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탱해왔던 삶과 사람
사랑, 상식과 점점 이별한다

혜인스님
혜인스님

“삶이 괴로워요?” “그게 느껴져요?” 괴로움이 어떻게 성스러운 진리가 될 수 있는지 스스로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 차 있던 그땐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질문을 했었다. 삶(生)이란 결국 늙고(老) 병들어(病) 죽음(死)으로 끝날 수밖에 없어서 괴로움이라는 경전 속 말은 와닿지 않았다. 그럼 젊을 때는? 건강할 때는? 살아있을 때는 행복하잖아? 부처님의 말씀도 믿을 수 없었던 이유는 누구보다 열심히 산다고 자부했던 내가 누구보다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남들이 어려워하는 선배와 하던 때였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업에 휘둘리기 싫어서 단 것엔 손대지 말고 쓴 것은 품어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던 때였다. 쓴 걸 기꺼이 품어주는 만큼 남들은 점점 편하게 더 쓴 것도 뱉어준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힘들었지만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싶진 않아서 꾹 참고 자신을 다독여갔다. 그러는 사이 쌓인 억울함은 엉뚱한 질문으로 새어 나왔다.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며? 부처님 말씀처럼 하심하고 부지런히 살면 마음이 편해진다며?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며? 그럼 괴로움은 언제 없어지고 즐거움은 언제 얻는 건데?

누군가에게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내 맹점은 언제나처럼 불현듯 알게 됐다. 무명(無明)을 스스로에게 깨우쳐주기 위한 내 안의 불성이 어리석은 질문으로 드러났는지도. 불만 가득했던 질문들이 진리로 다가가는 과정이었다는 건 그러고 나서도 한참 후에나 알게 된 사실이다.

그다음부턴 괴로움이 알고 싶었다.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모르고 살아서 괴로운 거라면, 그 괴로움만 제대로 알면 괴롭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님은 괴로워요? 진짜로 사무치게 괴로워요?” 진짜 괴로움을 아는 이라면 내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는 기대 역시 어리석음이었다는 것도 언제나처럼 불현듯 알게 됐다. 괴로움이 정말 성스러운 진리인 사람은 이미 이 강을 건넜겠지. 저 언덕에서 아무리 날 부른들 강은 결국 내가 건너야지.

900일을 바라보는 지금도 내 어리석은 불성이 던지는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그 괴로움을 좀 더 의연한 마음으로 견뎌내는 요령만 좀 생기지. 물론 의연해지는 만큼 마치 태양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더 뜨겁고 괴로워지지만, 괴로워지는 만큼 난 이 언덕에서 멀어지는 거다. 그렇게 그동안 나를 지탱해왔던 삶과 사람들과 사랑과 상식들과 점점 이별하는 거다.

요즘엔 그렇게 이 언덕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어진다. 마음이 이렇게 갱년기처럼 휙휙 바뀌는 게 괴로움이라는 걸 이제야 좀 알 거 같다. 부처님이 왜 입이 닳도록 제자들에게 “OO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나라고 내 것이라고 나의 자아라고 보는 것은 타당한가?”라고 수없이 물으셨는지 이제야 좀 알 거 같다.

너무 빨라서 그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이제야 좀 알 거 같다.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가 이제야 좀 보이는 거 같다. 괴로움을 스스로 붙들고 있는 내 어리석음을 이제야 좀 인정할 수 있을 거 같다. 덕분에 갱년기 어르신들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점점 멀어진다. 나의 삶으로부터, 나의 사람들로부터, 나의 즐거움으로부터. 나도 아쉽지만, 정진할 수밖에 없어서, 이별할 수밖에 없다. 저 언덕에서 성스러운 괴로움의 불성이 나를 부르고 있으니. 괴로울 수밖에 없다.

[불교신문3615호/2020년9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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