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수행은 집착 다스리는 것

마음은 식과 수상행으로 이뤄져
대상과 심소의 비실체 강조함은
집착할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

등현스님
등현스님

초기불교에서 유식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수행은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과 대상에 대한 집착(法執)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면 자아는 무엇이고 대상은 무엇인가. 자아는 곧 몸과 마음이다. 몸의 대상은 느낌, 마음의 대상은 법이기에 신수심법이 자아이다. 그러나 이 법은 수상행으로 이루어졌고, 수상행은 색 즉 대상에 대한 수상행이다.

마음이 받은 대상에 대한 정보(ākara)를 지성과 감정과 의지로 분별한 것이 곧 수상행이다. 그러므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다스리려면 수상행에 대한 집착을 다스려야 하고(修道), 수상행에 대한 집착은 대상(色)에 대한 집착을 먼저 다스려야 한다. 그러므로 유식에서는 대상(色)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이다. 

대상(色)은 복과 비복이라는 업의 결과로 이루어진 세간이고, 또한 대상(色)은 욕구(행)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바깥 대상(色)을 바꾸려면 스스로의 욕구를 잘 알아야만 한다. 선한 욕구는 삼선도로, 악한 욕구는 삼악도라는 색의 원인이 되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행을 잘 아는 것이다. 그러면 욕구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이익과 손해,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판단 작용(想)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익과 손해, 옳고 그름을 바르게 아는 것이 욕구를 다스리는데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이 판단 작용(想)은 느낌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좋아하는 느낌은 친숙한 기억에 대한 느낌이고, 싫어하는 느낌은 낮선 느낌에 대한 기억이다. 이 수상행의 연기를 알고, 그것에 의해서 내가 지금 경험하는 현실(色)이 이루어졌다라는 것을 알면 대상(小取, grāhya)에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 이 수상행식(能取)의 작용을 업이라고 하며, 이들에 대한 집착이 다하면 능취(能取, grāhaka) 또한 소멸하게 된다.

이 능취는 대상인 소취에 대한 능취이고 대상(소취)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는 한 이 능취는 다스려질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수상행을 다스리는 것은 대상이 되는 소취(色)를 어떻게 다스리는지가 관건이다. 이 때문에 대상(色)이 실체로 존재하는지, 또한 존재한다고 해도 대상(色)의 구성 요소는 원자인지, 아니면 투사된 허상인지 등에 대해서 유식은 고찰하는 것이다.

훗설(Husserl)은 현상학에서 마음은 지향성(internationality)이 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은 x에 대한 의식(consciousness of something)이다. 연필에 대한 의식, 핸드폰에 대한 의식, 노트북에 대한 의식 등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의식의 합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아비담마 불교에서는 심(식)과 심소(수상행)라고 한다. 

다만 대상을 의식한다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외경(外境) 그 자체를 의식이 경험하는가, 아니면 외경의 표상을 5근의 감각 기관에 의해 캡처한 후에 그 이미지를 마음이 경험하는가이다. 전자는 무형상 지식에 해당되고, 후자는 유형상 지식에 해당된다. 유형상 지식은 상(相)이 있는 심소를 말하고, 무형상 지식은 마음이 직접 외경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간접 인식으로 발생하는 표상이 대상인 외경과 같은가 다른 것인가의 문제와 시간차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외경의 실재성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경량부는 설일체유부의 직접 인식에 반해 간접 인식을 주장하고, 유부의 동시 인식 대신 차제 인식을 말한다. 차제 인식이 간접 인식이라면 내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전오식의 근거가 실재하는 대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리하여 ‘오직 식(vijnāpti matra)’만이 존재한다는 설로 전개되어지는 것이다.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고 할 때, 대상의 부재(不在)에도 식이 발생할 수 있는가의 의문이 제기되고, 의식의 투사(projection)에 의해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현현(pratibhāsa)이론이 발생한다.

알라야식에 의해서 투사된 외경은 ‘분별되어진 성품(parikalpita, 遍計所執性)’이라 하고, 그 외경을 경험하는 심과 심소는 외경에 의존하므로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paratantra, 依他起性)’이라 한다. 이 변계소집성이 허망하기에 의타기성도 공함을 보면 그것이 ‘원만하고 참된 성품(parinis.panna, 圓成實性)’이다. 유식에서 대상과 심소의 비실체를 강조하는 것은 대상과 심소에 집착할 것이 없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중변분별론을 중심으로)

[불교신문3615호/2020년9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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