아가 참되고 올바른 길을 외면하는 옹고집의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게 까지 한다”면서 “자신의 인격마저 파탄에 빠지게 하는 이기심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정의는 발붙일 수 없다”고 비정상적으로 정권을 차지한 신군부를 비판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자행한 법난으로 총무원 집행부가 공권력에 의해 중도하차 하는 등 불교계가 입은 상처는 심각했다. 법난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스님과 불자들은 진상규명및 사과 요구를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 결과 1989년 12월30일 강영훈 국무총리가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2018년 4월17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불교는 군부독재시절 국가권력에 의해 성역을 침탈당하는 (10·27법난이라는)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면서 “불교계에 남은 깊은 상처에 심심한 유감의 뜻을 전한다”고 공식 사과했다.

1980년 신군부의 노골적인 지지 요청을 수용하지 않고, 5·18 민주화 운동 직후 광주를 직접 방문하는 등 국민과 함께하는 행보를 이어갔던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은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에서 “권력이 몇 차례 내민 손을 잡았으면 법난을 피할 수 있었을까”라고 반문하면서 “여러 번 생각해 보았지만 대답은 ‘아니다’였다”고 회고했다. 

법난 이후 불교계는 정부나 시민단체들이 미처 살피지 못한 영역까지 아우른 사회운동을 통해 한국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이끌어 냈다. 수행과 전법의 상구보리(上求菩提)와 중생구제의 원력을 실천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에 적극 나섰다. NGO, 공명선거, 환경, 인권, 남북교류, 사회복지, 민주화운동, 국제개발협력 등 그동안 관심이 미치지 못한 다양한 영역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펼치는 사회운동을 실천했다.

특히 1994년 종단개혁 이듬해 1월 성도재일을 맞아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사부대중은 ‘더불어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적극 나섰다. 국민과 함께하는 불교로 거듭난 것이다. 10·27법난은 한국불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미증유의 대사건이다. 신군부가 자행한 법난으로 만신창이가 된 불교는 자주성 회복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각성하는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불교신문3615호/2020년9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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